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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곽공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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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찬승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6-14 07:50 조회4,231회 댓글0건

본문


觀察使朴公神道碑銘



欽結髮游學長安中。所與交皆一時勝流。或以行或以才或以文。通籍見所長。爲名士大夫。而若論洪舂之器。渾成之德。澄之不淸。撓之不濁。衒飾者遇之失其能。談藝者遇之失其華。卽靡不歸讓於朴公說之。說之名東說。號南郭。其始自出新羅。羅王之裔散居羅州者爲潘南之朴。麗李右文館直提學尙衷。以直節著。入本朝左議政錦川府院君訔。以勳業聞。公八代祖也。曾祖曰兆年。吏曹正郞。贈左贊成。祖曰紹。司諫院司諫。贈領議政。嘗言金安老奸。不可復用。被擠遯于嶺南以卒。號冶川。考曰應福。大司憲。贈潘川府院君。妣曰林氏。善山望閥。別坐九齡之女。以嘉靖甲子生公。其稚也。嶷嶷超倫。五歲知讀書。外似朴訥。而中實聰穎。記誦捷敏。同塾者莫之先。諸父潘城,南逸兩公尤重公。期以遠大。惟恐早得名。稍長摛辭居業。文藻日進。辛巳。中漢城試。乙酉。中司馬。入大學。諸生嚮風景慕。不啻如鸞鳳之先覩。己丑。鄭賊汝立出於縉紳。波及者多。朝議日激。泮儒亦上章。人皆惴慄。及公赴疏。相與賀曰。可無憂矣。公果調適其際。得無他。甲午。㩴庭試狀元。授成均館典籍。俄拜司諫院正言。有一舊相在謫圖復用。其族兄長諫地。將追論鄭松江澈。以擯一時士流。爲舊相地。公陳其誣。與時左。遞爲兵曹佐郞。分司海州。扈中殿。乙未。還朝。丙申。拜禮曹正郞。以接伴使從事官。纔還。又以御史巡按北道。丁酉。由騎省出爲寧邊判官。數年中。不能一日安於朝。蓋爲醜正者所陰螫也。天兵再出。分民轉餉。計口迭休。未嘗愆期。民力不竭。井落晏如。戊戌。丁外艱。庚子服闋。拜侍講院司書。辛丑。拜弘文館修撰,校理。歷文學,持平。除吏曹佐郞。陞正郞。秋。以遠接使從事官往義州。以親癠遞。壬寅。拜檢詳,舍人。轉司成。相禮,通禮。未幾。加通政階。授黃州牧使。黃當西門孔道。稱岩邑。値大徭賦。較大小量近遠。立限制和。均若畫一。民戶不病。官用常饒。務爲經遠。不察察苛細。百爲俱擧。政淸訟息。故老傳誦。謂百年來無此良牧云。繡衣以異績聞。錫表裏嘉之。爪滿入爲禮曹參議,承政院同副承旨。序陞右副。對馬島倭以家康之說來求和。取二卒送之曰。此壬辰犯陵賊也。時權相當國。欲自爲功。將告廟獻俘。公上疏言狡賊變詐。如逮到京中。事無其實。則爲賊所瞞。貽譏後世。請斬之境上。逆折其奸。宣廟命諸宰雜議。唯鰲城李公議與公合。竟械來鞫之。無驗。人乃服公先見。天旱求言。公代撰極陳危亂之形。不避諱忌。權相惡之。其類有欲擊去公者。公不少撓。卒亦不敢加。冬。拜黃海道觀察使。攬轡視事。奬廉祛汚。一路肅然。還拜刑曹參議。戊申冬。拜忠州牧使。遭大夫人憂。制除。拜大司成。鄭仁弘方與奸臣李爾瞻同事。上章攻退溪先生不當從祀文廟。多士齊憤。削仁弘儒籍。其徒朴汝樑訐奏之。廢主震怒。欲覈其倡議者抵罪。諸生爭請囚。空館而去。公率僚屬。極言多士可以禮召。不可威治。廢主不從。公將再進封事。未上。遞拜禮曹參議。公不樂在朝。求爲羅州牧使。羅爲湖南一都會。稱難治。鄕之士大夫樹黨相傾。憾忿睚眦。輒成仇敵。積數十年。官不能制。公下車招長老諭之。先立表率。選邑中髦士。風礪作成。敎課無虛日。終公之世。齊瞯帖息。儒業大興。蔚有淹中稷下之聲。癸丑夏。爾瞻等謀廢母后起大獄。先朝耆舊。殆空於一網。公之弟錦溪公及欽被繫。俄連逮公下理。就供。猝中風舁出。自是坐廢者十年。天啓壬戌秋。竟不起。享年五十九。九月丙午。葬于楊州金村巳坐之原。以扈聖從勳贈嘉善大夫吏曹參判。公夫人申氏。高靈大姓。同知中樞府事撥之女。誠純貞靜。克內相。封貞夫人。擧三男二女。男長濠。南平縣監。初娶欽之女。有二男二女。後娶尹獻民女。次曰璜。司諫院正言。娶大司諫洪瑞鳳女。生四男。次曰渟。娶牧使宋馹女。有一女。女長尹順之司諫院獻納。次李行遠禮曹佐郞。有一女。南平之女曰李壽仁進士。男曰世模。餘皆幼。公貌不踰中人。而符彩凝遠。宇量恢弘。任眞坦率。不見畛域。而義氣激昂。確乎金石。沈默自持。不妄言笑。而心所契合。然諾無貳。孝友根於天稟而不假修爲。敦睦出於自然而人莫能及。善善長而惡惡短。飭己周而遇物恕。人所矜持力行而所未能者。公則日用而沛然有餘。世所智巧揣摩而自爲工者。公則糠秕而處之若浼。古所謂恬穆長德君子者非耶。公之家世。名德相承。冶川公直道勁節。輔以問學。而被宵人敲撼而終。而典刑所存。庭訓不替。公之諸父皆有篤行。及懿仁王后受命母臨。潘城有褒紀之封。群從子弟。簪紳舃赫。而公處其間。肫肫栗栗。居沖守澹。隨遇無攖。一門少長。咸以公爲標準。公不力於文而詞致素高。涉獵典墳。一下數行。自經史百家。以至皇明國朝典章故實。人物出處。無微不涉。而能折其衷。雖博士掌故莫及焉。其當製誥。華而能典。爲詩淸新有法。廢居松楸。鼇城李公亦屛迹東郊。嘗來往方羊。李公之竄也。公贈小絶曰。平生竹如意。相送子陵臺。蓋用謝翺送文山事也。措語悽激。人爭傳之。公之歿也。欽誄之矣。有曰。太樸之眞。混融敦厖。公稟其全。至和之精。粹夷宏厚。公得其沖。名不必隆。要之以實。行不必華。要之以惇。言不必給。要之以直。才不必捷。要之以重。衣錦而惡其文之著也。蘊素而懼其質之漓也。恂恂萬石之風。默默陽元之度。噫。言非夸也。豈無朝暮遇者。知公者莫如欽。銘公之神道。欽何敢不文。銘曰。
世嘗謂古今人不相及。如公者何遜於古賢。有友銘公。賁茲新阡。

관찰사 박공 신도비명(觀察使朴公神道碑銘)



흠이 상투를 올리고서 장안에 유학할 때 함께 사귄 이들은 다 당시의 명류로서 혹은 행실로 혹은 재주로 혹은 문장으로 벼슬길에 올라서 두각이 드러나 명사대부들이 되었으나, 이를테면 큰 사업을 이룰 기국과 천성적으로 얻은 덕을 지녀 걸러도 더 이상 맑아질 것이 없고 휘저어도 흐려지지 않음으로써 겉치레를 파는 자가 만났을 때 그 장기가 무색해지고 기예를 담론하는 자가 만났을 때 그 화사함이 무색해지는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는 모두 박공 열지(朴公說之)에게 사양하였다. 열지의 이름은 동열(東說)이고 호는 남곽(南郭)이다. 그 조상은 신라에서 나왔으며 신라 왕의 자손으로서 나주(羅州)에 흩어져 사는 이들이 반남 박씨(潘南朴氏)이다. 고려 말에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 상충(尙衷)은 곧은 절개로 세상에 드러났고, 본조에 들어와 좌의정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 은(訔)은 공업으로 이름이 났는데 공의 8대조이다. 증조 조년(兆年)은 이조 정랑에다 증 좌찬성이고 조부 소(紹)는 사간원 사간에다 증 영의정인데, 일찍 김안로(金安老)는 간사하므로 다시 서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가 조정에서 밀려나 영남에 은거하던 중 별세하였으며 호는 야천(冶川)이다.
선고 응복(應福)은 대사헌에다 증 반천부원군(潘川府院君)이고 선비 임씨(林氏)는 선산(善山) 명문으로 별좌(別坐) 구령(九齡)의 따님이다.
가정 갑자년에 공을 낳았는데, 어린아이 때 벌써 남달리 준수하여 다섯 살에 글을 읽을 줄 알았다. 겉은 질박하고 둔한 것처럼 보였으나 속은 총명하여 민첩하게 암기하였으므로 함께 공부하는 자들이 따라잡지 못하였으며, 제부(諸父) 반성군(潘城君 박응순(朴應順)의 봉호)과 남일(南逸 박응남(朴應男)의 호) 두 공이 매우 공을 중하게 여겨 원대한 장래를 기대하면서 오직 일찍 명성을 얻을까 염려하였다. 차츰 자라면서 글을 짓고 학업을 닦아 문장이 날로 진보하였다. 신사년에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하고 을유년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에 태학(太學)에 들어가자 제생이 온통 우러르고 사모하여 난새나 봉황을 바라보듯 하는 정도만이 아니었다. 기축년에 정적 여립(鄭賊汝立)이 사대부 사이에서 나옴으로써 그 여파를 받은 자가 많아 조정의 논의가 날로 격해지고 성균관 유생들도 소장을 올려 관련자의 처벌을 주장하자 사람들이 다 두려워 가슴을 조이고 있다가, 공이 급히 상소하니 서로들 경하하기를 “이제 걱정이 없겠다.” 하였는데, 공은 과연 그 사이에 잘 조정하여 별문제가 없게 되었다.
갑오년(1594, 선조27)에 정시(庭試)에 장원 급제하고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어느 한 구상(舊相)이 귀양가 있었는데 그를 다시 서용하기 위해 그의 족형이 사간원 장관으로 있으면서 장차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죄를 추론(追論)함으로써 일시의 사류를 몰아내고 구상의 입지를 좋게 만들어주려 하였다. 이에 공은 그것이 무고임을 전달하여 시배들과 서로 어긋나 병조 좌랑으로 체직되고 해주(海州) 분사(分司)에서 중전(中殿)을 호종하다가 을미년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병신년에 예조 정랑에 제수되고 접반사의 종사관으로 밖에서 돌아오자마자 또 어사가 되어 북도(北道)를 순찰하였으며, 정유년에는 병조에서 지방으로 나가 영변 판관(寧邊判官)이 되는 등 수년 동안 하루도 조정에 편히 있지 못하였으니, 이는 소인의 음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때 중국의 대군이 재차 나왔는데 백성을 갈라서 군량을 수송하고 사람 수를 헤아려 번갈아 쉬도록 함으로써 민력이 쇠진하지 않고 촌락이 평온하였다.
무술년에 부친상을 당하고 경자년에 상기를 마치고서 시강원 사서가 되었으며 신축년에 홍문관의 수찬ㆍ교리가 되고 문학ㆍ지평을 역임한 뒤에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가을에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의주에 갔다가 모친의 병환으로 인해 체직되었다. 임인년에 검상ㆍ사인이 되고 사성(司成)ㆍ상례(相禮)ㆍ통례(通禮)로 전임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통정에 가자되고 황주 목사(黃州牧使)에 제수되었다. 황주는 의주로 통하는 대로에 위치하여 사람이 살기가 험난한 고을로 이름이 난데다 대대적으로 부역을 치르는 때를 만났으나, 재력의 대소를 비교하고 거리의 원군을 헤아려 일정한 한계를 세우고 서로간의 조화를 맞춰 하나같이 균등하게 하였으므로, 민가는 병들지 않고 관가의 용도는 항상 넉넉하였다. 힘써 먼 장래를 위하고 법령이 지나치게 세밀하지 않았으므로 온갖 일이 다 성사되어 정사가 맑고 송사가 사라지니, 노인들이 하는 말이 “백년 이래로 이처럼 훌륭한 수령은 없었다.” 하였다. 어사가 특별한 치적이 있다는 것으로 계문하자 임금은 표리(表裏)를 주어 표창하였다.
임기가 차 조정으로 들어와 예조 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서열에 따라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 대마도의 왜노가 가강(家康)의 설에 따라 화친을 요구하고 두 병졸을 보내며 말하기를 “이들은 임진년에 능을 범했던 적이다.” 하였다. 이때 권상(權相 권세 있는 재상)이 국사를 마음대로 하면서 그 일을 자신의 공으로 삼기 위해 장차 종묘에 고하고 포로를 바치는 의식을 행하려 하자, 공은 상소하여 말하기를 “교활한 적들은 거짓이 많습니다. 만일 서울까지 잡아 왔다가 그것이 사실이 아닐 경우에는 적에게 기만을 당한 것이 되어 후세에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그들을 국경에서 목을 베어 정면으로 그 간교함을 꺾으소서.” 하였다. 선묘가 제재(諸宰)에게 각자 의논할 것을 명하였는데 오직 오성(鰲城) 이공의 헌의만이 공과 합치하였다. 결국 형틀에 묶어 잡아와 국문하여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비로소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가뭄이 들어 구언(求言)할 때 공이 누구를 대신하여 상소하면서 나라의 위태롭고 어지러운 상황을 깊이 개진하여 당시의 금기 사항을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권상이 미워하였고 그 동류 중에 공을 쳐서 제거하려 하는 자가 있었으나 공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자 마침내 감히 가해하지 못하였다. 겨울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정사를 처결하면서 청렴을 권장하고 혼탁한 풍조를 없애 온 도내가 엄숙해졌으며, 다시 돌아와 형조 참의가 되었다. 무신년 겨울에 충주 목사(忠州牧使)에 제수되었고 대부인(大夫人)의 상을 당했다. 상제를 마친 뒤에 대사성이 되었는데 이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간신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모사하여 소장을 울려 퇴계 선생을 문묘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고 공격하자, 유생들이 모두 분개하여 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그런데 그의 무리인 박여량(朴汝樑)이 그 사실을 들추어 아뢰자 폐주(廢主)가 진노하여 그 논의를 주도한 자를 조사해 죄를 주려고 하니, 제생이 앞을 다투어 옥에 갇히겠다고 청하고서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버렸다. 공은 요속을 인솔하여 유생들은 예로써 불러야지 위세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고 극구 말하였으나 폐주는 따르지 않았다. 공은 다시 봉사(封事)를 올리려고 하던 중 미처 올리기 전에 예조 참의로 체직되자, 조정에 있는 것이 싫어서 자청하여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나주는 호남의 제일가는 도회지로서 다스리기 어렵다고 소문이 난 곳인데, 고을의 사대부들이 각기 당을 세워 서로 배척함으로써 유감과 원한이 쌓여 원수간으로 변해 그대로 수십 년이 되었으나 관가에서 제어하지 못하였다. 공은 부임하자마자 그 고을의 장로(長老)를 불러다가 타이르고 우선 규율을 세운 뒤에 고을에서 준수한 선비를 뽑아 교화시키고 다듬어 인재를 만들고 글을 가르쳐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었으므로 공이 일생을 마칠 때까지 토호(土豪)가 잠잠하고 유업(儒業)이 크게 일어나 엄중(淹中)ㆍ직하(稷下)주D-001와 같은 칭송이 있었다.
계축년 여름 이첨 등이 모후(母后)를 폐위할 계획으로 큰 옥사를 일으켜 선조(先朝)의 노신들이 거의 일망타진되었고 공의 아우 금계공(錦溪公 박동량(朴東亮))과 흠(欽)도 체포되었으며, 얼마 후에 그 화가 공에게까지 파급되어 심리에 부쳐져서 공초에 응하였는데 갑자기 중풍이 나 들것에 실려 나왔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침체되어 있다가 천계(天啓) 임술년(1622, 광해군14) 가을에 끝내 일어나지 못했으니, 향년은 59세였다. 9월 병오일에 양주(楊州) 금촌(金村) 사좌(巳坐)의 자리에 장사지냈으며,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인해 가선대부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공의 부인 신씨(申氏)는 고령(高靈)의 대성(大姓)으로 동지중추부사 발(撥)의 따님인데, 진실하고 청순하며 조촐하고 안존하여 내조를 잘 하였다.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호(濠)는 남평 현감(南平縣監)으로 초취는 흠(欽)의 딸로서 2남 2녀를 두었고 후취는 윤헌민(尹獻民)의 딸이며, 그 다음 황(璜)은 사간원 정언으로 대사간 홍서봉(洪瑞鳳)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았고, 그 다음 정(渟)은 목사 송일(宋馹)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고, 장녀는 윤순지(尹順之)에게 시집갔는데 사간원 헌납이고, 차녀는 이행원(李行遠)에게 시집갔는데 예조 좌랑이며 1녀를 두었다. 남평 현감의 딸은 진사 이수인(李壽仁)에게 시집가고 아들은 세모(世模)이며 나머지는 다 어리다.
공은 겉모양은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풍채가 옹골차고 원대하며 도량이 크고 넓었다. 솔직하고 천진스러워 어떠한 범위나 한계가 보이지 않았으나 의기가 드높아서 금석처럼 확고하였고 침묵을 견지하여 함부로 담소하지 않았으나 마음이 서로 맞는 자에게는 한번 마음을 주면 변치 않았다.
부모 형제간에 효우(孝友)는 천성적으로 타고나 일부러 노력을 하지 않았고 친족간에 화목한 것은 자연적으로 우러나 그에 미칠 자가 없었다. 남의 선을 선으로 여기는 것은 잘 하고 남의 악을 미워하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으며 자기 자신을 경계하는 것은 치밀하고 남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남들은 마음을 갖고 애써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을 공은 일상적으로 생활화하여 여유만만하였고 세속에서 지혜를 짜 권모술수를 부려 스스로 재주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공은 비천하게 여겨 행여 때가 묻을 듯이 멀리하였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태평하고 온화하여 덕이 높은 군자가 아니겠는가.
공의 선대는 명망과 덕을 대대로 이어왔다. 야천공(冶川公 박소(朴紹)를 말함)은 바른 도와 굳은 절개에다 학문을 겸비하였는데 소인의 배척을 받아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으나, 그 법도가 남아 있고 가정 교훈이 폐해지지 않아 공의 제부(諸父)들이 다 독실한 행실이 있었다. 의인왕후(懿仁王后)가 하늘의 명을 받아 일국의 국모가 되자 반성(潘城 의인왕후의 부친 박응순(朴應順)의 봉호)이 부원군으로 봉해지고 여러 종자제(從子弟)가 영달하여 줄줄이 관직을 가졌는데, 공은 그 사이에 처하여 진실되고 삼가는 마음으로 담담하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냈으므로 한 집안의 노소가 다 공을 표준으로 삼았다.
공은 문장에 힘을 들이지 않았으나 논조가 본디 높았고 제반 전적을 섭렵하였는데 단번에 몇 줄씩 읽어 내려갔다. 경사 백가(經史百家)에서부터 명 나라와 국조(國朝)의 제도, 역사 사실이며 인물의 출처에 대해서까지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고 능히 그 시비를 판가름하였으므로 아무리 고사에 밝은 박사라도 미치지 못하였다. 어제(御製) 문자를 맡아 지을 때는 화려하면서도 전중하고 시를 지을 때는 맑고 산뜻하여 법도가 있었다. 물러나 고향에서 살 때에 오성(鰲城) 이공(李公)도 동교(東郊)에서 지내며 수시로 내왕하였다. 이공이 귀양갈 때 공은 절구 한 수를 지어 증정하기를 “평생에 지닌 죽여의로 자릉대에서 그댈 보내네[平生竹如意 相送子陵臺].”주D-002하였는데, 이는 사고(謝翶)가 문산(文山)을 보낸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서 구사한 말이 처절하고 감동겨워 사람들이 다투어 전송(傳誦)하였다.
공이 작고했을 때 흠이 제문을 지었는데 그 내용 속에 “참으로 질박한 것은 꾸밈없이 원만하고 성실한 법인데 공은 그 전부를 타고났고, 매우 화기로운 것은 순수하고 평탄하며 크고 너그러운 법인데 공은 그 진수를 지녔다. 이름은 높아지는 데에 관심이 없이 내실을 기하려 했고, 행실은 겉을 꾸미는 데에 관심이 없이 진실되게 하려 했고, 언어는 달변에 관심이 없이 바르게 하려 했고, 재주는 민첩한 것에 관심이 없이 신중히 하려 했으며, 속에 비단 옷을 입고서 행여 그 문채가 드러날까 꺼려하였고 청렴함을 간직하고서 행여 그 자질이 더러워질까 두려워하였다. 공순한 만석(萬石)의 풍치이고주D-003 침중한 양원(陽元)의 법도였다.”주D-004 하였다. 아, 이 말은 과장한 것이 아니니 어찌 후세에 진정으로 알아주는 자가 없겠는가. 공을 아는 사람이 흠만한 자가 없고 보면 공의 신도에 새길 글을 어찌 감히 짓지 않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고금 인물 다르다고 사람들이 말하지만 / 世嘗謂古今人不相及공 같은 이 그 어찌 고현보다 못할쏜가 / 如公者何遜於古賢공의 벗이 명을 지어 / 有友銘公이 신도를 빛낸다네 / 賁玆新阡


[주D-001]엄중(淹中)ㆍ직하(稷下) : 엄중은 춘추 시대 노(魯) 나라 도성으로 산동(山東) 곡부(曲阜)에 있던 마을 이름인데 공자의 고향이고, 직하는 제(齊) 나라 도성으로 임치(臨淄)의 직문(稷門)에 있던 지명인데 제 선왕(齊宣王) 때 추연(騶衍)ㆍ순우곤(淳于髠)ㆍ전변(田駢)ㆍ접여(接輿)ㆍ신도(愼到)ㆍ환연(環淵) 등 당시의 수많은 학사들이 모여 활동하였음. 문풍(文風)이 성행하는 지방을 말할 때 흔히 인용함. 《梁書 卷25 徐勉傳》에 “치상(淄上)과 엄중의 선비들이 줄을 이어 선배를 따르고, 책상자를 지고 분필을 지닌 선비들이 조석으로 모여든다.” 하였음.
[주D-002]이공이 …… 것 : 이항복이 폐모론(廢母論)을 극력 반대한 일로 광해군 10년(1618)에 북청(北靑)으로 귀양갈 때 박동열이, 목숨을 걸고 인륜을 부지하려는 이항복의 의기에 감동하여 송 나라 의사 사고가 금(金) 나라에 저항하다 순절한 충신 문천상(文天祥)을 애도한 일에 빗대어 이항복의 의기를 기렸음. 죽여의는 본디 중이 독경(讀經)이나 설법을 할 때 손에 가지는 대로 만든 긴 자루인데, 일반적으로 그 자루 끝을 사람 손가락처럼 깎아 만들어 등을 긁을 때 사용하였음. 사고의 자는 고우(皐羽)이고 호는 희발(晞髮)임. 문천상이 연평(延平)에서 관청을 열었을 때 향병(鄕兵) 수백 명을 인솔하고 문천상과 합류하여 자의참군(諮議參軍)이 되었으며, 나중에 문천상이 적에게 잡혀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혼자서 산천을 떠돌다가 절동(浙東)의 엄자릉(嚴子陵) 조대(釣臺)에서 문천상의 신주(神主)를 만들어 놓고 잔을 올리고 통곡한 다음 죽여의로 바위를 치면서 비장하게 초혼사(招魂詞)를 지어 불렀다고 함. 《宋元學案 卷56 龍川學案》
[주D-003]공순한 …… 풍치이고 : 만석은 한(漢) 나라 석분(石奮)을 말함. 문제(文帝) 때 건(建)ㆍ갑(甲)ㆍ를(乙)ㆍ경(慶) 등 네 아들과 함께 각기 연간 2천 석의 녹을 받는 고관이 되어 5부자의 녹이 만석에 달함으로써 부귀의 극치를 누렸으나 천성이 매우 공순하고 진실하여 교만한 빛이 전혀 없었다고 함. 《史記 卷103 萬石傳》
[주D-004]침중한 양원(陽元)의 법도였다 : 양원은 진 무제(晉武帝) 때 재상 위서(魏舒)의 자임. 천성이 침중하여 자신의 재주를 드러내지 않고 남의 단점을 잘 덮어줬으며 욕심이 없어 나라에서 받은 녹을 친족에게 모조리 나눠줬는가 하면 무슨 일을 할 때는 행동을 앞세우고 말을 나중에 하였으므로 벼슬을 그만둘 때에도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이 없었다고 함. 《晉書 卷41 魏舒傳》


종중을 빚낸 명조로 신도비 원문과 고전 번역원 원문을 올리니 수단 요원은 세적편 해석과 원문을 비교 해 보시기 바람 우리세대에 바로 잡아 야 하기때문임니다
원문 한자가 깨저 있는대로 대조 해보시기 바람
너무많이 틀린 부분이 많아 인쇄소에서 잘못한것같음                             영의정 상촌 휘신흠이 찬하심     인천서 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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