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작성자 대종중
ㆍ작성일 2016-02-05 (금)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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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분 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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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군(錦洲君) 휘(諱) 정(炡) 신도비명(神道碑銘)


 

 

생각건대 우리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반정(反正)할 때 대왕을 보필한 선비 가운데 당대의 명사가 많았는데 공은 그 중에 한 사람이다. 공의 휘(諱)는 정(炡)이고 자(字)는 대관(大觀)이다. 나주(羅州)의 박씨(朴氏)는 신라 시조 왕으로부터 파생하여 반남현(潘南縣)을 본적으로 하였다. 고려 때에 9대조 상충(尙衷)은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을 지냈으며, 본조(本朝)에 들어 8대조 은(訔)은 의정부 좌의정에 올랐고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시호는 평도공(平度公)이다. 고조부 조년(兆年)은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증조부 소(紹)는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을 지냈고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학식과 덕행으로 일대에 존경을 받았다. 조부 응천(應川)은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지냈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 동선(東善)은 의정부 좌참찬을 지냈고 보조공신(補祚功臣) 영의정(領議政)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추증되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를 선인장자(善人長者, 훌륭한 인품을 갖춘 어른)라고 칭찬하였다. 선비(先妣)인 이씨(李氏) 정경부인(貞敬夫人)은 종실인 청성군(淸城君) 걸(傑)의 따님이고 용천군(龍川君) 수한(壽閑)의 손녀이니, 성격이 엄숙하였고 남편을 섬기는데 예를 지켜 60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공은 선조(宣祖) 29년 병신년(1596) 4월 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기에 옆에서 독려를 하지 않아도 공부에 힘을 써서 10세에 이미 문의(文義)를 깨달았다. 약관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24세에 정시(庭試)에 급제해서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 부정자(副正字)가 되었다. 그때 부원공(府院公)이 모후(母后)를 폐하는 의론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양사(兩司)에서는 유배 보낼 것을 논의하였다. 공은 결국 관직을 사퇴하고 경기(京畿)에 은거하여 성현의 경서를 읽으며 자기의 인격을 수양하는 공부에만 뜻을 두었다. 여가가 있으면 남쪽 밭에 나가 농사짓는 것이나 보았다. 임술년(1622) 겨울에 친한 벗들이 반정(反正)을 계획한다는 말을 듣고는 공은 승평(昇平) 김상공(金相公)을 만나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라의 사직(社稷)이 지금 이와 같으니 화란(禍亂)을 무력으로 종식시켜야 하는데 공이 아니면 누구의 뜻이겠는가?” 그와 협력해서 대업을 달성하였다.
 

인조반정 직후에는 승문원저작(承文院著作)과 태상시직장(太常寺直長)에 임명되었다가 바로 검열(檢閱)에 추천되었다. 얼마 후에 옥당(玉堂)으로 자리를 옮겨 정자(正字)가 되었다가 박사(博士)로 승진하였으며, 부수찬(副修撰)으로 전임하여 정언(正言) 지제교(知製敎)가 되었다. 그리고 정사훈(靖社勳) 3등으로 책훈(策勳)되어 분충찬모정사공신(奮忠贊謨靖社功臣)의 공호를 받았다. 또한 공의(公議)로 인해 전랑(銓郞)에 보임되었는데, 왕은 공에게 공론으로 탄핵하는 풍모가 있다고 해서 특별히 장령(掌令)으로 임용하였다.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왕이 남쪽으로 가려할 때 공이 입조하여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역적이 돌진하자 원수(元師)가 그 뒤를 추격하고 있으나 경기와 지방의 성세(聲勢)가 서로 통하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따로 군사를 내어 한남(漢南)으로 보내십시오.”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그리고 응교(應敎)로 자리를 옮겼다. 왕의 행차가 환도(還都)하여서는 여러 번 사간(司諫)ㆍ집의(執義)ㆍ검상(檢詳)ㆍ사인(舍人)ㆍ장악원정(掌樂院正) 등을 역임하였다.
 

을축년(1625) 김상공(金相公)이 이조판서가 되어 남이공(南以恭)을 대사헌으로 삼으니, 공이 옥당에 있으면서 부응교(副應敎) 유백증(兪伯曾), 교리(校理) 나만갑(羅萬甲) 등과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이공은 광해군 때에 도당(徒黨)을 만들고 권세를 휘두른 과오가 있습니다. 청컨대 이조판서를 교체하여 그 과오에 책임을 지게 하소서.” 왕은 이를 다른 집단을 모함하는 것으로 의심해서 삼학사(三學士)를 외직으로 보임하고 공은 함평현감(咸平縣監)으로 보냈다. 정원(正院)에서 불가함을 진정하고 양사(兩司)에서도 간쟁하고 상신(相臣)과 제신(諸臣)들도 모두 간언하였으나 왕은 따르지 않았다. 연평(延平) 이공(李公)도 또한 경연에 있다가 장계를 올렸는데 어조가 김상공을 공격함이 많았다. 그래서 왕은 교지를 내려 “훈신(勳臣)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박모는 조정을 어지럽힌 죄를 면하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세 신하를 모두 멀리 유배 보냈다. 다행히 상촌(象村) 신흠(申欽) 공이 우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차자(箚子)를 올려 변호를 하였으므로, 임금의 마음이 풀려서 유배는 가지 않게 되었다.
 

공은 외직에 있을 때 말투가 조용하여 얼굴에는 기미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고을을 다스릴 때에는 장엄하고도 근면하여 작은 일도 빠뜨리지 않았고 교활한 아전들을 복종시켰다. 정무의 여가에는 고을의 자제들을 교육하고 군대를 훈련하였는데, 각각의 능력이 어떠한 지에 따라 상벌(賞罰)을 시행하여 3년 만에 성공하였다.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공은 병졸을 이끌며 충의(忠義)를 격려하였는데, 출정에 임해 방백(方伯)에게 알려 사형수를 죽여 대중에게 시위하니 모두들 전율하였다. 그래서 국경에 이르렀을 때, 다른 여러 고을의 병졸들은 대개 대오가 혼란하였지만 공이 거느린 병졸만은 소란스럽지 않았다. 공은 왕이 이미 강화도로 행차하였다는 말을 듣고, 감사(監司)에게 자신의 고을 병사들을 거느리고 왕을 위해 전투를 하겠다고 울면서 청하였다. 감사는 조정의 명령으로써 병사(兵使)에게 병졸을 거느리게 하고 고집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또 두 세 고을의 수령과 더불어 공주산성(公州山城)으로 가서 지켜서 호남과 호서를 보호하였다. 때마침 세자가 남쪽으로 오려 하였으나 결국 오지 못했다. 
 

이보다 앞서 함평현감(咸平縣監)은 대개 무인에 속한 자가 많아서 군민에게 과세하는 것이 일정한 원칙이 없었는데 공이 와서 비로소 등급을 정하니, 그 후로는 공이 펼친 정책을 그대로 따라서 오래도록 원칙으로 삼았다. 
 

공은 병인년(1626)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통정(通政)에 승진했는데 그때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가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대사간(大司諫), 병조참지(兵曹參知) 및 참의(參議) 등으로 임명되었다. 조금 뒤에 강원관찰사(江原觀察使)가 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부임은 하지 않았다. 그때 새로 병란을 겪고 중국 장병이 초도(椒島)에 주둔하였으므로 나라에 걱정이 많았다. 조정에서는 접대할 사람을 선정하였는데 공이 접반사(接伴使)가 되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지 겨우 열흘 만에 특별히 남원부사(南原府使)로 임명되었다. 
 

기사년(1629) 여름에 승평 김공이 좌의정이 되고 나만갑이 조정의 논의를 제멋대로 하여 이조판서를 불안에 떨게 하였다. 이에 왕께 아뢰니 왕이 진노해서 나만갑을 유배 보내고 신풍(新豊) 장유(張維)와 기평(杞平) 유백증(兪伯曾)을 모두 외직으로 임명하였다. 공이 남원으로 가게 된 것도 또한 이 때문이었다.
 

당시 남쪽은 추택(萑澤)의 수림(藪林)이 되어 죽고 죽이는 일이 횡행하였으나 사람들은 감히 누구의 짓이라고 말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공이 처음에 와서 마치 모르고 있는 듯 가장하고, 가만히 무인과 아전 중에서 계략이 있는 자를 심복으로 삼아 적도(賊徒)의 상황을 탐색하였다. 그 무리들이 모여서 술 마시는 것을 알고 덮쳐서 포박하니 끌려와서 항복한 자가 전후로 67명이나 되었다. 괴수인 백룡(白龍)이란 놈이 가만히 공의 숙소를 탐지하여 밤에 담을 넘어 들어와서 창문을 통해 칼날을 넣어 찌르고 갔는데 그는 머리를 찌른 줄 알았지만 발을 찔렀다. 공은 이미 먼저 경계를 해서 문고리를 단속했기에 발도 또한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이 일로 인해 더욱 공의 지혜로움을 알게 되었다.
 

이 일이 있기 전에 공은 공로가 있어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금주군(錦洲君)으로 봉해졌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정의 논의가 체직을 허락하였으니 공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아올 때에 남원부의 사람들이 무기를 꺼내서 공의 행로를 호위해주려고 청하니, 공은 말하기를 “걱정할 것 없다. 반드시 나를 범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드디어 거절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백룡이 잡혀서 죽으니 남원 일대와 그 인접한 고을이 편안하여 경계함이 없게 되었다. 이것이 다 공의 힘이었다.
 

그 후에 도헌(都憲)이 되었다가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참판(參判),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다. 피로한 탓으로 병이 들어 인조 10년 임신년(1632) 6월 27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37세였다. 처음에는 양주(楊州) 달거리(達去里)에 장사지냈다가 풍수가의 말을 듣고 무인년 10월 25일에 김포(金浦) 마산면(馬山面) 두모곡(杜毛谷)의 을향(乙向)의 언덕으로 장지를 옮겼으니 선영이 있는 곳이었다.
 

공은 풍모가 단아하고 풍채가 빛났다. 양친을 섬김에 효성이 독실하였고 사랑과 공경함을 모두 갖추었다. 관아에 거처해서는 사사로이 재물을 쌓지 않았고 친구들과는 신의가 있었다. 성품은 청렴하고 강건하였으며 평소에 이익을 도모하지 않았다. 방에는 도서를 두고서 한가롭게 자적하니 비록 재상의 자리에 올랐어도 벼슬하기 이전의 모습과 같이 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는 절조가 있고 간언을 올릴 때에는 약석(藥石)이 되었다. 옥당에 있으면서 왕을 모시고 경연을 할 때에 경의(經義)를 강하는데 토론을 통해 의미를 분명히 밝히고 풍유를 통해 왕을 깨우치니 유익한 것이 많아서 왕도 또한 경청하였다. 임신년(1632) 봄에는 부제학(副提學)으로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초심을 더욱 연마하여 구습(舊習)을 통렬하게 제거하며 본원을 맑게 하여,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증대시키는 것으로 주를 삼았다. 
 

유신(儒臣)이 언론(言論)을 펼치다가 쫓겨나는 것, 물건을 매매하여 이익을 독점하고 원한을 사는 것, 공신들이 땅과 노비를 널리 점거하는 것, 대군의 집이 정해진 규보보다 큰 것, 이런 것들은 모두 당시의 폐단이었는데, 공이 이들을 빠짐없이 풍자하니 당시 여론이 칭찬하였다. 대사간이 되어 간언하는 차자에도 또한 직언이 많았으나 문득 원고를 버리고 보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하는 것이 없다. 만약에 더 오래 살아 그의 재능과 지혜를 발휘했다면 세상에 시행하는 것들이 반드시 세도(世道)를 크게 변화시켰을 것이다. 갑자기 이렇게 일찍 죽으니 사람들은 모두 애석히 여겼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공이 스스로 밝은 성대를 만나서 신화(新化)를 도우고 훈공(勳功)과 현능(賢能)으로써 다 같이 협찬하려 하였는데, 일이 어긋나서 뜻을 이루지 못했고, 왕의 대우는 융숭하였으나 임용은 합당하지 못한 일이니 이것이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공의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양주(楊州) 윤씨(尹氏)로 강원관찰사(江原觀察使)를 지냈고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안국(安國)의 따님이고 경기좌도(京畿左道) 수운판관(水運判官)을 지냈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된 응상(應商)의 손녀이다. 성품이 명민하고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다. 남을 대접함에는 사랑으로 하였으며 아랫사람을 대하여는 특별히 생각하였다. 부덕(婦德)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음식을 장만하는데 양식의 유무(有無)를 공에게 말하지 않았으며 자녀를 교육하는데 고인(古人)의 뜻을 받들어 시행하였다. 기축년 3월 10일에 양주(楊州) 농사(農舍)에서 돌아가시니 공보다 1년 뒤에 나서 공보다 17년 뒤에 돌아가신 것이다. 임시로 장례를 치렀다가 경인년 9월 9일에 합장하였다. 
 

4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 세규(世圭)는 일찍 죽었고, 차남 세견(世堅)은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지금은 장령(掌令)으로 있으며, 셋째 세후(世垕)는 지행(志行)이 있었으나 상중(喪中)에 요절하였고, 넷째는 세당(世堂)이다. 딸은 사인(士人) 이영휘(李永輝)에게 출가했다. 세규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태일(泰一)은 요절하여 세견의 차남 태소(泰素)를 들여 후사를 이었고, 딸들은 각각 이지탁(李之鐸)ㆍ조창운(趙昌耘)에게 출가하였다. 세견은 2남 중에 장남은 태상(泰尙)이고 진사(進士)이며 차남은 출계(出系)한 태소이다. 세후는 아들이 없고 세당의 2남은 어리다. 이영휘의 2남 1녀도 다 어리다. 장령(掌令) 군은 내가 공과 교유해서 형제의 의가 있다고 해서 비석을 세우는 데 나에게 묘비문을 청하니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육신이 장수(長壽)를 해도 이름이 장수하지 못한다면,

이런 장수는 진정한 장수가 아니라네.

육신이 장수하지 못하더라도 이름이 장수한다면,

이런 장수는 영원하리라.

공이 이룩한 것을 절로 전해질 것이니,

어찌 무언가에 기대어 불후하리오?
자손이 우수하고 훌륭하니,
하늘의 보답은 후손에게 있으리라.
 

                                                                       백헌     이경석(李景奭)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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