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인물 | 11세 소고공嘯皐公 승임承任
페이지 정보
대종중 작성일16-03-30 19:43 조회1,609회 댓글0건본문
|
[11세 소고공嘯皐公 승임承任] 1517(중종)~1586(선조) 자는 중보(重甫), 호는 소고(嘯皐). 아버지는 박형(朴珩)이며, 어머니는 예안 김씨(禮安金氏)로 김만일(金萬鎰)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0년(중종 35)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예문관·승정원·홍문관 등에서 여러 청환직(淸宦職: 조선시대 홍문관·규장각·선전관청 등의 벼슬. 지위나 봉록이 높지 않으나 후에 중용될 자리)을 역임하고, 정자(正字)로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였다. 옥당(玉堂)에 있을 때 왕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군학(君學)과 시무(時務)에 대한 충언을 담은 1만여 자나 되는 상소를 올려 정책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어서 수찬에 승진되고, 이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다. 그의 명망이 높아지자 당시 세도가인 소윤(小尹)윤원형(尹元衡)의 심복으로 악명이 높았던 진복창(陳復昌)이 그를 농락할 목적으로 만나보기를 청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으며, 그 뒤 소윤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벼슬을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547년(명종 2)예조정랑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귀향하였다. 상복을 벗은 뒤에는 현풍현감이 되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썼다. 1557년 직강(直講)을 거쳐 사예(司藝)가 되었으나, 윤원형의 세도가 더욱 심해져 벼슬에서 은퇴하여 두문불출하며 독서에 힘썼다. 이듬해 풍기군수로 다시 임명되어 치적을 쌓았고, 임기가 만료되어 교감(校勘)에 임명하려 했으나 사양하였다. 그 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임명되었고, 판교(判校)를 거쳐 1565년 병조참의에 승진되고, 이듬해 동부승지로 전직되었다가 얼마 뒤 진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569년(선조 2)동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71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좌승지에 임명되었다. 1573년도승지에 승진되었으며, 이듬해 경주부윤이 되었다. 이때 집경전(集慶殿)에 태조의 영정을 봉안했는데, 사람들이 함부로 문을 열어보는 등 예절을 지키지 않자 이를 바로잡기 위해 봉심(奉審: 왕명을 받들어 능이나 묘를 보살피는 일)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열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출입을 엄금하였다. 또한 경주 일대의 묵은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관비를 충당하였으며, 조세를 감면하고 부역을 줄이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576년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강화부유수·여주목사를 거쳐 1581년 춘천부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583년 공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언사(言事)에 연루되어 왕의 뜻에 거슬려 창원부사로 좌천되었으며, 얼마 뒤 중앙에 소환되었다가 병사하였다. 저서로는 '성리유선性理類選'· '공문심법유취孔門心法類聚'· '강목심법綱目心法'· '소고문집' 등이 있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