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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연암 서얼 소통을 청원하는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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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30 11:36 조회2,822회 댓글0건

본문

擬請疏通疏



云云天之降才。非爾殊也。故顚蘖騈枝。均霑雨露。朽株糞土。蒸出菌芝。聖人致治。士無貴賤。詩云文王壽考。遐不作人。是以王國克寧。駿聲不已。嗚呼。國朝廢錮庶孽三百餘年矣。爲大敝政無過於此。稽之往古而無其法。攷諸禮律而無所據。則此不過國初宵小之臣。乘機售憾。遽成大防。而後來當途之人。託論名高。襲謬成俗。年代浸遠。因循不革矣。由是而公朝專尙門閥。缺 遺才之歎。私家 缺 嚴 缺。爲斁倫之端。以之立後於支族。則率犯欺君之科。歸重於外黨。則反輕宗本之義。噫嘻等威 缺 殊。而無益於國軆。區限太刻。而少恩於家庭。夫自家之庶孽。則誠足卑矣。非可絀於擧世一門之名分。則固當嚴矣。非可論於 通朝耳。然而膠守名分之論。則枳塞轉深。諉以祖宗之制。則更張猝難。玩愒至今。因循而不革者何也。於古則無稽。於禮則無攷。而爲有國大痼深弊。則先正名臣深識治道者。莫不以此爲先恢張公理。必欲疏通。筵陳箚論。前後相望。列聖建中治軆。蕩蕩設官。須賢分職。惟能一軆均 缺。豈復差於 缺 哉。故未甞不臨朝博詢。䀌然矜惜。思所以通變疏滌之道。只緣士族權重。議論在下。淸途華貫。固所已有。則猶恐歧路多旁。權衡有分。同是世胄。銖秤縷度。一經政注。羞怒橫集。彈軋蜂起。况乃庶孽名膠跡泥。久屈於世。不肯等列。固其勢也。雖然。此實專門濟私之 缺。大非有國共公之通道也。臣請極言其失也。夫庶孽之與正嫡。誠有差等。而顧其家世。亦一士族。固何負於國家。而禁錮之廢絶之 缺。不得齒衿紳之列哉。孟子曰。無君子莫治野人。無野人莫養君子。夫君子野人。以位言也。缺 而明明揚側陋。帝堯之官人也。立 賢無方。成湯之求治也。繇是觀之。三代之時。已有君子小人之別。而擧人之際。固無間乎貴賤。不問其彙類。而况國朝所謂庶孽。世有簪纓。門閥燀赫。則寧可以母族之卑微。混蔑其本宗之華顯也哉。晉唐以來。漸尙閥閱。然而江左衣冠。不擯陶侃王謝。貴族亦齒周顗蘇 。乃蘇瓌之 缺 產。而位至平章。李愬乃李晟之孽子。而官至太尉。韓琦范仲淹。爲宋賢相。胡寅陳瓘鄒浩。爲世名儒。當世不以庶孽錮禁者何也。誠以論人門閥者。只重其父世。不問其母族。其不重母族者何也。重本宗也。夫然則母族雖顯。父世甚微。則其不可以華閥著稱。亦且明矣。勝國之時。鄭文培爲禮部尙書。李世璜爲閤門祇侯。權仲和以大司憲。亦入我朝爲都評議使。若以我朝之法律之。則陶周之賢。將不廁衣冠。蘇李之才。將不得將相。韓琦范仲淹胡寅陳鄒之徒。擧將抑塞禁廢。文而芸舘。蔭而典獄。位不離流品。祿不過升斗。而功業志節。將不得赫然當世。 流光於百代耶。此臣所謂稽之往古而無其法者也。經曰。庶子不得爲長子三年。鄭玄註曰。庶子者。爲父後者之弟也。言庶者。遠別之也。夫庶子雖與 缺。而其截然別而遠之者。如此其嚴。至於妾子之賤。爲尤卑於庶子。而更無所區別於庶子何也。禮所以序也。故宗無二本。殺無再降也。記曰。父母有若庶子庶孫甚愛之。沒身敬之不衰。陳澔註曰。賤者之所生也。夫父母之所愛。雖妾之子猶尙引而重之。不敢疏略而外之者。亦所以重本而尊宗也。會典曰。凡襲職替職。無適子孫。則庶長子襲替。庶長子。妾子之謂也。夫禮所以別嫌疑也。故正名而定分。則雖同母之適弟。尙且別而遠之也。夫禮所以厚也。故重其本支。則雖妾之賤子。尙且引而內之也。律之所以襲替父職。不以適庶爲拘者。良以此也。周官周公之定官制也。漢之百官表所以分庶品也。禁錮庶孽之文。不少槪見焉。此臣所謂攷諸禮律而無所據者也。臣甞聞之古傳。錮廢庶 孽。葢亦有由 缺。相鄭道傳庶孽子也。右代言徐選爲道傳寵奴所辱。思所以報仇者。及道傳敗。選乃傅會名分之論。逞快一辱於旣死之後。非爲其言之必立。其法之必行也。方是時。道傳以罪新誅。所以其言易售而其法易成也。贊成姜希孟安瑋等。草創大典。文理未遑。庶孽停科錮仕之論。條列撰入。及戊午之禍。士流積怨於子光。無所發憤。禁錮庶孽之論。益嚴且深。其所洩怒。誠亦悲矣。雖然。自古亂賊。豈專出於子光者流哉。不幸一出於庶孽之中。而因一子光盡塞庶孽。則若不幸而接跡於士族。亦將何法而處之耶。嗚呼。儒宗文師。磊落相望。一轉而局於名分之論。再轉而屈於門地之尙。宋翼弼,李仲虎,金謹恭之道學。朴枝華,李大純,曺伸之行誼。魚無迹,魚叔權,楊士彥,李達,辛喜季,梁大樸,朴淲之文章。柳祖認,崔命龍,柳時蕃之才諝。上可以黼黻大猷。下可以標準一世。而卒老死於蓬蓽之下。時有間沾微祿者。碌碌栖息於冗仕 末品之中。雖其守分行素。佚厄而不愍。聖王之所以設官分職待賢守能之意。果安在也。至若李山謙,洪季男奮義糾旅。摧破倭賊。權井吉沫血誓衆。入援南漢。其忠膽義肝。猶能自振於衆棄之中。如彼其卓卓也。然而時平世恬。則朝廷之上。漠然相忘。曾不識其何狀。此古人所謂所用非所養也。臣甞慨然於此也。以近事觀之。洪霖一孱孽。白頭閫幕。凄凉口腹之計。而猝然殉難。凜然有烈士之風。朝廷不惜褒贈之典。雖加以非常之職。與其生爲百夫之長。屹然臨城。則其固圉捍患。豈特幕府之一死也哉。噫。禁錮之不足而棄絶之。使其固有之倫常。不得自列於平人。則恩莫重於父子。而不敢稱父。義莫大於君臣。而不得近君。老者坐末。而庠塾無長幼之序。耻與爲類。而鄕黨無朋友之道。孔子曰。必也正名乎。子而父。父父而子子。兄兄而弟弟。此所以正其名也。故人倫之尊稱。莫加於父兄。而今之庶孽則不然。子弟之於父兄。猶不敢 斥然正而呼之。自同奴僕之於其主。所謂名分者。適庶之謂也。豈爲其稱謂之間。不得曰父曰兄。下同於奴僕之賤。然後迺謂之嚴名分而別適庶也哉。今之庶孽。郞署猶不得爲。侍從安敢望乎。雖有願忠之心。補袞非職。雖抱經綸之才。展布無地。引儀臚傳。暫序朝班。而卒同輿儓。該署輪對。或襯耿光。而不免疎逖。進不敢爲大夫之事。退不忍爲齊民之業。所謂國之孤臣。家之孽子。疹疾而心危者也。禮曰。入學以齒。以齒者。尙年也。傳曰。燕毛。所以序齒也。毛者。髮之黑白也。今之庶孽入太學。則不得序齒。黃髮鮐背者居下。勝冠者反坐上座。夫太學所以明人倫也。故自天子之元子衆子。以至諸侯之世子。尙得齒學。所以示悌於天下也。天子視學於辟雍。有乞言饗食之禮。所以廣孝於天下也。由是觀之。庶孽之不得序齒於太學。非先王廣孝悌之道也。傳曰。以文會友。以友輔仁。孟子曰。友也者。友其德也。故不挾長。不挾貴。不挾兄弟而友。 貴賤雖殊。有德則可師也。年齒不齊。輔仁則可友也。况乃庶孽。固皆士族之子弟耳。其無才美賢能則已。若其諒直多聞。才德賢我。則顧安可以庶孽恥之哉。然而庶孽之於士族。相交而不得友。相親而不得齒。無忠告責善之道。絶琢磨切偲之義。言辭之間。禮數太苛。揖讓之際。謗讟橫生。由是論之。倫常之中。不絶而僅存者。惟夫婦一事耳。嗚乎。才賢遺而莫之恤。倫常斁而莫之救。曰庶孽無才賢。亦曰如此而後名分正。是豈理也哉。夫無子而立後者。所以繼祖而傳重也。昔石駘仲無適子有庶子六人。卜所以爲後者。祁子兆是擇賢也。唐律諸立嫡違法者。徒一年。議者曰。適妻之長子爲適子。婦人年五十以上。不復乳育。則許立庶子爲適。不立長者律亦如之。是防亂本也。大明律凡立適子違法者杖。適妻年五十以上無子者。得立庶長子。不立長者同罪。經國大典適妾俱無子。然後取同宗之支子而爲後。於是焉官斜私契。明證攷據。然 後廼得告君。重造命也。世之士夫熟習見聞。率蹈謬規。正適無男。則雖多衆妾之子。反爲門戶之私計。割情忍愛。杜撰告君之文。取嗣支族。不擇遠近。噫。父傳子繼。血脉相承。祖祀孫將。氣類以感。今也徒拘適庶之分。或有遠取乎族。系旣踈之後。以奉其先靈。此正古人所謂所不知何人耳。挾甒灌鬯。夫何怳惚之有乎。焄蒿凄愴。夫何精氣之交乎。詩云。明發不寐。有懷二人。二人者。父母之謂也。故曰。致愛則存。致愨則著。君子之祭也。然而舍其親而求諸踈。以祭其先人。夫何僾然著存之有乎。逆天理畔人情。以禮則遠祖。以法則罔君。臣甞痛恨於此也。夫名分之論勝。而習俗難變。門庭之內。區限之法。殆同外人。甚者至於父兄。而奴虜其子弟。宗族恥於爲類。或有黜於族派之譜者。或有別其排行之名者。此但歸重於外黨。而不知反輕乎本宗。則此於倫常。不其太刻而少恩乎。先正臣趙光祖建白于朝曰。本朝人物。少於中國。而又有分別適 庶之法。夫人臣願忠之心。豈有間於適庶。而用舍偏隘。臣竊痛惜。請於庶孽中擇才而用之。貴顯之後。或有亂分之罪。嚴立科律。及宣廟時申濆等一千六百人。上章籲寃。上下敎曰。葵藿向陽。不擇旁枝。人臣願忠。豈必正適。於是先正臣李珥首建通用之議。始得赴擧。先正臣成渾,先正臣趙憲。連上封事。各請其通融淸要。仁廟時故相臣崔鳴吉爲副提學。與舘僚沈之源,金南重,李省身應旨聯章。請通用庶孽。其言甚切。故相臣張維亦上䟽啓論。上下其議。於是故相臣金尙容爲吏曹判書回啓曰。天之生才。無間適庶。而禁錮之法。所未有於古今也。玉堂箚陳。可見公議。欲爲痛革宿弊。應旨切言。請議大臣定奪。事下備局。故相臣李元翼,尹昉等議曰。卑薄庶孽。天下萬古所無之法。儒臣箚陳大有所見。故相臣吳允謙議曰。禁錮庶孽。古今天下所未有之法。朝廷用賢收才而已矣。貴顯之後。名分紊亂。則邦憲固嚴。非可慮也。戶 曹判書沈悅,順興君金慶徵,工曹判書鄭岦,判决事沈諿,同知鄭斗源,護軍權帖立異。都承旨鄭蘊陳䟽立異。先正臣宋時烈甞擬䟽引鄭道傳。猶爲大提學。葢防限之法。出於中世。請一切䟽通。䟽未果上。而載尤菴集中。且先正臣朴世采啓曰。庶孽之中。雖有奇才異等。無以進用。請大加通變。願上勿滯於流俗。勿拘於常規。自見必然之理。斷而行之。故知事臣金壽弘䟽請通用。事竟不行。故判書臣李袤爲大司憲。上䟽通用庶孽。都承旨臣金徽郤之䟽未上。其後故相臣崔錫鼎爲吏曹判書上䟽。請通用庶孽。然議久不行者。何也。噫。專門濟私之計。深則膠守名分之論。通塞與奪之權。重則反諉祖宗之法。忍情棄恩而蔑重本。舍親取䟽而故欺君。襲謬成俗。而不知斁倫。銖稱縷度而莫恤遺才。名分之說。臣已辨之悉矣。請於更張舊制之論。復得而極言之。夫法久則弊。事窮則通。故時當遵守而遵守者。廼繼述也。時當通變而通變者。亦 繼述也。固執更張。惟其時宜。則其義一也。詩云。天生烝民。莫非爾極。書曰。惟精惟一。允執厥中。夫極者。理之盡也。中者。義之當也。洪範曰。無偏無陂。王道平平。此之謂也。况且禁錮之法。稽之往古而無其法。攷諸禮律而無所據。初出於一人之售憾。而本非開國之定制。百年之後。宣廟始許赴擧。及仁祖。又許三曹。由是觀之。列朝更張變通之聖意。斷可知矣。嗟乎。生爲庶孽。爲世大僇。禁錮顯要。而踈逖於朝廷。遷就名謂。而迫隘於家庭。長幼亂於庠塾。朋友絶於鄕黨。踪跡臲卼。身世踽凉。如負大何。則人賤之。窮無所歸。靡所措躬。或遯跡而自靖。離群而尙志。則謂之驕傲。或脅肩而取憐。屈膝而苟容。則謂之鄙佞。噫。非天之降才爾殊也。此特培養殊方。趨向異路耳。孟子曰。苟得其養。無物不長。苟失其養。無物不消。特不培養而作成之庸。何責乎無人於其間哉。或承嫡傳而不刊庶名。雖遠年代而永爲賤屬。實同奴婢之律。支屬繁 衍幾至半國。而旣無歸宿。又無恒產。黃馘枯項。苶然罷弊。貧窮到骨。莫能振刷。嗚呼。昔之伊尹一夫不得其所。若己推而納之溝中。今之庶孽失所顚連者。豈獨一夫而已哉。抑塞旣久。寃鬱彌亘。干和召沴。未必非此爲致之也。恭惟我殿下軆天莅物。聖功巍煥。率域含生。莫不得所。各得樂其生而安其業。振淹起廢。克恢蕩平之政。刮垢掩瑕。率囿陶匀之化。宿弊闕典。靡不釐擧。而獨於通融庶孽之法。未有著政。噫。今臣此言。非臣愚一人之私言。迺一國有識之公言。非一國今日之公言。迺列朝以來先正名臣之所眷眷者也。其立異者。臣旣歷數而陳之。葢其術識粗淺。規模隘塞。膠乎見聞。徒循流俗。其所執言者。不過嚴名分難更張而已。當今之世。主張偏私。好生厓異者。未必無此等。而皆引名臣鄭蘊之一䟽。以爲口實。夫蘊之精忠大節。可與日月爭光。則臣未敢知此䟽卽何所激。而葢其旨義。亦不過名分國制兩事而已。噫。遐方之 人不知來歷。而猶能文通兩司。武歷閫帥。不問其世閥。無所拘礙。而今此庶孽。近則迺祖迺父。俱是公卿大夫。遠則名儒賢輔。爲厥祖先。比諸遐方之人。來歷甚明。而禁廢之法。甚於釁累。等殺之分。嚴於僕隷。豈不寃哉。臣非以爲目今庶孽之中有某賢可用某材可拔。而但朝廷一視之恩。與天同德。大造之化。與物無間。洗濯磨礪。復叙旣斁之倫彛。作成培養。復收久遺之才賢。使立後之法無違大典。宗本之義。悉返古禮。家庭之內。正父子之名。庠塾之間。叙長幼之齒。復得爲人於三百年積廢之後。則人人咸思自新。飭厲名行。願忠圖報。爭死國家之不暇矣。今日王政之大者。無過於此大聖人壽考作人之功云云。



삼가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하늘이 인재를 내린 것이 그토록 다르지 않사옵니다. 그러므로 전얼(顚蘖)과 변지(騈枝)도 고루고루 비와 이슬에 젖고, 썩은 그루터기 나무나 더러운 두엄에서도 영지(靈芝)가 많이 나며, 성인(聖人)이 태평의 치세로 이끄실 적에는 귀하고 천한 선비가 따로 없었습니다. 《시경》에

“문왕(文王)이 장수를 누리셨으니 어찌 인재를 육성하지 않았으리오.〔文王壽考 遐不作人〕”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왕국이 안정되었으며, 크나큰 명성이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아, 우리 왕조가 서얼의 벼슬길을 막은 지 300여 년이 되었으니, 폐단이 큰 정책으로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옛날을 상고해도 그러한 법이 없고, 예법과 형률을 살펴봐도 근거가 없습니다. 이는 건국 초기에 간사한 신하들이 기회를 틈타 감정을 푼 것이 대번에 중대한 제한 규정으로 되어 버렸으며, 후대에 요직에 있던 인사들이 공론을 핑계 대어 주장함으로써 명성이 높아지자 오류를 답습하여 하나의 습속을 이루었고, 세대가 차츰차츰 멀어지면서 구습을 따르고 개혁을 하지 못했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에서는 오로지 문벌만을 숭상하여 인재를 초야에 버려둔다는 탄식을 초래하였으며, 사가(私家)에서는 한갓 명분만을 엄히 하여 마침내 인륜을 무너뜨리는 단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지족(支族 먼 조상 때 갈라진 일족)에게서 양자를 입양하니 대개 임금을 속이는 죄를 범하는 것이요, 모계를 더 중시하는 셈이니 도리어 본종(本宗)을 높이는 도리를 경시하는 것입니다.
아아, 적자와 서자 사이에 비록 차등이 있다 해도 나라의 체통에는 이로울 것이 없으며, 구분과 한계가 너무 각박하여 가족간에 애정이 적어지는 것입니다. 무릇 자기 집안의 서얼이야 비천하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온 세상에서 배척받을 이유는 없으며, 한 문중의 명분은 의당 엄히 해야겠지만 온 조정에서까지 논할 바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명분의 논의를 고수하다 보니 벼슬길을 막는 관례는 더욱 심해지고, 조종(祖宗)의 제도라 핑계 대다 보니 갑자기 혁신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까지 안일하게 세월만 보내면서 개혁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옛날에도 상고할 데가 없고 예법에도 근거가 없는데도,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고질이요 깊은 폐단이 되고 있기에, 정치하는 올바른 방법을 깊이 아는 선정(先正 선대의 유현(儒賢))과 명신(名臣)들은 모두 이를 급선무로 여기고, 공정한 도리를 확대하여 반드시 벼슬길을 터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경연(經筵)에서 아뢰고 차자(箚子)로써 논한 분들이 끊이지 않고 나왔던 것입니다.
역대 임금들께서는 공정한 원칙을 세워 통치의 법도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으며, 벼슬자리에는 어진 사람만 임명하고 직무를 나누어 맡기는 데는 능력만을 고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두를 공정하게 대하였으니, 어찌 또 모계의 귀천(貴賤)을 가지고 차별을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조정에 임하여 널리 묻고, 그 처지를 애통해하며 불쌍히 여겨, 변통하여 벼슬길을 열어줄 방도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세족(世族 대대로 벼슬을 한 집안)의 권세가 막중하고 언론을 아래에서 좌우하는 까닭에, 명예로운 벼슬과 화려한 경력을 본래부터 자기네가 차지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여러 갈래로 갈림길이 생기고 권한이 쪼개질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똑같은 세족의 자손이라도 정밀한 저울로 눈금을 재듯이 따지니 정주(政注)를 한 번 거치고 나면 수치와 분노가 마구 몰려들고 지탄과 알력이 벌떼처럼 일어나는데, 하물며 서얼은 명분이 굳어지고 행동에 구애를 받아 세상에서 천대받은 지 오래이니, 대등하게 인정해 주려 하지 않는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진실로 제 가문만을 오로지 위하고 사욕을 달성하려는 편파적인 의도이지, 공공을 위하는 통치의 보편적 도리는 결코 아닙니다. 신(臣)이 그 잘못됨을 남김없이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무릇 서얼과 적자(嫡子)는 진실로 차등이 있지만, 그 가문을 따져 보면 그들 역시 선비 집안입니다. 저들이 진실로 국가에 대하여 무슨 잘못이 있다고, 벼슬길을 막고 폐기하여 저들로 하여금 벼슬아치의 대열에 끼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군자가 없으면 야인(野人)을 다스릴 수 없고, 야인이 없으면 군자를 먹여살릴 수 없다.”
하였으니, 대범 군자와 야인은 지위를 들어 말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명덕(明德)을 지녔으면서도 비천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천거하라고 한 것〔明明揚側陋〕’은 요(堯) 임금이 관리를 임용한 준칙이요, ‘어진 이를 기용하는 데 출신을 따지지 않은 것〔立賢無方〕’은 탕(湯) 임금이 정치적 안정을 구한 방도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하(夏) · 은(殷) · 주(周) 삼대(三代)의 시대에도 이미 군자와 소인의 구별이 있었지만, 인재를 천거할 때에는 본시 귀천의 차별을 두지 않았고 어떤 부류인지도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왕조의 이른바 서얼은 대대로 벼슬이 끊어지지 않은 혁혁한 문벌인데, 어찌 모계가 비천하다 하여 고귀한 본종(本宗)을 싸잡아 무시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진(晉) 나라와 당(唐) 나라 이래로 차츰 벌열을 숭상하였으나, 그런데도 강좌(江左)의 사대부들은 도간(陶侃)을 배척하지 않았고 왕씨(王氏)와 사씨(謝氏) 같은 명문 귀족들도 주의(周顗)를 동류로 끼워 주었으며, 소정(蘇頲)은 바로 소괴(蘇瓌)의 얼자(孼子)이지만 지위는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이소(李愬)는 바로 이성(李晟)의 얼자로되 벼슬이 태위(太尉)에 이르렀으며,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은 송 나라의 어진 정승이 되었고, 호인(胡寅) · 진관(陳瓘) · 추호(鄒浩)는 당세의 이름난 유학자가 되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서얼이라 하여 벼슬길을 막지 않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진실로 남의 문벌을 따질 적에는 단지 그 부계만을 중시하고 그 모계는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계를 중시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본종을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계가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부계가 몹시 변변찮을 경우, 현달한 문벌이라고 칭송이 자자할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고려 시대로 말하더라도 정문배(鄭文培)는 예부 상서(禮部尙書)가 되었고, 이세황(李世璜)은 합문지후(閤門祗侯)가 되었고, 권중화(權仲和)는 대사헌(大司憲)으로서 우리 왕조에 들어와서도 도평의사(都評議使)가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 왕조의 법으로 따진다면 도간이나 주의 같은 어진 이도 장차 사대부에 끼지 못하고, 소정이나 이소 같은 인재로도 장차 장수와 정승이 될 수 없고, 한기 · 범중엄 · 호인 · 진관 · 추호 같은 사람들도 모두 장차 억눌리고 버림받아, 기껏해야 문관으로는 교서관(校書館), 음직(蔭職)으로는 전옥서(典獄署)에나 자리를 얻어, 지위는 유품(流品 하급 관직)을 벗어나지 못하고 녹봉은 승두(升斗 소량의 쌀)에 지나지 않을 터이니, 공훈과 업적, 지조와 절개가 장차 당세에 혁혁히 드러나고 먼 후세까지 아름다운 명성을 남길 수가 없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신이 말씀드린 ‘옛날을 상고해도 그러한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서(經書)에 이르기를,

“서자는 장자(長子)의 상(喪)에 3년의 복(服)을 입을 수 없다.”
하였고, 정현(鄭玄)의 주(註)에 이르기를,

“서자란 아비의 뒤를 잇는 자의 동생이다. 서(庶)라 말한 것은 구별하여 거리를 두자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무릇 서자는 비록 적자와 어머니가 같더라도 끊은 듯이 구별하여 거리를 두는 것이 이와 같이 엄했는데, 천한 첩자(妾子)의 경우는 서자보다 더욱 신분이 낮으나 다시 서자와 구별함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예(禮)란 차례를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통(宗統)은 근본을 둘로 나누지 아니하고 차등은 거듭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부모에게 비자(婢子) 및 서자와 서손(庶孫)이 있어 이들을 몹시 사랑했다면, 비록 부모가 돌아가셨을지라도 종신토록 이들을 공경하여 변함이 없어야 한다.”
하였고, 진호(陳澔)의 주에는,

“비자(婢子)는 천한 자의 소생이다.”
하였습니다. 무릇 부모가 사랑했던 이라면 첩의 자식이라도 오히려 끌어들여 중히 여기고, 감히 소홀히 하거나 도외시하지 못했던 것은 또한 근본을 중히 여기고 종통을 높이는 까닭이었습니다. 《회전(會典)》에 이르기를,

“무릇 직책을 세습하여 대체함에 있어 적자(嫡子)나 적손(嫡孫)이 없을 경우에는 서장자(庶長子)가 직책을 세습하여 대체한다.”
하였으니, 서장자란 첩자(妾子)를 이른 것입니다.
무릇 예란 헷갈려서 의혹스러운 경우를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칭을 바로잡고 신분을 정하는 것이니, 비록 어머니가 같은 적제(嫡弟)라도 오히려 구별하여 거리를 두었던 것입니다. 무릇 예란 남을 후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지(本支)를 중히 여기는 것이니, 천첩의 자식이라도 오히려 끌어안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회전》에서 아비의 직책을 세습하여 대체하는 데 적서(嫡庶)로써 구애를 삼지 않은 까닭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주관(周官 주례(周禮))》은 주공(周公)이 정한 관직 제도를 기록한 책이며, 《한서(漢書)》의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는 모든 관직을 구분해 놓은 것인데, 서얼의 벼슬길을 막는 문구는 대충 보아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말씀드린, ‘예법과 형률을 살펴봐도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듣자온대 예로부터 전해지기를, 서얼의 벼슬길을 막은 데는 대개 유래가 있다고 합니다. 건국 초기의 죄상(罪相) 정도전(鄭道傳)은 서얼의 자손인데,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이 정도전이 총애하던 종에게 욕을 본 일이 있어 그 원수를 갚을 길만 생각하고 있다가, 정도전이 패망하게 되자 서선이 마침내 명분의 논의를 견강부회하여 죽은 뒤에나마 한 번 욕을 본 데 대한 감정풀이를 한 것이었으나, 제 말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그 법이 반드시 행해지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야흐로 이때 정도전이 죄를 지어 막 처형당한 때다 보니, 그 말이 먹혀들기 쉬웠고 그 법이 성립되기 쉬웠던 것입니다. 찬성(贊成) 강희맹(姜希孟), 안위(安瑋) 등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처음 만들면서 조문을 미처 다듬을 겨를이 없어, 서얼에 대한 과거 금지와 관직 진출 금지의 주장이 조문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무오사화(戊午士禍)가 발생하면서 유자광(柳子光)에 대한 사림파(士林派)의 원망이 잔뜩 쌓였는데, 분풀이할 곳이 없자 서얼의 벼슬길을 막아야 한다는 논의가 더욱 엄중하고 심각해진 것이니, 그들로 하여금 분풀이하게 만든 상황이 참으로 또한 슬프다 하겠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자고로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찌 유자광 같은 무리에게서만 나왔겠습니까. 불행히도 한 번 서얼 가운데서 나온 것인데, 유자광 하나로 인해 서얼의 벼슬길을 모조리 막아 버리고 말았으니, 만약에 불행하게도 양반 자손 중에서 난신적자가 뒤이어 나왔을 경우 또 장차 무슨 법으로 처리하시겠습니까?
아아, 유학과 문장으로 추앙받을 만하고 사표(師表)가 될 만한 인물들이 계속 배출되었는데도, 한 번 전락(轉落)하여 명분의 논의에 제한을 받더니, 거듭 전락하여 문벌 숭상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송익필(宋翼弼) · 이중호(李仲虎) · 김근공(金謹恭)의 도학(道學)과, 박지화(朴枝華) · 이대순(李大純) · 조신(曺伸)의 행의(行誼 덕행)와 어무적(魚無迹) · 어숙권(魚叔權) · 양사언(楊士彦) · 이달(李達) · 신희계(辛喜季) · 양대박(梁大樸) · 박호(朴淲)의 문장과, 유조인(柳祖認) · 최명룡(崔命龍) · 유시번(柳時蕃)의 재주는 위로 임금의 정책을 보필할 수 있고 아래로 한 시대의 표준이 될 만한데도 끝내 오두막집에서 늙어 죽었으며, 때로는 간혹 하찮은 녹을 받은 사람도 있었으나 보잘것없이 미관말직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비록 분수를 지키고 처지대로 살면서 액운을 편히 여기며 근심하지 않더라도 성왕(聖王)이 관직을 마련하고 직책을 나누어 어진 이를 예우하고 능력 있는 이를 임용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겠습니까?
이산겸(李山謙), 홍계남(洪季男) 같은 경우는 충의로 떨치고 일어나 의병을 규합하여 왜적을 쳐부쉈으며, 권정길(權井吉)은 피를 토하며 군사들에게 훈시하고 남한산성에 지원하러 들어갔으니, 그들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뜻은 오히려 뭇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가운데에서도 스스로 떨치고 일어섬이 저렇듯 우뚝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시대가 평화롭고 세상이 편안해지고 나자 조정에서는 까마득히 잊어 그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옛사람의 이른바 “쓸모 있는 자들은 녹을 주어 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은 일찍이 이에 대하여 개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근래의 일로 보더라도, 홍림(洪霖)은 일개 잔약한 서얼로서 늘그막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막료(幕僚)가 되어 처량하게도 호구지책을 삼았는데, 갑자기 국난에 목숨을 바쳐 늠름히 열사(烈士)의 기풍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표창과 증직의 은전을 아끼지 않아 비록 비상한 관직을 추증(追贈)하기는 했으나, 그것보다는 그가 살아서 백부(百夫)의 장(長)이 되어 우뚝이 성에 임했더라면, 변방을 굳건히 하고 환란을 막아냄이 어찌 막부(幕府)에서 한 번 죽는 것뿐이었겠습니까.
아아, 벼슬길을 막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배척하고 관계를 끊어 버려, 본디 가지고 있는 윤상(倫常 오륜)을 스스로 일반인들 앞에 내세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은애(恩愛)는 부자 사이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의리는 군신 관계보다 큰 것이 없는데 임금에게 가까이 할 길이 없으며, 늙은이가 말석에 앉게 되어 학교에는 장유(長幼)의 차서가 없게 되고, 더불어 동류가 되기를 부끄러워하는 바람에 향당(鄕黨)에서는 붕우(朋友)의 도의가 없어졌습니다.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을 것인저!”
하였으니, 아들은 아비를 아비로 대하고, 아비는 아들을 아들로 대하며, 형은 형 노릇 하고 아우는 아우 노릇 하는 것이 바로 명분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륜상의 존칭으로는 부형(父兄)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지금의 서얼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들이 아비를, 아우가 형을 오히려 감히 직접 가리켜 제대로 부르지 못하니, 저절로 종이 그 상전을 대하는 것과 같아졌습니다. 이른바 명분이란 적(嫡)과 서(庶)를 이름인데, 어찌 서로 부르는 때에 아비라거나 형이라 하지 못하고, 자신을 낮추어 천한 노복들과 같이 해야만 ‘명분을 엄히 하고 적서를 구분한다’ 하겠습니까.
지금의 서얼들은 낭관(郞官)도 오히려 하지 못하는 처지인데 시종신(侍從臣)을 어찌 감히 바라겠습니까. 아무리 충성을 바칠 마음을 지녔을지라도 임금을 보필하는 직책은 맡을 수 없고, 아무리 국가를 경영할 재주를 품었을지라도 포부를 펼 곳이 없습니다. 인의(引儀)로서 여창(臚唱)할 때에는 잠깐 조신(朝臣)의 대열에 순서대로 서지만 끝내 노복이나 다름 없으며, 해당 관서의 윤대(輪對)를 통해서 간혹 임금을 가까이에서 뵙기도 하지만 서먹서먹함을 면치 못합니다. 그리하여 관직에 나아가도 감히 대부(大夫)가 하는 일은 하지 못하고, 물러나면 차마 평민들의 생업에 종사할 수도 없으니, 이른바 나라의 고신(孤臣)이요 집안의 얼자로 마음에 병이 들어 마음가짐이 늘 조심스러운 자들입니다.
《예기》에 이르기를,

“태학(太學)에 들어가면 치(齒) 순서로써 한다.”
하였으니, ‘치 순서로써 한다’는 것은 나이를 중시한다는 것이고, 전(傳)에 이르기를,

“잔치 자리에서 모(毛)로써 구별하는 것은 연치(年齒)의 순서를 정하자는 것이다.”
하였으니, ‘모(毛)’란 머리털의 흑백을 말한 것입니다. 지금의 서얼들은 태학(太學 성균관)에 들어갈 경우 나이 대접을 받지 못하여, 황발(黃髮)과 태배(鮐背)의 노인이 아래에 앉고, 겨우 관례를 마친 자들이 도리어 윗자리에 앉습니다. 무릇 태학은 인륜을 밝히자고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자의 원자(元子 맏아들)와 중자(衆子 나머지 아들들)로부터 제후의 세자(世子)까지도 오히려 태학에서 나이 순서를 지키는 것은 천하에 공손함을 보이기 위함이며, 천자가 태학을 순시할 적에 조언을 구하고 음식을 대접하는 예의가 있었으니 이는 효도를 천하에 넓히기 위함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서얼들이 태학에서 나이에 따른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옛날 어진 임금의 효제(孝悌)를 넓히는 도리가 아닙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仁)을 돕는다.”
하였고, 맹자는 말하기를,

“벗이란 그의 덕을 벗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이 많다고 으스대지 않고 신분이 높다고 으스대지 않고 형제를 믿고 으스대지 않고서 벗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귀천이 비록 다를망정 덕이 있으면 스승이 될 수 있고 나이가 같지 않더라도 인(仁)을 도울 경우에는 벗이 될 수 있다는 말인데, 더구나 서얼은 본디 모두 양반의 자제들입니다. 그들이 아름다운 재주나 현명함과 능력이 없다면 그만이겠으나, 만일 그들이 진실하고 곧고 들은 것이 많아 재주와 덕이 나보다 낫다면 또한 어찌 서얼이라 해서 그들과 벗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겠습니까.
그런데도 서얼은 양반과 서로 어울려도 벗은 할 수 없고, 서로 친해도 나이 대접을 받을 수 없으며, 충고하거나 책선(責善)하는 도리도 없고, 탁마(琢磨)하고 절시(切偲)하는 의리도 끊겼으며, 말을 하는 때에는 예절이 너무 까다롭고, 만나서 예의를 차리는 즈음에도 원망과 비방이 마구 쏟아져 나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서얼들의 경우 오륜(五倫) 가운데 끊어지지 않고 간신히 남아 있는 것은 부부유별(夫婦有別) 한 가지뿐입니다.
아아, 재주 있고 어진 이가 버려져 있어도 근심하지 않고 인륜이 무너져도 구제하지 않으면서도,

“서얼 중에는 재주 있고 어진 이가 없다.”
하고, 또한

“이렇게 해야만 명분이 바로잡힌다.”
하니, 이것이 어찌 이치라 하겠습니까. 무릇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이는 것은 할아비를 계승하여 중책(重責)을 전하자는 것입니다. 옛날에 석태중(石鮐仲)이 적자가 없고 서자만 여섯 명이 있어, 뒤를 이을 자를 점쳤을 때 기자(祁子)에게 길조가 나타났으니, 이는 어진 이를 가린 것이었습니다. 당 나라의 법률에,

“무릇 적자를 세움에 있어 법을 어긴 자는 1년의 도형(徒刑)에 처한다.”
고 되어 있고, 이에 대하여 뜻을 풀이한 자가 말하기를,

“적처(嫡妻)의 장자가 적자가 되는데, 부인의 나이가 50이 넘어서 다시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하게 될 경우에는 서자를 세워 적자로 삼기를 허락하되, 서자 중의 맏이를 세우지 않으면 형률이 또한 같다.”
하였으니, 이는 근본이 어지러워짐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대명률(大明律)》에도,

“무릇 적자를 세움에 있어 법을 어긴 자는 장(杖)으로 다스린다. 적처의 나이 50이 넘었는데도 자식이 없는 자는 서장자(庶長子)를 세울 수 있게 하고, 서자 중의 장자를 세우지 않는 자는 죄가 같다.”
하였으며, 《경국대전》에는,

“적처와 첩에 모두 아들이 없어야만 같은 종족의 지자(支子 적장자가 아닌 아들)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는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관에서 작성한 문서와 양가(兩家)에서 작성한 문서에 명백한 증거와 근거가 있은 후에 마침내 임금에게 아뢸 수 있는 것은, 조명(造命)을 신중히 여긴 까닭입니다.
세간의 사대부들이 제가 보고 들은 것에만 익숙하다 보니 대다수가 잘못된 규례를 답습하여, 본처에게 아들이 없으면 아무리 첩들의 자식이 많더라도 도리어 가문을 위한 개인적 타산에서 정을 끊고 사랑을 억누르고서, 임금에게 아뢰는 글을 엉터리로 지어 지족(支族) 중에서 양자를 들여오되 촌수가 멀고 가까운 것도 가리지 않는 실정입니다.
아, 아비가 전하고 아들이 이어받으니 혈맥(血脈)이 계승되고, 조부의 제사를 손자가 받드니 정기(精氣)가 서로 유사하여 감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갓 적서의 구분에 얽매여, 혹은 촌수가 이미 멀어진 후손을 멀리서 데려다가 조상의 혼령을 받드는 경우도 있으니, 이는 바로 옛사람이 말한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술병을 들고 술을 따라 강신(降神)하게 한다 한들 무슨 황홀(怳惚)이 있겠으며, 신령의 향취가 진동하여 애통한 마음이 생긴다 한들 어찌 정기(精氣)를 교접(交接)할 수 있겠습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날이 새도록 잠 못 이루고 두 분을 그리워한다.”
했으니, ‘두 분’이란 부모를 두고 이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을 극진히 하면 마치 존재하시는 듯하고, 정성을 극진히 하면 마치 나타나신 듯하다.” 한 것은 군자가 제사 지내는 법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까운 사람을 두고 먼 데서 구하여 그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한다면, 어찌 신령이 아련히 나타나 존재하시는 듯할 턱이 있겠습니까. 천리(天理)를 거스르고 인정에 위배되며, 예법으로 따지면 조상을 멀리하는 것이요, 법률로 따지면 임금을 속이는 것이니, 신은 일찍이 이를 통한하여 마지않았습니다.
무릇 명분의 논의가 승세하고 습속이 변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한 집안 안에서도 구별하고 제한하는 법이 거의 남과 다를 바 없습니다. 심지어는 부형(父兄)조차 그 자제(子弟)를 노예처럼 부리고, 종족들은 친척으로 대하기를 부끄러워하여, 족보에서 빼 버리기도 하고 항렬 이름자를 달리하기도 합니다. 이는 단지 외가쪽에만 치중하느라 도리어 본종(本宗)을 가벼이 여기는 일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륜상으로 너무나도 각박하고 몰인정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는 조정에 건의하기를,

“우리 왕조는 인물이 중국에 비하여 적은데, 또 적서를 분별하는 법마저 있습니다. 무릇 신하로서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마음이 어찌 적자냐 서자냐에 따라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인재를 뽑아 쓰는 길이 너무도 편협하니 신은 그윽이 통탄하는 바입니다. 청하건대 서얼 중에서도 인재를 가려서 등용하되, 직위가 높아진 뒤에 혹 명분을 어지럽히는 죄를 지을 경우에는 엄격히 법률을 적용하소서.”
하였습니다.
선조(宣祖) 때에 미쳐 신분(申濆) 등 1600명이 소장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자 임금께서 하교하기를,

“해바라기가 태양을 따라 도는 것은 곁가지라도 다를 바가 없다. 신하로서 충성하고자 하는 뜻이 어찌 적자에게만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선정신 이이(李珥)가 제일 먼저 서얼을 통용할 것을 건의하여 비로소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되었고, 선정신 성혼(成渾)과 선정신 조헌(趙憲)이 연달아 봉사(封事 밀봉한 상소)를 올려 서얼을 청요직(淸要職)에도 통용할 것을 각기 청하였습니다.
인조 때는 고(故) 상신(相臣) 최명길(崔鳴吉)이 부제학으로서 홍문관의 동료 심지원(沈之源) · 김남중(金南重) · 이성신(李省身)과 더불어, 의견을 구하는 성지(聖旨)에 호응하여 연명(聯名) 상소를 올려, 서얼을 통용할 것을 청했는데 그 내용이 몹시 절실하였습니다. 또한 고 상신 장유(張維)도 소를 올려 그 일에 대해 논하니, 임금께서는 조정에서 논의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고 상신 김상용(金尙容)이 이조 판서로서 회계(回啓)하기를,

“하늘이 인재를 낸 것은 적자든 서자든 차이가 없는바, 서얼 금고법은 고금의 역사에 없는 것입니다. 옥당(玉堂 홍문관)의 차자(箚子)를 통해서 여론을 알 수 있습니다. 묵은 폐단을 깨끗이 개혁하고자 하여 성지에 호응해 간절히 아뢰었으니, 청컨대 대신(大臣)에게 의견을 수합하게 한 뒤 정탈(定奪 채택)하소서.”
하여, 사안이 비변사로 내려졌습니다. 고 상신 이원익(李元翼) · 윤방(尹昉) 등이 의견을 올리기를,

“서얼을 박대하는 것은 천하 만고에 없는 법이니, 유신(儒臣 홍문관 관원들)이 아뢴 차자는 대단히 식견이 있습니다.”
하였고, 고 상신 오윤겸(吳允謙)은 의견을 올리기를,

“서얼의 벼슬길을 막는 것은 고금 천하에 없는 법이니, 조정에서는 어진 이를 등용하고 인재를 거두어 쓸 따름입니다. 직위가 높아진 후에 명분을 문란시킬 경우에는 국법이 본디 엄중하니 염려할 바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호조 판서 심열(沈悅), 순흥군(順興君) 김경징(金慶徵), 공조 판서 정립(鄭岦), 판결사(判決事) 심집(沈諿), 동지중추부사 정두원(鄭斗源), 호군(護軍) 권첩(權帖)은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고, 도승지 정온(鄭蘊)도 상소하여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은 일찍이 의소(擬疏)를 지어 정도전도 오히려 대제학이 되었던 사실을 끌어대면서, 대개 서얼의 벼슬길을 제한하는 법은 중세(中世)에 나온 것이므로 모두 벼슬길을 열어주기를 청하였으니, 이 상소를 끝내 올리지는 못했으나 《우암집(尤庵集)》에 실려 있습니다. 또 선정신 박세채(朴世采)는 아뢰기를,

“서얼 중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기재(奇才)가 있을지라도 등용될 길이 없으니, 크게 변통하기를 청합니다. 성상께서는 유행하는 풍속에 구애되지도 마시고 상규(常規)에 얽매이지도 마시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이치를 자각하시고 결단하여 시행하소서.”
하였습니다. 고(故) 지돈녕부사 신(臣) 김수홍(金壽弘)은 상소를 올려 서얼을 통용할 것을 청했으나 일이 끝내 시행되지 못했고, 고(故) 판서 이무(李袤)는 대사헌으로 있을 때 상소를 올려 서얼을 통용할 것을 청했으나, 도승지 신(臣) 김휘(金徽)가 물리쳐서 상소가 임금께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 뒤 고 상신 최석정(崔錫鼎)이 이조 판서로서 상소를 올려 서얼을 통용할 것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논의한 지 오래였는데도 시행되지 못했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아, 오직 가문만을 위하고 제 이익을 이루려는 계획이 깊어질수록 명분의 논의를 더욱 굳게 지키고, 벼슬에 등용하거나 벼슬을 막는 권한이 커지자 도리어 조종(祖宗)의 법을 핑계 대어, 인정을 억누르고 은애(恩愛)를 저버림으로써 본종을 중히 여기는 것을 멸시하고, 친한 사람을 버리고 소원한 사람을 취함으로써 고의로 임금을 속입니다. 잘못을 답습하는 것이 습속을 이루었는데도 인륜을 무너뜨리는 것인 줄 모르고, 정밀한 저울로 달아 눈금을 재듯이 문벌을 따지면서 인재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무도 걱정 하지 않습니다.
명분의 주장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남김없이 변론했으니, 청컨대 옛 제도를 혁신하는 논의에 대해서 다시 남김없이 말씀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무릇 법이란 오래가면 폐단이 생기게 마련이고, 일이란 막히면 통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준수해야 할 때에 준수하는 것이 바로 계술(繼述)이거니와, 변통해야 할 때 변통하는 것도 역시 계술이니, 굳게 지키거나 혁신하는 것을 오직 때에 맞도록 한다면 그 의의는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하늘이 뭇 백성을 낳으시니 너의 극(極)이 아님이 없다.”
하였고, 《서경》 대우모(大禹謀)에 이르기를,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야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리라.”
하였습니다. 무릇 ‘극’이란 이치의 극진함이요, ‘중’이란 의리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서경》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치우침도 없고 기울어짐도 없으면 왕도(王道)가 평탄하리라.”
하였으니, 이를 두고 이름입니다.
더구나 서얼 금고법은 옛날을 상고해 봐도 그러한 법이 없고, 예법과 형률을 뒤져봐도 근거가 없습니다. 처음에 한 사람의 감정 풀이에서 나온 것일 뿐 본시 건국 당시 정한 제도가 아니었으며, 100년이 지난 뒤에 선조(宣祖)께서 비로소 과거에 참여하는 길을 터 주었고, 인조(仁祖) 때 미쳐 또 삼조(三曹)의 관직을 허락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보면 역대 임금들께서 혁신하고 변통하려 한 성의(聖意)를 단연코 알 수 있습니다.
아아, 서얼로 태어나면 세상의 큰 치욕이 되어 버리니, 현요직(顯要職 지위가 높고 중요한 벼슬)을 금지하여 조정과 멀어지고, 명칭을 제대로 가리켜 부르지 못하여 가정에서도 핍박을 받습니다. 학교에 가도 나이 대접을 받지 못하고 고향 마을에서는 친구마저 끊어져서, 처지가 위태롭고 신세가 고독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때문에 큰 부담을 진 듯이 전전긍긍하면 사람들은 천히 여기니, 궁하여도 귀의할 곳 없어 몸 둘 바를 모릅니다. 혹은 자취를 감추어 조용히 지내고자 무리를 떠나 뜻을 높이 가지면 교만하다 이르며, 혹은 어깨를 움츠리고 가련한 태도를 취하며 무릎을 꿇고 구차히 비위를 맞추면 비루하고 간사하다 합니다.
아, 하늘이 인재를 내린 것이 그토록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다만 배양 방법이 다르고 진로가 달라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맹자는 이르기를,

“만약 제대로 배양하면 성장하지 않는 생물이 없고, 만약 제대로 배양하지 않으면 소멸하지 않는 생물이 없다.”
하였으니, 다만 배양하여 성숙시키지 않고서는 어찌 그들 중에 인재가 없다고 질책하겠습니까?
혹은 적전(嫡傳 적자의 지위)을 이어받더라도 서얼이란 이름이 삭제되지 않고, 아무리 세대가 멀어져도 영원히 천속(賤屬)이 되는 것이 실로 노비의 율(律)과 같습니다. 그들의 친족이 번성하여 거의 나라의 반에 이르렀으나, 귀의할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항산(恒産 생업)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누렇게 야윈 얼굴에 삐쩍 마른 목으로 무기력한 채 피폐하게 살아가고, 가난이 뼈에 사무치되 떨치고 일어날 길이 없습니다.
아아, 옛날의 이윤(伊尹)은 백성 한 사람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마치 자기가 밀어서 웅덩이 속에 집어넣은 것같이 여겼는데, 지금 서얼로서 제자리를 잃고 고생하는 자가 어찌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억눌려 지내온 지 이미 오래라서 울분이 갈수록 쌓였으니, 천지의 화기(和氣)를 손상하여 재해를 부른 것이 반드시 이 때문이 아니라고는 못 하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을 본받아 민물(民物)을 다스림에 성스러운 업적이 우뚝하고 빛나시니, 온 나라의 생명치고 제자리를 얻어 각기 그 삶을 즐기고 그 생업에 편안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묻혀 있고 버려져 있던 자들을 진작시키고 기용하여 능히 탕평(蕩平)의 정책을 확대하시고, 단점을 고쳐 주고 결점을 덮어 주어 모두 임금의 교화에 감싸이게 하셨습니다. 묵은 폐단과 미비된 법들을 모조리 바로잡으시면서도, 유독 서얼을 통용하는 법에 있어서는 아직 뚜렷한 정책이 서지 못했습니다.
아, 지금 신의 이 말씀은 어리석은 신 한 사람의 개인적 발언이 아니라 바로 온 나라 식자들의 공언(公言)이며, 현재의 온 나라 공언일 뿐만 아니라 바로 역대 임금들 이래로 선정(先正)과 명신(名臣)들이 간절히 잊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중 다른 의견을 제시한 자들에 대해서도 신이 이미 낱낱이 거명하여 아뢰었는데, 대개 학식이 천박하고 도량이 좁아서 제가 보고 들은 것만을 굳게 지키고 한갓 유행하는 풍속만을 따르는 자들이니,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명분을 엄히 해야 한다는 것과 혁신하기가 어렵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즘 세상에도 편들기를 주장하고 상식과 어긋난 주장 펴기를 좋아하는 이런 무리들이 반드시 없다고는 못 하겠는데, 이들은 모두 명신 정온(鄭蘊)의 상소 하나만을 끌어와 구실 삼고 있습니다. 무릇 정온의 순수한 충성과 큰 절개야말로 일월(日月)과 함께 빛을 다툴 만한즉, 신은 감히 이 상소가 무엇에 격발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개 그 요지는 역시 명분과 국가 제도의 두 가지 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 먼 시골 지방의 사람은 그의 내력을 모르더라도 문반으로는 사헌부와 사간원에 통용될 수 있고 무반으로는 병사(兵使) · 수사(水使)를 지낼 수 있는데, 그의 문벌을 묻지 않아 아무런 구애될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서얼들은 가깝게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다 공경대부(公卿大夫)이고 멀리로는 저명한 유학자와 어진 재상이 그 조상이니, 먼 시골 지방 사람에게 비하면 그의 내력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벼슬길을 막는 법은 죄에 연루된 자보다 심하고 차등하는 명분은 종보다 엄하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지금 서얼들 중에 누가 어질어 쓸 만하고 누가 재간이 있어 발탁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조정이 백성들에게 차별없이 베푸는 은혜를 하늘이 덕을 베풀 듯이 하시고, 천지와 같은 덕화를 만물에게 빈틈없이 미치시어, 단점을 고치고 장점을 발휘하게 함으로써 이미 무너진 인륜의 질서를 다시 세우고, 성숙시키고 배양함으로써 오래 버려 두었던 인재를 다시 거두어들이며, 양자 세우는 법을 《경국대전》에 위배되지 않게 하고 본종을 높이는 도리를 모조리 고례(古禮)로 돌아가게 하며, 가정에서는 부자간의 호칭을 바로잡고 학교에서는 나이에 따른 질서를 세워서, 300년 동안이나 버려졌던 뒤에서 다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한다면, 그들 모두가 스스로 새 출발 할 것을 생각하여 명예를 지키고 품행을 닦고자 노력하며, 충성을 바치고자 하고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여 나라를 위해 죽기를 다투기에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중대한 왕정(王政) 가운데 이보다 더한 것은 없을 터이니, 위대하신 성인(聖人 임금)이 장수를 누리면서 인재를 육성하시는 공적 역시 이 일을 버려 두고 어디에서 찾으시겠습니까.


[주C-001]서얼 …… 의소(擬疏) : 원문은 ‘擬請疏通疏’로 되어 있으나,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등에는 ‘擬請疏通庶孼疏’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소통(疏通)’은 곧 허통(許通)으로, 천인(賤人)이나 서얼에게 벼슬길을 터주는 조치를 말한다. ‘의소(擬疏)’는 상소의 초고(草稿)를 말하는데, 대개 기초(起草)만 해두고 실제로 올리지는 않은 상소를 뜻한다. 이 글은 누락된 글자가 많아 이본들을 참작하여 보충 번역하였다.
[주D-001]삼가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 원문은 ‘云云’으로 되어 있으나,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등에는 ‘伏以’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주D-002]하늘이 …… 않사옵니다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풍년에는 자제들이 많이 느긋해지고 흉년에는 자제들이 많이 거칠어지는데, 하늘이 인재를 내린 것이 그토록 다른 것이 아니라〔非天之降才爾殊也〕, 그들의 마음을 빠져들게 한 원인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D-003]전얼(顚蘖)과 변지(騈枝) : 전얼은 쓰러진 나무에 난 싹을 말한다. 《서경》 반경 상(盤庚上)에서 ‘若顚木之由蘖’을 인용한 것이다. 변지는 변무 지지(騈拇枝指)의 줄임말이다. 변무는 엄지발가락이 검지발가락과 붙어 하나가 된 것을 가리키고, 지지는 엄지손가락 곁에 작은 손가락 하나가 더 생겨 육손이가 된 것을 가리키는데, 모두 쓸모없는 물건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莊子 騈拇》 여기서는 한데 붙은 기형적인 나뭇가지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D-004]성인(聖人) : 성왕(聖王)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05]문왕(文王)이 …… 않았으리오 : 《시경》 대아(大雅) 역복(棫樸)에 나온다. 원시(原詩)에는 ‘주왕(周王)’으로 되어 있는 것을 연암은 ‘문왕’으로 고쳐 인용하였다. 원시에 따라 ‘文王’을 ‘周王’으로 고친 이본도 있는데 주왕은 곧 문왕을 말한 것이다. 이 시는 주 나라 문왕이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한 것을 예찬한 시이다.
[주D-006]인재를 …… 초래하였으며 : 원문은 ‘□□遺才之歎’인데, 여러 이본에 ‘致有遺才之歎’으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주D-007]사가(私家)에서는 …… 마침내 : 원문은 ‘私家□嚴□□□’인데, 여러 이본에 ‘私家徒嚴名分 遂’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주D-008]임금을 …… 것이요 : 조선 시대에 사대부가에서 후사가 없어 양자를 두고자 하는 경우에는, 양가(兩家)가 계후(繼後)하는 데 동의한 뒤 계후를 청원하는 소지(所志)를 작성하여 예조에 올리고, 예조에서는 양가와 관계자로부터 사실을 확인하는 진술서를 받은 다음, 이를 왕에게 보고하여 왕의 허락을 받은 뒤 예조로부터 양자의 허가증명서인 예사(禮斜)를 발급받아야 했다. 단 본처와 첩에게서 모두 자식을 얻지 못했을 경우에 한하여 계후를 허락했으므로, 서자가 있는 사실을 숨기고 계후를 청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D-009]적자와 …… 해도 : 원문은 ‘等威□殊’인데, 여러 이본에 ‘等威雖殊’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주D-010]공정하게 대하였으니 : 원문은 ‘均□’인데, 여러 이본에 ‘均視’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주D-011]어찌 …… 했겠습니까 : 원문에는 ‘豈復差於□□□□哉’인데, 이본에 ‘豈復差別於母族之貴賤哉’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주D-012]언론을 아래에서 좌우 : 이조의 정랑과 좌랑은 하급 관원임에도 불구하고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과 같은 청요직(淸要職)에 대한 후보 제청권과 자신의 후임을 추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 조정의 언론을 좌우하였다. 그러나 영조 17년(1741) 한림(翰林)에 대해 회천(回薦)하던 규례를 혁파하면서, 아울러 이조의 정랑과 좌랑의 그와 같은 권한들도 혁파되었다. 《연암집》 권3 ‘조부께서 손수 쓰신 한림 추천서에 대한 기록〔王考手書翰林薦記〕’ 참조.
[주D-013]정주(政注) : 관직의 후보자를 복수로 추천하여 올리는 일을 말한다.
[주D-014]제 …… 의도이지 : 원문은 ‘專門濟私之□□’인데, 여러 이본에 ‘專門濟私之偏意’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주D-015]저들이 …… 있다고 : 원문은 ‘固何負於國家’인데,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固’ 자가 ‘彼’ 자로 되어 있다.
[주D-016]저들로 …… 말입니까 : 원문은 ‘□□不得齒衿紳之列哉’인데, 몇몇 이본에는 ‘使不得齒衿紳之列哉’로,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使之不得齒衿紳之列哉’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원문 중의 ‘금신(衿紳)’은 원래 유자(儒者)의 복장을 뜻하며, 나아가 선비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진신(搢紳), 즉 벼슬아치로 번역해야 합당할 듯하다.
[주D-017]군자가 …… 없다 : 《맹자》 등문공 상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군자는 치자(治者) 계급을 뜻하고, 야인은 소인(小人) 즉 일반 백성을 뜻한다.
[주D-018]그렇지만 : 원문은 ‘□而’인데, 여러 이본에는 ‘然而’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주D-019]명덕(明德)을 …… 것 : 《서경》 요전(堯典)에서 요 임금이 신하들에게 제위(帝位)를 선양할 사람을 천거하라고 하면서 한 말이다. 이 말에 대한 해석은 《상서정의(尙書正義)》를 따랐다.
[주D-020]어진 이를 …… 것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나오는 말이다. 《맹자집주(孟子集註)》에 따라 해석하였다.
[주D-021]강좌(江左) : 강동(江東) 즉 양자강(揚子江) 이남의 동쪽 지역으로, 동진(東晉)을 비롯한 남조(南朝)의 국가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주D-022]도간(陶侃) : 259 ~ 334. 어려서 고아로 가난하였으나, 현리(縣吏)가 되어 공적을 쌓아 자사(刺史)에 이르렀다. 반란을 진압하여 장사군공(長沙郡公)에 봉해졌으며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었다. 도간의 어머니 담씨(湛氏)는 첩이었다. 《晉書 卷96 列女傳 陶侃母湛氏》
[주D-023]주의(周顗) : 269 ~ 322. 안동장군(安東將軍) 주준(周浚)의 아들로, 젊은 시절부터 명망이 높았다. 동진(東晉) 원제(元帝)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으며, 왕돈(王敦)의 반란에 저항하다 피살되었다. 주의의 어머니 이씨(李氏)는 쇠잔한 이씨 가문을 일으키고자 명문 귀족인 안동장군 주준을 유혹하여 자진해서 그의 첩이 되었다. 《晉書 卷96 列女傳 周顗母李氏》
[주D-024]소정(蘇頲) : 670 ~ 727. 좌복야를 지낸 허국공(許國公) 소괴(蘇瓌)의 아들로, 측천무후(則天武后) 때 진사가 되고 습봉(襲封)하여 소허공(小許公)으로 불렸다. 현종(玄宗) 때 자미황문평장사(紫微黃門平章事)가 되었다. 연국공(燕國公) 장열(張說)과 함께 문장가로 유명하였다. 소정은 부친 소괴가 천비(賤婢)에게서 얻은 자식으로, 처음에 소괴는 그를 아들로 알지 않고 마구간에 두고 일을 시켰으나, 손님이 그의 시재(詩才)를 알아보고 소괴에게 “그대의 종족의 서얼이냐?”고 물었다. 그제야 소괴가 사실을 밝히자 손님은 아들로 거두어 기르기를 청하였다. 그때부터 소괴가 조금씩 그를 가까이하다가 어느날 그의 시재에 놀라 마침내 아들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開天傳信記》 《靑莊館全書 卷24 編書雜稿4 詩觀小傳》
[주D-025]얼자(孼子) : 원문은 ‘□産’인데, 여러 이본에는 ‘賤産’으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천산(賤産)은 천첩산(賤妾産) 즉 얼자를 말한다. 양첩산(良妾産)은 서자(庶子)라 하여, 얼자와 구별하였다.
[주D-026]이소(李愬) : 773 ~ 821. 당 나라 덕종(德宗) 때 반란을 진압하고 수도를 회복한 공으로 서평군왕(西平郡王)에 봉해진 이성(李晟)의 아들로, 헌종(憲宗) 때 오원제(吳元濟)가 회서(淮西)에서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양국공(涼國公)에 봉해졌다. 벼슬은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이르렀고, 사후에 태위(太尉)에 증직(贈職)되었다.
[주D-027]호인(胡寅) · 진관(陳瓘) · 추호(鄒浩) : 호인(1098 ~ 1156)은 호안국(胡安國)의 조카로 그의 양자가 되었으며, 양시(楊時)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저서로 《논어상설(論語詳說)》 등이 있다. 진관은 송 나라 철종(哲宗) · 휘종(徽宗) 연간에 태학박사(太學博士) · 간관(諫官)을 지냈으며 저서로 《요옹역설(了翁易說)》 등이 있다. 추호는 휘종 때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를 지냈으며 저서로 《역계사의(易繫辭義)》 등이 있다.
[주D-028]정문배(鄭文培) : 미상이다. 영조 즉위년(1724) 서얼 출신 진사(進士) 정진교(鄭震僑) 등이 올린 상소에는 ‘정문측(鄭文則)’으로 되어 있다. 《英祖實錄 卽位年 12月 17日》
[주D-029]이세황(李世璜) : 미상이다. 영조 즉위년 서얼 출신 진사 정진교 등이 올린 상소에는 ‘이세황(李世黃)’으로 되어 있다. 《上同》
[주D-030]합문지후(閤門祗侯) : 각문지후(閣門祗侯)로, 고려 때 각종 의식을 담당하던 각문(閣門 : 통례원〈通禮院〉)의 정 7 품 벼슬이다.
[주D-031]권중화(權仲和) : 1322 ~ 1408. 고려 공민왕 때 과거 급제 후 좌부대언(左副代言) · 정당문학(正堂文學), 공양왕 때 삼사좌사(三司左使) ·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을 역임했으며, 조선조에 들어 태조(太祖) 때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지고 태종 때 영의정부사가 되었다. 의약서(醫藥書) 편찬에도 힘썼다. 도평의사(都評議使)는 나중에 의정부(議政府)로 개칭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속한 관직이다. 권중화는 고려 말의 권신(權臣)인 권한공(權漢功)의 서자였다. 《高麗史 卷125 奸臣傳1 權漢功》
[주D-032]먼 …… 남길 : 원문은 ‘流光於百代’인데,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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