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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물

역대인물 | 19세 문도공(文度公) 지원趾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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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중 작성일16-03-31 15:29 조회1,3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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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문도공(文度公) 지원趾源]

 

1737(영조13)∼1805(순조5)

자 중미(仲美), 호 연암(燕巖)이다. 할아버지는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 필균(弼均)이고, 아버지는 사유(師愈)이며, 16세에 조부가 돌아가시고, 처숙(妻叔)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 학문 전반을 연구하다가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사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하였다.

 

1777년(정조 1) 권신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했다. 랴오둥[遼東]· 러허[熱河]· 베이징[北京]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보고 귀국,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1789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이듬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제릉령(齊陵令), 1791년(정조 15)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 사퇴했다가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찬진(撰進)하고 1800년(순조 즉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 홍대용· 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기 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발표,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이덕무(李德懋)· 박제가·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이 그의 제자들이며 정경대부(正卿大夫)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등이 있고, 작품에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마장전(馬駔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도(文度)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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