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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2016-03-23 (수)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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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단 분암 영건내력

 

◆다음글은 선묘제궁실록중 '장단 분암 영건내력'을  판관공후 찬수님께서 번역을 해주셨음을 감사드리고  이 글은 이번에 출간되는 임진보  세적편에 올리기로 했습니다.







장단 분암(長湍 墳菴)
 영건(營建) 내력

      1. 장단 문정공묘소 수호 사찰을 건립하자는 권유문[長湍墳菴營建勸文]

  먼 선조의 은혜를 추모하는[報本追遠] 것은 진실로 인간의 도리로써 우선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묘소를 지키고 벌목(伐木)을 금하려면 분암(墳菴 분묘를 돌보는 암자)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이에 감히 통고하노니, 어찌 이를 완성시키는 데  돕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반남선생께서는 학문은 천인(天人 하늘과 인간)을 관통하고 도(道)는 고금에 존숭되시었습니다. 벗들[麗澤]과 강마(講劘 講磨)한 보익(補益)은 포은(圃隱) · 목은(牧隱) 등 여러 어진 이들에게서 취하였고, 성균관[黌舍]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공은 관민(關閩)의 끊어진 학문을 창도(倡導)하신 것2)입니다. 상소(上疏)하여 화이(華夷 중화와 오랑캐)의 분별을 항의하니 급류에 버티는 지주(砥柱)처럼 우뚝하셨는데, 여러 간신들이 옭아매는 참소를 입어 애통하게도 굳센 절개가 화를 도발했습니다.

  일시적인 거짓 꾸밈으로 명예가 더렵혀짐이 비록 심했지만, 백대(百代)의 공론(公論)은 저절로 펴지는 법이라, 우리 성조(聖朝 숙종) 때에 이르러 포장(襃獎)의 은전(恩典)을 거행하니 애영(哀榮)3)이 모두 갖추어지게 되었습니다. 시대[王朝]를 달리하여 심사(心事 생각과 사업)가 크게 밝혀져 원우(院宇)는 엄숙하고도 깨끗하게 숭양서원(崧陽書院 포은 사당)과 나란히 현판(懸板)의 명호(名號)가 함께 빛났습니다.

  돌아보건대, 장단 청교(靑郊)의 묘역(墓域)은 곧 선생을 장례지낸 언덕으로 체백(體魄 육체에 붙어 있는 넋, 즉 시체)이 편안히 쉬는 곳, 가성(佳城)은 전금(展禽)의 무덤을 표한 곳4)이라 하여 행인들은 엄숙하게
공경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하마(下馬)하는 무덤[陵]이라 일컬으니, 우뚝한 4척의 무덤이 진실로 만년의 유택(幽宅)입니다. 아, 우리 후손들은 여기 저기 흩어져 그 반은 서울에 있고 반은 시골에 있으니 선영[松檟]의 푸르름을 어떻게 돌보리까. 자르지도 못하게 베지도 못하게 할 것을 항상 걱정하면서 어찌 수호할 계책을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한두 명의 산승(山僧)이 수삼 간의 암자를 지었으니, 빛나는 절의(節義)를 사대부들만 우러러 높이 받들 뿐만 아니고, 승려들 또한 기꺼이 사모하니 이들로 하여금 여기에 거처를 마련하게 한다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손상되지 않을 것임을 기대할 수 있으리니, 관계됨이 중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더없는 행운이나 다만, 지금 암자의 역사(役事)가 여태 끝나지 않았는데, 지붕을 덮고 서까래 얹는 재력이 부족하여 공사를 하다 말다 한 지가 거의 3년이나 되니, 세운 건물이 비바람을 피하지 못하여, 장차 ‘아홉 길 산을 쌓다가 흙 한 삼태기가 부족하여 허물어진다.’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승려들은 흩어질 우려가 있고, 필시 사방에서 기롱이 많을 것이며, 묘소는 돌볼 곳을 잃게 될 터이니, 후손들의 탄식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지붕을 이게 되면 승려들이 머무는 재사(齋舍)가 되고, 제사 때 옷을 갈아입고 제기를 비치할 장소도 될 것입니다. 감히 사치하고 거대하게는 하지 않을 것이지만, 반드시 장구한 계획을 마련하려면 부득이 여러 사람이 큰일을 함께 구원해야 할 것이니 어찌 한 사람이 사사로이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석천암(石泉菴)의 옛 규례를 따르고 권선문(勸善文)의 비슷한 예를 대강 모방하였습니다.

  여러 존위(尊位)들께서는 가지나 잎이 모두 신령한 뿌리로부터 나와 자자손손이 각기 세업(世業)을 계승하고, 자손이 번성하며 성대한 벼슬이 이어지는 것을 볼 때 어느 누가 조선(祖先)의 음덕을 받지 않은 이가 있겠습니까. 청화직(淸華職)을 역임하면서 후한 녹봉을 받기도 하고, 혹 관찰사로 한 도를 맡아 선정을 펴기도 하며[憩棠], 혹은 부절을 찬[佩竹] 큰 고을의 목민관(牧民官)에서부터 향리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어찌 ‘전곡(錢穀)에 여유가 없다’고 하면서 기다리기만 할  것입니까. 바라건대 공역(工役)을 도움에 시주(施主)에 인색하지 말 것입니다. 곳간을 열되 빈부에 따를 것이니 금백(金帛)을 출연(出捐)함에 어찌 많고 적음을 논할 것입니까. 그러니 진씨(甄氏)의 사정(思亭)5)처럼 아름다움만을 추구할 것도 아니며, 문공(文公)의 선영[先壟]6)이 의거

할 만하다 하겠습니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복을 불러들인다는 말은 설사 믿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선조님 혼령의 도타운 복으로 돌보심은 또한 스스로 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2. 선조 반남선생의 분암을 건립하자는 통문[先祖潘南先生墳庵營建通文]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선조이신 문정공 반남선생께서는 바른 학문[正學]과 참된 도[眞道]로 포은이나 목은 같은 여러 현인(賢人)들과는 한 시대의 동지들인데, 위란(危亂)의 시기를 만나 죽음을 당하는 화를 입으셨으니, 이는 실로 나라 사람들이 함께 슬퍼한 바입니다. 그러나 성대한 명성은 전해 내려와 능히 다른 시대[王朝]의 군신(君臣)들까지 감동케 하여 숙묘조(肅廟朝)에 이르러 시호가 추증되고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등 포장(襃獎)하여 높임이 극에 달하니, 사림(士林)이 모두 발돋움하고서 칭송하고 존모함이 배가(倍加)되었습니다. 송경(松京)의 옛 집터에 서원을 세우고 오관서원(五冠書院)이란 현판을 걸게 되니 묘우(廟宇)가 날아갈 듯한데, 숭양서원(崧陽書院)과 이웃하여 제향(祭享)을 받게 되니, 저 송악산과 함께 영구히 무너지지 않을 것임을 거의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묘소[衣履之藏]는 그 동쪽 장단(長湍) 땅으로 거리가 가까워 십 리가 되지 않는데, 다만 근심스러운 것은 수호가 치밀하지 못하여 묘역의 나무가 꺾이고 퇴락하는 것입니다. 무릇 선생의 후손들로서 도리어 향숙(鄕塾)의 사대부들만도 못하니, 뻔뻔스런 두꺼운 얼굴에 이마에서 진땀이 나지 않겠습니까.7)

  나라 사람들 중 성의를 다해 선조를 모시는 자들은 반드시 분암을 설치하고 승도(僧徒)들을 불러 모아 수호를 돕게 하는데, 묘역을 손질하고 나무꾼과 목동들을 금하여 이익 됨이 실로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의 묘역에는 여러 대를 지내오면서도 아직 경영하지 못하고 있으니, 후손들에게 큰 책임을 남겨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자에 한두 산승(山僧)이 현인(賢人)을 사모하는 발원(發願 원구<願求>하는 마음을 드러냄)으로 장차 묘소가 있는 등성이 옆에 먼저 초가집을 짓고 다시 기와집을 지으려 했으나 재원이 다하고 힘이 모자라 우리 종중에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아, 우리 종인들이 이 산승의 말을 듣고서 우리가 못하는 일을 능히 이 산승들이 하니, 부끄럽지 않을 수 없어 계승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돌아보건대 가문의 형세가  쇠약하고 일족이 가난하여 몇 섬의 저축이 있는 사람도 드문 형편이니, 실로 많은 부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월(越)나라 사람이 진(秦)나라 사람이 수척한 것을 보듯이 무심하여 무너지는 데로 버려두게 된다면 바릿대 하나로 구름같이 떠도는 이들로서 누가 능히 매여 있겠습니까. 필시 모두 흩어지고 근근이 이룩한 초가 또한 무너져 비바람 속으로 휩쓸려갈 터이니, 어찌 원근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으며, 더욱이 우리 종중(宗中)의 깊은 수치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 선생께서 세상을 버리신 것이 실로 홍무(洪武) 을묘년(1375 고려 우왕1)이니, 이제 3백 86년이 되었는데, 시례(詩禮 가학<家學>)가 서로 전해오고 고관[簪纓]이 끊이지를 않은 것이 어찌 선생의 끼치신 은택과 남은 음덕이 우리 후손을 도우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무도 뿌리가 커야 가지가 무성하고, 시내도 근원이 깊어야 흐름이 장원(長遠)한 법입니다. 승냥이와 수달[豺獺] 같은 미물도 오히려 보본(報本)할 줄 아는데8)생각해 보건대 우리 종인(宗人) 중 선생을 한 할아버지로 모시는 자들

로서 선생의 뛰어난 행실과 맑은 향기를 경앙(敬仰)함이 옛날의 다른 현인들보다는 더욱 차이가 있을 것이니, 추원(追遠)하고 영모(永慕)함에 각기 정성을 다해야 할 터인데도 어찌 소홀히 하여 힘을 합해 이 암자를 조성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석천암(石泉菴
호장공 분암<墳菴>)을 중수한 공역(工役)에서 돈을 모아 보낸 규정이 있으므로 이를 한 벌 베껴서 받들어 오늘의 기준을 삼았습니다. 삼가 여러 존위(尊位)께 바라는 바는, 돌려 가며 자세히 보시고 전일의 규정에 따라 많건 적건 형세에 따라 시주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포의(布衣)의 대열에 있어 먹고 입을 것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작은 성의나마 바치는데, 하물며 많은 녹을 받거나 한 성(城)을 맡은 자들이 어찌 남은 봉록(俸祿)의 나머지를 나누는 데 인색하여 선조의 묘소를 수호하는 도리에 진심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루한 습속으로 사찰에 복을 구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곳간을 다 기울이면서도 아까운 줄 모르는데, 하물며 지금은 분암의 창건에 재물을 내놓는 것이 어찌 부처에게 복을 바라는 것일 뿐이리오. 반드시 선조의 혼령께서 여러 자손들의 정성을 내려다보실 터이니 어찌 묵묵히 돌보시면서 많은 복을 내리시지 않겠습니까. 효도하는 자손들이 그 선조에 정성을 바치는 것은 구하는 것이 있어 감응하는 이치겠습니까. 죽거나 살아 있거나 그 사이에 간격이 없다는 것은 경전(經傳)에 널려 있는 말이며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삼가 이를 인용하여 단월(檀越)이나 인과(因果)의 설(說)9)로 대

체(代替)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여러 존위들께서는 두려운 감흥을 가지고 긴하지 않은 일은 제처 두고 많이 원조하시어 석천암의 구례(舊例)에 못지않게 해 주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경진년(1760 영조36)  2월  일    전 승지 필간(弼榦) 등

 


追記
 : 이 글은 문정공 반남선생의 묘소를 수호할 분암(墳菴)을 영건하기 위해 전 승지 필간을 비롯하여 전라감사 도원(道源), 금성위(錦城尉) 명원(明源) 등 종인(宗人) 19인의 연명으로 각 지역 종인에게 돌린 권선통문(勸善通文)이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형체는 없어지지만 혼백(魂魄)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유명(幽明)을 달리한 선조들에게도 산 사람 모시듯이 대하였다. 그래서 여유가 있는 집안이면 묘소 아래 재실(齋室)을 짓고 사람을 두어 묘소를 보살피기도 하고, 후손이 가까이 살면서 직접 관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재실도 없고 후손이 가까이 살지도 않는 경우에는 인근 사찰(寺刹)에 관리를 맡기기도 했는데 이런 사찰을 분암이라 한다. 분암은 유력한 가문에서는 별도로 건립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인근 사찰에 경제적 지원을 하면서 묘소의 보호를 의뢰하기도 하고, 혹은 승려들이 현인(賢人)의 묘소 가까이에 절을 세우고는 해당 종중에 원조를 요청하기도 하는데, 장단 분암의 경우는 후자에 속했다. 즉 문정공 묘소 부근에 몇몇 중이 절터를 잡아 절을 초가로 건립하고는 기와를 얹겠다고 우리 반남박씨 종중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런 분암 제도는, 비록 조선시대  사대부(士大夫)들이 공적으로는 불교를 배척했지만, 가정에서는 절에 시주(施主)를 하면 복을 받는다는 불교의 구복 신앙(求福信仰)이 깊이 뿌리박고 있었으므로 분암이 묘소와 공생(共生)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종인(宗人)들에게서 분암의 유지·관리 비용을 염출하는 데 있어서도 상당한 순기능(順機能)을 했으니, 위의 내용에서도 그것을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출연(出捐)은 유교적 조상 숭배 명분(名分)뿐만 아니라 불교의 구복 신앙 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 외에 자식 명의(名義)의 별도 출연이 많은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위의 통문(通文)에 의해 전국 각지에서 240여 량(兩)이 걷혔는데, 영조 36년(1760) 경의 화폐가치가 1량(兩)에 쌀 3두(斗 현 용량 1斗) 가량이니 240두, 즉 48가마니에 해당한다. 쌀은 당시 경제생활의 기준이었으므로 현재의 쌀값 가치보다는 훨씬 높았다. 그러나 계획대로 순조롭게 개와(蓋瓦)를 이었는지, 또 그 후의 분암 유지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判官公後 贊洙]


1) 장단 분암(長湍墳菴) : 문정공 묘소 수호 암자. 처음 이름은 모현암(慕賢菴)이나 대사암(大思菴)으

로 고쳤다.

2) 관민(關閩)의······창도(倡導)하신 것 : 성리학(性理學)을 발전시켰다는 말이다. 관민(關閩)은 의 관은

성리학을 발흥시킨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이를 집대성한 민중(閩中)의 주자를 합칭한 것으로, 여기

에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자(程子)를 더하여 흔히 염락관민((濂洛關閩)이라 불

러 곧 송대의 성리학을 뜻한다. 고려 말에 선생이 목은 · 포은 제공과 함께 성균관에서 학관(學官)으

로 있으면서 성리학 학풍을 진작시켰다.

3) 애영(哀榮) : 학식이나 공적이 많았으나 생전에는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사후에 은전(恩典)을 받는것

4) 가성(佳城)은······표한 곳 : 훌륭한 이의 무덤이란 뜻이다. 가성은 무덤이란 의미로 한나라 등공(滕

公)이 말을 타고 가다가 동도문(東都門) 밖에 이르자 말이 울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채 발로 오랫

동안 땅을 구르기에 사졸(士卒)을 시켜 땅을 파 보니, 깊이 석 자쯤 들어간 곳에 석곽(石槨)이 있고

거기에 “가성(佳城)이 울울(鬱鬱)하니, 3천 년 만에 해를 보도다. 아! 등공이여, 이 실(室)에 거처하리

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西京雜記 卷4》전금은 맹자(孟子)가 “성인 중의 화

한 분〔聖之和者〕”이라고 평했던 춘추시대의 명사 유하혜(柳下惠)를 가리킨다. 전(展)은 씨(氏)이고,

금(禽)은 그의 자(字)이다.

5)  진씨(甄氏)는 송나라 때 사람으로 그의 집안은 원래 서주(徐州)의 부호였는데 그의 대(代)에 이르

러 집안이 가난해졌다. 그래서 부모 형제가 죽어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형편이라 마을 사람들의 도

움을 받아 간신히 영구(靈柩)를 마련하여 함께 장사 지내고 무덤가에 집을 지었다. 이에 당시 문장가

인 진사도(陳師道)가 그 내력과 조상을 사모해야 한다는 뜻으로〈사정기(思亭記)〉를 지었다.

6) 문공(文公)의 선영[先壟] : 전거 미상(未詳)

7) 후손들로서······않겠습니까 : 개성(開城) 선비들은 선생을 오관서원에 잘 모시는데, 후손들은 묘역

하나 모시지 못하게 되어 부끄럽다는 말. 향숙은 서당의 뜻으로 오관서원을 지칭한다.

8) 승냥이와······아는데 : 시(豺)는 승냥이, 달(獺)은 수달을 말하는데, 이것들이 사냥감을 늘어놓는 것

을 제사 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조상의 은덕에 보답할 줄 아는 짐승으로 인식되었다. 승냥이는 계

추(季秋)에 보은(報恩)하는 제사를 지내고, 수달은 맹춘(孟春)에 제사를 지낸다 한다.

9) 단월(檀越)이나 인과(因果)의 설(說) : 선행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불교 교리로 단월은 시주(施主)

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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