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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물

역대인물 | 24세 금릉위錦陵尉 영효泳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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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중 작성일16-03-31 16:09 조회2,0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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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금릉위錦陵尉 영효泳孝]

 

1861(철종 12)∼1939)   

자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현현거사(玄玄居士). 아버지는 판서 원양(元陽)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고, 1872년(고종 9) 철종의 부마가 되어 금릉위(錦陵尉) 정1품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에 봉해졌다.

큰형을 따라 박규수(朴珪壽)의 사랑을 출입하면서 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이동인(李東仁) 등 실학자, 특히 북학파(北學派)의 학맥을 이은 개화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1879년경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 등과 개화당(開化黨)을 조직하였다.

 

1882년 9월 임오군란의 사후 수습을 일본 정부와 협의하기 위한 특명 전권대신 겸 제3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종사관 서광범 등 14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 약 3개월간 체류하면서 일본 정계의 지도자 및 구미 외교 사절들과 접촉하여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한편, 명치일본(明治日本)의 발전상을 살펴보았다. 이때 항해하는 배 위에서 태극사괘(太極四卦)의 국기를 제정, 일본에 도착한 직후부터 사용하였다.

 

1883년 초 귀국한 뒤 한성 판윤에 임명되어 박문국(博文局)·순경부(巡警部)·치도국(治道局) 등을 설치하여 신문 발간과 신식 경찰제도의 도입, 도로 정비 사업, 유색의복(有色衣服) 장려 등 일련의 개화 시책을 폈다.

 

1888년초 일본에 있으면서 고종에게 국정 전반에 관해 13만여 자에 달하는 장문의 개혁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이른바 ‘개화상소(開化上疏)’ 혹은 ‘건백서(建白書)’이다.

상소문에서 봉건적인 신분 제도의 철폐, 근대적인 법치 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 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그의 개화 정치에 대한 이상이 설계되어 있으며, 그 뒤 그가 시행한 개혁 정치는 그것의 실천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뒤 초대 동아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저서에 《사화기략使和記略》이 있다.

 

한성판윤으로 개화파 요인들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실패한 뒤에 일본에 망명하여 일본과 미국의 정치 제도를 시찰했다. 갑오경장 뒤 귀국하여 김홍집 내각 때 내부대신이 되었으나 고종폐위 사건에 휘말려 다시 일본에 망명했다.  이완용 내각 때는 궁내부대신에 임명되었고 .한때 제주도에 유배된 적도 있었다. 한일 합방 뒤 일본으로 부터 후작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과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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