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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종중 및 지회 소식

추기석전 봉행

페이지 정보

no_profile 대종중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4-09-06 14:39 조회475회 댓글1건

본문


공자님의 공덕을 기리고 현석 세채 선생님을 포함한 동국 18현의 숭고한 도의정신을 추모하는 석전(釋奠)을 하기와 같이 봉행합니다.


 

일시: 2024년 9월 10일(화요일) 오전 10시

장소: 성균관 비천당(丕闡堂) -  대성전 보수공사로 인하여 석전을 비천당에서 봉행합니다.

 

 

비천당

재생()들의 학습장소 또는 임금이 성균관에 친림()하여 과거를 시행할 때 시험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규모는 명륜당()과 같이 남향으로, 중앙에 정청()이 있고, 좌우에 협실()이 있는데 모두 25칸이다.

송시열()의 「비천당기()」에 의하면 1661년(현종 2) 도성 안에 있던 인수원()·자수원() 등 두 사찰을 훼철하고, 우참찬 송준길()의 제안으로 그 재목을 북학()의 진흥사업에 사용하려 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다가 그뒤 대사성() 민정중()이 진언하여 1664년 그 재목과 기와로 비천당을 건립하였다고 하였다.

비천당이라는 이름은 주자()가 성인()을 찬()한 글 중 ‘비천대유()’라는 글귀에서 인용된 것이다. 또 양옆의 재실()을 일량재()·벽입재()라 명명하였는데 이는 모두 송시열이 지은 것이다.

벽입재는 1784년(정조 8) 화재로 소실되어 그 해 9월에 다시 중건되었으나 한말 일량재와 함께 파괴되었으며, 비천당만 수백년간 원형을 유지하여오다가 이것도 6·25사변으로 소실되었다.

1946년 9월 이후 한때 정청인 비천당은 성균관대학교에서 대학본부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좌우 협실은 대학도서관으로 사용하였다. 1988년 8월 건평 184.4㎡의 규모로 다시 복원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천당 [丕闡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댓글목록

允中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允中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논어 안연편 1장에는 "子曰 非禮勿視하며 非禮勿聽하며 非禮勿言하며 非禮勿動이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움직이지 말라.") 하셨고,

논어 팔일편 10장에 "子曰 禘自旣灌而往者론 吾不欲觀之矣로라"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禘제사에 울창酒를 땅에 부어 降神한 뒤부터는 나는 보고 싶지 않다.”) 라고 했는데,
체제사에서도 강신례 이후로 예에 맞지 않아 공자께서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釋奠은 非禮를 버젓이 행하고 있으니, 그것을 보고 듣는 것도 禮가 아닙니다.
부디 전폐례까지만 보고, 초헌례부터는 보지 않기를 권합니다.

초헌례에서 대축이 독축을 하는데, 현재의 석전 홀기에는 "헌관이하 제집사 급 재위자 개 부복"이라고 합니다.
제집사는 석전이 시작되면 처음에 4배를 올리고, 관세위에서 세수 한 후, 모든 절차가 끝나면 집례가 제집사를 인솔하고 나와서 계간배위에서 4배를 올리는 것입니다.
제 집사들이 먼저 4배 후 손을 씻고, 마지막에 4배를 하는 것은 석전 진행 중에 성현들에게 올리는 제물(제기)을 만지기 때문입니다. 제례가 끝나기 전에는 땅을 집는 부복을 해서는 안되며, 국조오례의에도 '제집사의 부복'이라는 절차는 없습니다.

성균관에서는 마땅히 국조오례의에 따라 석전을 行해야 할 것입니다.

 https://blog.naver.com/chanoon/22321348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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