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작성자 대종중
ㆍ작성일 2016-02-05 (금)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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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분 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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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文貞公) 분서(汾西) 휘(諱) 미(瀰) 신도비명(神道碑銘)

 


 

분서공(汾西公)이 돌아가신 지 29년 만에 그 손자 태만(泰萬)이 공의 조카 세채(世采)가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명(銘)을 부탁하였다.


공의 선고(先考)는 참찬공(參贊公) 동량(東亮)이다. 광해군 5년 계축년(1613)에 무옥(誣獄)이 크게 일어나서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 공을 필두로 해서 화가 미쳐 장차 그 여파가 국모에게까지 파급되려 하였다. 참찬공은 국구공(國舅公)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건에 대해서 사실에만 의거하여 말하였다. 그러나 간당(奸黨)들은 이것을 가지고 죄목을 꾸며서 마침내 국모까지 유폐(幽閉)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논의하는 사람들은 드디어 참찬공을 허물하였다.

인조(仁祖) 계해년(1623)에 민심이 이미 새로운 임금에 귀속되었는데 공만은 이를 알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실언(失言)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장차 큰 화가 닥칠 지경이었는데 성덕(聖德)의 너그럽고 인자하심에 힘입어 공의 집안은 보전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여러 사람들이 공의 목전(目前)의 큰 화(禍)를 늦추려면 참찬공의 사건은 반드시 끝까지 파헤쳐서 모든 이들의 마음을 말끔하게 씻은 연후에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참찬공이 절역(絶域)으로 유배를 가니 공이 밤낮으로 애통하게 울며 말하기를, “내말 때문에 아버지가 이렇게 되었다.”라고 하며 항상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듯이 하였다.

공은 선조대왕(宣祖大王)의 사위인데 왕은 그의 재능을 매우 사랑해서 언제나 특별하게 대했다. 반정(反正)을 주도한 여러 분들은 공의 친척이 아니면 사우(師友)라, 대모(大謀)에 서로 도우고 장단(長短)이 서로 맞아떨어져 왕의 모사(謀事)를 빛나게 하였다. 그런데 공은 여전히 전보다 더 우울해하여 결국 인조(仁祖) 23년 을유년(1645) 정월 15일에 향년 54세로 돌아가셨다. 아아! 애석한 일이로다.

공의 휘(諱)는 미(瀰)요, 자(字)는 중연(仲淵)이다. 성품이 맑고 분명하며 영민해서 표리가 일관되니 보는 사람들은 옥수(玉樹)나 빙호(氷壺)같다고 하였다. 부모를 섬김에는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는 것을 주로 하고 또한 형제에 대한 우애도 독실하였다. 그가 부친상과 형제상(兄弟喪)에 정성을 쏟는 것에는 보는 이들이 감동하였다. 궁궐을 출입해도 그 화려하고 성대함은 그의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여 집이나 의복은 한미한 선비와 다름이 없었으며 손님이 오면 단정하게 앉아 초연하였다.


 

광해군 때, 왕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의 집은 바로 부셔버렸으니 그때 참찬공은 위급한 상황에 처해 항상 두려워하였다. 공은 폐모(廢母)하려는 의론이 일어날 때에 진안위(晋安尉) 유적(柳頔) 등과 함께 스스로 의리(義理)를 견지하고 끝내 관계를 하지 않았다. 간악한 당인(黨人)들이 장차 문책하려 해도 공은 굴복하지 않았다. 인조대왕(仁祖大王)이 사묘(私廟)를 존숭하려 함에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서 강요를 해도 듣지 않았다. 어떤 사인(私人)이 와서 공의 의사를 타진하니 공은 그것이 왕의 뜻에서 나왔음을 알면서도 끝내 아부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일찍이 청(淸)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청이 막 우리나라에서 뜻을 이루어 여러 행인(行人)들이 으레 욕을 보았으나, 공은 깨끗한 절개로 스스로를 지켜서 경례(敬禮)를 받았기 때문에 마침내 사명(使命)을 다하고 돌아왔다.


 

공은 문예(文藝)에 천재(天才)라 일컬어졌다. 6세 때에 ‘잔 속에 꽃 그리니 술맛 또한 향기롭다.[柸中畵花酒亦香]’란 시구를 지었다. 11세에 예시(藝試)에 선발되었고 자라서는 진한(秦漢)과 당송(唐宋)의 글에 출입하였으며 《장자(莊子)》와 두시(杜詩)를 좋아했다. 명대(明代)의 문인으로는 창명(滄溟)과 엄주(弇州)를 매우 좋아해서 마음속에 깨달은 바가 있어 자못 그들과 함께 경쟁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일가를 이루니 기오(奇奧)하고 섬박(贍博)하여 자의로 분방함에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연간에서 대가(大家)라고 호칭하는 여러 분들이 모두 옷깃을 여미고 양보하였다.

책을 보는 데에는 한 번에 두어 줄씩 내려가고 기억력도 비할 데가 없었다. 백가(百家)를 관통하고 의론이 해박하며 특이한 서적의 궁벽한 문구를 사람들은 읽지 못해도 공은 자기가 쓴 글처럼 쉽게 읽어 내려갔다. 서법(書法)은 오여(吳輿)를 존모하였는데 필치가 뛰어났고 서법의 깊은 이치를 스스로 깨우쳤다. 일찍이 조정에서 문형(文衡)이 결원되자 공통된 논의를 거쳐 공에게 그 관직을 주려 했으나, 결국 전례를 찾을 수 없어서 그만 두었다. 공은 어릴 적에 백사(白沙) 이문충공(李文忠公)에게 수학하여 그의 언행을 많이 보아서 스스로를 삼가고 다스렸다. 사이가 좋았던 이들, 예를 들어 계곡(谿谷) 장유(張維) 공과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 공과 같은 이가 있어서 서로 존중하였다. 다만 문장뿐만 아니라 학업에 뜻을 두었고 의리를 행함에 서로 절차탁마하여 늙어서도 신의가 변치 않았다. 석주(石洲) 권필(權韠)은 일세(一世)를 거만하게 보았는데 다만 공을 만나보려고 매우 애썼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고 화를 당하니 공이 종신토록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공은 맑고 소탈하며 자적(自適)하여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데 풍채가 밝게 드러나 곁에는 사람이 없는 듯이 자유분방하였다. 그러나 겸손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남을 대할 때 온화하게 하여 자기의 귀함과 상대의 천함을 잊게 하였다. 집을 나누어 주고 부조를 함에 조금도 인색한 빛이 없었다. 그러므로 공은 부마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홀로 기름진 음식들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손들을 추위와 배고픔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일세의 현호(賢豪)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공은 선조 36년 계묘년(1603)에 옹주(翁主)를 아내로 맞아 그 지위가 순의대부(順義大夫)에서 숭덕(崇德)으로 오르고 금양군(錦陽君)에 습봉(襲封)되었으며 간간이 별직(別職)도 있었다. 대개 인조(仁祖)의 말년에는 점차 그 억울한 사정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안산군(安山郡) 유향(酉向)의 언덕에 종장(從葬)하였는데 그 세계(世系)는 모두 참찬공의 비문에 있다. 옹주는 정안(貞安)이란 시호가 내렸으니 그의 모친이 인빈(仁嬪) 김씨(金氏)다. 옹주는 성격이 온화하고 사랑이 많으면서도 엄숙하며 자못 대의(大義)를 알았다. 신분이 낮은 집에 시집와서 시부모를 섬기고 동서들을 대함에 절대로 교만한 마음이 없이 늙도록 오히려 여자로서의 도리를 다 했으니 왕가(王家)의 아름다운 법도를 가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옹주는 과부로서 16년을 사는데 집이 너무도 가난하니 효종대왕(孝宗大王)이 옹주의 아들인 세교(世橋)를 특별히 군수로 임용해서 그 어머니 봉양에 편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왕래할 때 가마나 의복이 다 헤져서 보는 이가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향년이 71세로서 돌아가시니 공과 합장하였다. 세교의 관직은 첨정(僉正)에 이르렀으며 손자는 태두(泰斗)․태만(泰萬)․태성(泰成)․태화(泰華)․태한(泰韓)․태길(泰吉)․태발(泰發)이고, 손녀사위는 판관(判官) 김만증(金萬增)과 현령(縣令) 조지항(趙持恒)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아아! 공은 고문(高門)의 대족(大族)으로서 또한 유명한 부자(父子)가 되었으니, 그의 명성은 여러 신사(紳士)를 덮었고 그의 재능은 당세에 드러났다. 그러나 처음에는 분호(粉號)에 국한되어 그 포부를 펴지 못하고, 마침내는 두 계년(癸年)의 화을 당하여 유울(幽鬱)한 처지에서 매우 곤궁하게 살다가 일생을 마쳤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옛말에 이르기를 “비록 쓰일 기회는 얻지 못해도 그 쓸 만한 자격이 되는 데는 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고, 또 “어찌 외부적인 것만으로 영욕(榮辱)을 따지겠는가? 자고로 현명해도 운수가 없어 재앙만 많았던 이들이 어찌 한량이 있었던가?”라고 하였다. 더욱이 공은 재난을 만나 어려운 처지에서도 능히 횡류(橫流)에서 꼿꼿하게 자신을 세워 마침내 정도를 지킨 여러 분과 미적(美蹟)을 나란히 하여 방명(芳名)이 스러지지 않았다. 또한 능히 상소를 올려 참찬공의 원한을 흔쾌히 씻어주었는데, 여기에서 실로 공이 행한 충효(忠孝)의 대체(大體)를 볼 수 있으니 족히 선행(善行)을 권할 만한 것이다.


문원공(文元公) 노선생(老先生)이 임천(林泉)에 은거하고 있을 때 공이 계곡(谿谷)․기암(畸庵)과 더불어 문하(門下)에 가서 뵈었는데, 신재(愼齋) 문경공(文敬公)도 또한 선생을 모시고 앉아 있었다. 고금(古今)을 통설(通說)하고 이치를 논변하기를 4일이나 하고 가니 보는 자가 장쾌히 여겼고 말하는 자는 지금까지도 세상에 드문 좋은 모임이라고 하였다. 그 후 곧 노선생이 작고하시고 그때 함께 했던 네 분이 이어서 별세하였다. 나는 일찍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당시의 네 분 중에 공이 홀로 지위가 말석이었으나 지금 자손이 번성하기로는 공이 최고이니 이것이 어찌 승제(乘除)의 이치가 아닐까? 이것은 파평(坡平)을 아는 자와 더불어 말할 수 있는 것이로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수만의 말들이 달려가도 중간에 능히 멈추고,

평지에 있어도 오히려 숭상할 만하네.

옛적 광해군 때에 공의 집안이 거의 무너졌으나,

오직 그 의리(義理)를 지켜 위협에도 따르지 않았네.

분진 간의 일 세월이 흘러가면 모두 운수(雲水)처럼 희미해지리,

두보(杜甫) 같은 이가 있어 준비하여 기다렸네.

이것으로 징험이 될 것이니 나머지는 내 능히 다 말하랴.

어찌 엄숙하고 온화하지 않으리오, 왕녀의 행차로다.

이 하나의 무덤을 같이하니 만세에 길이 빛나리라


 

                                                                         송시열(宋時烈)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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