부솔공사적(副率公事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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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솔공증지평휘동윤사적(副率公贈持平諱東尹事蹟)
백씨(伯氏)의 휘(諱)는 동윤(東尹)이고 자(字)는 지보(志甫)이며 호방하고 기이한 행동을 좋아했으나 충의를 지켰다. 그는 10세 전에 이미 기이한 기운이 있었으므로 어린 아이들과 놀 때 높은 자리에 앉아서 다른 아이를 마음대로 부렸다. 【이하는 모두 계제인 오창공(梧窓公)이 기록한 것이다】
일찍이 참의(參議) 유범애(柳泛愛) 선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스스로 말하기를 ‘글이 이백(李白)만 못하고 글씨가 왕희지(王羲之)만 못하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여, 그의 시격(詩格)과 필법(筆法)이 모두 진보했다.
공부를 하는 여가에 하루는 여러 동료들을 거느리고 목멱산(木覓山)에 올라가서 삼각산(三角山)의 여러 사찰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도봉산(道峯山)으로 나와 동호(東湖)를 거쳐서 돌아오는데 한 달 남짓 걸렸다. 종형(從兄)이 이 일을 듣고서 부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아이가 밖으로는 방탕한 듯하나 대개 그의 호방함을 이기지 못하여 그런 것이니 그의 심중에는 가진 것이 따로 있을 것입니다. 그냥 놔두시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뒤 여러 사람이 비단옷을 입기를 좋아 했으나 백씨는 낯을 가리며 피하고 드디어 전심으로 공부하고 병서를 섭렵하여 계략한 바가 많았던 것이다.
계미년에 북방의 오랑캐가 경원진(慶源鎭)을 함락시켰다. 조정에서 걱정하여 장수를 뽑고 병사를 모집하느라고 소란스러웠다. 백씨는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작은 마을을 돌아보니 변방의 장수가 행정을 번거롭게 하여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이 보고를 한 것은 원계(怨計)에 그칠 뿐으로 관리 한사람을 보내서 논의하면 족할 것이다.” 바로 위로 천문(天門)에 계책을 올리고 만 리 밖에서 공을 세울 뜻이 있었던 것이다.
기축년 진사시에 합격했는데 정협(鄭協) 부자(父子)가 역적 정여립(鄭汝立)의 친족이라고 해서 의론이 분분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겁을 내어 감히 그 문에 가까이 가지 못하였으나 백씨만은 “평일에 서로 친하게 교유해 오다가 곤란하게 됐다고 돌아보지도 않는 것은 나는 할 수 없다.”고 하면서 혼자 가서 보곤 하였다. 심문하는데도 실지봉(實地封)해서 미행자(尾行者)의 구실이 되지 말게 하라고 하였으나 그 말에 따르지 아니하고 무고죄(誣告罪)를 얻게 되었다. 백씨는 깊이 애석하게 여기어 ‘나를 위해 힘써 온 자를 정성을 다하지 못하여 그를 깨우치게 하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선인께서 도헌(都憲)이 되어 연석(筵席)에 계실 때 힘껏 신원(伸寃)을 했으니 그의 실정을 알고 또한 그 상세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임진년에 왜구가 쳐들어와서 백씨가 어머니를 모시고 산골짜기로 피난을 갔다. 식사를 하지 못 할 때도 있었으나 오직 어머니를 받드는 일에만 마음을 썼다. 광해군이 세자(世子)가 되어서 이천(伊川)에 이르자, 백씨가 그곳에 나아가 호위의 임무를 받고 성천(成川)까지 왔다. 명령을 받고는 의주(義州)로 가서 대조(大朝)에는 벼슬하지 않았다. 계사년에는 해주(海州)에 가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부솔(副率)이 되었다. 급환(急患)이 들어 하루만에 돌아가셨으니, 10월 13일이었다.
그해 11월에 양주(楊洲)의 금촌리(金村里) 묘좌(卯坐) 유향(酉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 후 12년이 지난 갑진년에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일등(一等)으로 추록(追錄)하고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추증되었다. 백씨는 천성이 선행을 함에 독실하여 다른 사람이 곤란한 것을 보면 도와주기를 생각하고 남의 과실을 보면 구차하게 미워하지는 않았다. 곤궁한 자를 걱정해서 구원하는데 가깝고 먼 차별이 없이 마음을 다하고 의리에 부족함이 없을 때는 오직 뜻대로 매진했다. 사수(辭受)할 때는 티끌만한 것이라고 반드시 삼가하고 여러 아우를 고인(古人)의 사업으로써 힘쓰게 하여 성취하도록 하였다. 세속에 밖으로 가식(假飾)을 해서 남의 이목만을 위하는 자를 보면 마치 자신이 더럽혀진 것처럼 여겼다.
부제(副提)인 허사익(許思益)의 따님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종(淙)이며 딸은 감찰(監察)인 권익(權瀷)에게 출가하였다. 종은 2녀를 두었고 딸과 사위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우계(牛溪) 선생은 일찍이 자주 칭찬을 하였는데 만사(輓詞)를 지어 무척 높이고 애석해했다. 【우계 선생은 일찍이 전란 후에 친구들의 존몰(存沒)을 기록했는데 박지보 또한 해주에서 병으로 죽었다고 하였다.】백씨께서 하루는 신경숙(申敬叔)이 중씨(仲氏)에게 온 것을 보고 중씨와 양(亮)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모(申某)는 신장은 보통이지만 그의 음성은 커서 종(鐘)이 울리는 것 같고 언론은 화락해도 정로(正路)가 있으며 행동은 모두 단아하여 후일에 반드시 국가의 기강이 될 것이다. 너희들은 삼가서 잃지 말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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