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작성자 대종중
ㆍ작성일 2016-02-05 (금) 16:42
ㆍ분 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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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공(文孝公) 만휴당(晩休堂) 휘(諱) 태상(泰尙) 신도비명

공의 휘(諱)는 태상(泰尙)이요, 자(字)는 사행(士行)이며, 성은 박씨니, 그 선계는 나주(羅州)의 반남현(潘南縣) 사람이다. 고려 말의 상충(尙衷)은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으로서 문덕과 충절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반남선생’이라 하였는데, 뒤에 문정(文正)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증조부 동선(東善)은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조부 정(炡)은 정사공신(靖社功臣) 금주군(錦洲君)으로서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는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선고(先考) 세견(世堅)은 승정원우승지(承政院右承旨)로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 정부인(貞夫人) 해주 최씨는 판관(判官) 연(渷)의 따님이고, 대사헌(大司憲) 유원(有源)의 손녀이다.

 

공은 인조 14년 병자년(1636) 12월 5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병이 잦았다. 10세 때 비로소 책을 읽었지만, 이해력이 뛰어나 스승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며, 학문이 나날이 발전하여 갑오년(1654)에 진사가 되었다. 갑진년(1664)에 모친상을 당하자 초상을 치를 때에 예를 다하여 향당에서 칭송하였다. 기유년(1669)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신해년(1671)에 정시(庭試)에서 장원이 되었는데, 이름을 개봉하자 고시관들이 인재를 얻었다고 서로 축하하였다. 관례에 따라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는데, 다시 2일 만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아직 창방(唱榜)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제수된 것은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공은 너무 급하게 관직을 내렸다는 혐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부임하지 않았다.

 

임자년(1672) 여름에는 전적(典籍)과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정언(正言)으로 전임되었다. 가을에 호서 지방에 과거의 시관(試官)이 되었는데, 과장(科場)을 여는 날에 화약고(火藥庫)에 불이 났다고 급히 외치는 자가 있었다. 뜰에 가득한 사람들이 놀라 술렁거리고 함께 자리하고 있던 자들도 일어나 살피고자 하였다. 공이 저지하며 말하기를, “이는 과장을 어지럽히려고 일을 벌인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제생들이 우르르 일어나 문을 열어 불을 피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만약 불이 염초(焰硝)에 붙었다면 사람들이 이미 불길 속에 있을 것인데 피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제생들이 서로 돌아보며 거짓임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이후 와언(訛言)을 퍼뜨린 자를 찾아내어 죄를 주었다.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다. 궁궐 안 사람 중에 신령에게 기도하고 제사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법대로 잡아 다스리니 부중(府中)이 엄숙해졌다.

 

계축년(1673) 봄에 다시 병조좌랑으로부터 정언(正言)이 되었다. 한번은 임금 앞에서 일을 논할 때에 말이 몹시 강직하였으므로 현종이 매우 노하였는데, 공은 오히려 강하게 간쟁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근래 대신들은 한 번 온당치 않다는 하교를 받들면 대번에 인피하고 굳게 간쟁하지 못하는데, 오늘 박태상은 참으로 간신(諫臣)의 체모를 얻었으니, 의당 너그러이 용납하셔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의 노여움이 마침내 풀렸다. 정태화가 물러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성상께서 거듭 진노하셨는데도 사기(辭氣)가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으니, 박정언(朴正言)은 참으로 두려워할 만한 자이다.”라고 하였다. 체직되어 병조좌랑이 되었다가 지평(持平)으로 옮겼다. 재이(災異)로 인해 동료와 함께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일곱 가지 일로 진계(陳戒)하였다. 가을에 홍문관에 뽑혀 들어가 부수찬(副修撰)이 되고 교리(校理)에 올랐다. 이어 북평사(北評事)로 나갔는데, 군사와 백성에게 피해를 주는 변방 고을의 고질적인 폐습을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개정하였다.

 

갑인년(1674) 가을에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들어가서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을묘년(1675) 봄에는 호남에 암행어사로 갔다가 수찬(修撰)으로 돌아왔다. 여름에 다시 부수찬에 제수되었다. 상소하여 득실을 논하였는데 당시의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면직되었다. 가을에 사예(司藝)로 돌아와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병진년(1676) 여름에 또 암행어사로서 관북지방을 살폈다. 가을에는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가서 온화함과 간이함으로 행정을 하였고, 백성들을 가까이하여 그들의 뜻이 통하도록 힘썼다. 옛 관습에 해안가의 주현(州縣)에 세미(稅米)를 싣고 가는 배가 관내에서 전복된 것이 있으면, 그 쌀을 건져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을에 그것을 상환시켰다. 그런데 지방관이 모두 태만해서 제때 쌀을 건져내지 않고 물속에서 여러 날을 방치하자, 쌀이 부패하여 먹지 못하게 되어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였다. 공이 홍주로 간 이듬해에 익산(益山)의 세미배가 관내에 와서 전복이 되었다. 공은 보고를 듣고 즉시 100여 리를 달려가 해안에 이르렀는데 해가 이미 저문 뒤였다. 달빛에 의지하여 돛을 올리고 바닷길로 또 20여 리를 가서 배가 전복된 곳에 다다랐다. 그리고는 수부(水夫)에게 명하여 뱃머리를 여러 방향으로 나누고 밧줄을 묶어 등에 지게 하여 침몰된 배를 끌어냈다. 배를 끌어내고 보니 쌀가마가 다 온전하였다. 이를 옮겨 실어 해안에 가져다가 볕에 말리니 쌀이 그다지 상하지 않았다. 그해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이 모두 죽을까 겁내며 다투어서 가져갔으니, 이로 인해서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다.

 

정사년(1677) 가을에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사직하고 돌아왔다. 무오년(1678)에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 임명되었다. 기미년(1679)에 종부시정(宗簿寺正)으로 옮겼고, 또 사예(司藝)ㆍ예빈(禮賓)ㆍ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역임하였다. 겨울에 중시(重試)에 발탁이 되어 통정(通政)으로 올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임명되었다가 좌승지(左承旨)로 옮겼다.

 

경신년(1680) 봄에는 왕이 시정(時政)을 개기(改紀)할 때 이조판서 이원정(李元禎)이 제일 먼저 죄를 받게 되었다. 비망기에는, “태아(太阿)를 거꾸로 쥐었다.”란 어구가 있었다. 동료가 왕께 고치기를 청하자 공이 연명(連名)을 허락하였다. 또 왕은 재상 김수항(金壽恒)을 죄에 얽어 넣으려는 대신(臺臣)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공이 나아가서 말하기를, “이원정은 실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왕의 명령이 준엄하셨으니, 다만 왕의 뜻을 맞추어서 사사로운 뜻만을 이루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다시 캐물을 단서도 없으니, 대신을 체포하는 것은 마침내 후폐(後弊)를 남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왕이 한 때의 감정으로 눈앞의 쾌함만 취함은 부당합니다.”라고 하니 왕은 수긍하였다. 그러고 물러났는데 편견을 지닌 자들이, 이원정을 위해 복역(覆逆)하는 계사를 올리는 데에 참여한 것이 부당하였고, 재상 김수항을 무함한 무리들은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끊임없이 비난하였다.

 

여름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다. 그때에 재상 정재숭(鄭載崇)이 전장(銓長)이 되었는데, 하루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우리들이 정사를 새롭게 시작하는 때에 물정을 잘 몰라서 주의(注擬)하는 사이에 요직에 있는 사람들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많았으니 장차 어찌해야 하는가?” 공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만 공평한 마음으로 공의(公議)를 잡아서 남이 무능하다고 하면 물러나면 그만입니다. 그 외의 거짓에 관해서는 자연스럽게 아는 자는 알 것이니, 어찌 서투른 일을 가지고 억지로 조정해서 사람들에게 부합하기를 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재상 정재숭이 기뻐하면서 “나의 뜻도 또한 그러하오.”라고 말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훈척들이 모두 공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가을에 형조참의(刑曹參議)로 교체되고 병조참지(兵曹參知)ㆍ참의(參議)로 전임되었다.

 

그해 겨울에 인경왕비(仁敬王妃)가 승하하였는데, 봄에 예조의 보좌관 자리에 결원이 생겼다. 영의정 김수항이 공으로 하여금 잠시 예조의 일을 보도록 하였다. 그때에 왕은 창경궁에 계시고 빈전(殯殿)은 경덕궁에 있었다. 왕이 아직 두창(痘瘡)을 치르지 않았는데 상사(喪事)가 난 빌미가 두창이었으므로 두 궁이 서로 소통할 수 없었다. 이에 예제를 변통할 것이 많았는데, 공이 합당하게 조처하여 정리와 형식에 부족한 점이 없었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영의정은 깊이 감복해서 “본래부터 박영공(朴令公)이 문아(文雅)에 뛰어난 줄은 알았지만, 그의 재의(才議)가 이러한 줄은 생각도 못하였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예조의 본관이 되었다가 곧 대사간(大司諫)으로 옮겼는데, 병으로 다시 예조에 돌아왔다.

 

신유년(1681) 봄에 이조참의로 임명되었으나 공이 인사와 전형을 즐기지 않아 다섯 차례나 사퇴하는 상소를 하고 재차 부름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끝내 허락하지 않아 할 수 없이 그 직무에 나아갔는데, 권세의 다툼을 막아 벼슬길을 깨끗하게 하였다.

 

예전에 공이 이조의 인사를 담당하였을 때, 일을 처리하는 자가 공이 오기 전에 외척들을 끌어들이려고 하다가 실패하였다. 그런데 그가 또 외척의 자식을 추천하여 먼저 전랑(銓郞)에게 말하니 공이 이것을 제지하였다. 그 사람은 그때 언관으로 있었는데, 드디어 경신년(1680)에 있었던 정원의 일을 거론하여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는 내용으로 공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왕은 그것이 거짓임 알고서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또한 왕은 공이 사표를 낼 때에는 비답을 내려 저지시켰으나, 공은 기어이 사퇴해서 이에 교체되었다.

 

대개 경신년 초에 ‘좌우만 돌아보는 자’로 하여금 그 상황에 처하게 하였다면 바로 이 기회를 타서 투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공의 진술한 바는, 사리를 곧게 논술하고 시비를 바로잡아 위로는 인군의 덕을 규정하는데 명백하고 화평해서 당론에는 치우친 바가 없었다. 서로 다투던 그때에 공처럼 아정(雅正)하고 식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이것을 분별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심을 가지고 이와 같이 헐뜯으니, 사람들은 모두 놀랐던 것이다. 공은 홀로 “당시에 왕께서 노하심이 엄중하여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앞자리에서 두려워하였고, 기주(記注)는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빠뜨렸다. 그래서 널리 들은 것이 실상과는 어긋났으니, 이런 반박이 있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라고 말하며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여름에는 다시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었다. 겨울에는 인천부사(仁川府使)로 임명되었으나, 아버지의 병환으로 부임은 하지 못하였다.

 

임술년(1682)에 예조참의(禮曹參議)ㆍ판결사(判決事)ㆍ대사성 겸승문원부제조(大司成兼承文院副提調)를 역임하였다. 겨울에 대사간이 되었다가 병으로 체직되었다. 계해년(1683) 봄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을축년(1685)에 탈상하고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임명되었다가 병조로 옮겼다. 왕이 국자감의 장관은 많은 선비들의 모범이므로 그 선발을 신중히 하고자 하여 대신에게 선택하여 의망(擬望)하도록 특명을 내리자, 대신이 공을 선택하여 올렸다. 이에 대사성에 다시 제수되었다.

 

여름에는 평안관찰사(平安觀察使)로 나갔다. 하직 인사를 하는 날에 왕이 인견하여 이르기를, “경이 오래도록 근시(近侍)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경의 마음가짐이 공평함을 잘 알고 있으니, 힘쓰라.”라고 하였다. 대개 공이 3년 사이에 열 번 승정원에 들어갔는데 이치에 근거하고 법을 지켜 치밀하고 간절하게 아뢰었고, 강연(講筵)에 출입하여 크게 보익한 것이 많았다. 이에 왕이 그 현명함을 알았으므로 이와 같이 특별히 하교하신 것이었다. 관서 지방은 중국을 왕래하는 길이므로 으레 금을 내어 상인에게 빌려 주고 이문을 취하여 그것을 공용(公用)에 충당하였다. 관리가 날마다 문서를 끼고 계산하는 것이 이득과 재물이 불어나고 줄어들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공이 항상 이마를 찡그리며 말하기를, “어찌 사대부로서 이런 거간꾼 노릇이나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겨울에 청나라 사신이 와서 변방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오는 것에 대해 문책하였다. 조정에서는 부신(符信)도 없이 공을 불러 조사하여 처벌하고자 하였다.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번신(藩臣)을 종이쪽지 하나로 부르니, 만약 변고가 있다면 어찌 낭패가 될 일이 없겠는가?”라고 하고 공은 곧장 관할지의 경계로 나가서는 임지를 함부로 떠나서는 안 됨을 조정에 전달하였다. 이에 조정이 비로소 선전관(宣傳官)을 보내 부신을 가지고 가서 불러오게 하였다. 부신을 맞추어 보고 나서 공이 차고 있는 것을 거두고자 하니, 공이 손을 들어 저지하며 말하기를, “혹 나를 체포하라는 교지(敎旨)가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나는 스스로 번신의 자격으로 부름에 나아가야 하는데, 이 부신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부신을 가진 자가 주저하며 물러났다. 그가 일에 임하여 자세히 살피는 것이 이와 같았다. 감영을 떠나는 날에 사인(士人)과 부녀자들이 달려 나와 수레를 에워싸고 말하기를, “우리 부모를 잃었다.”라고 하였고, 심지어 성곽에 올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며 우는 이들도 있었다. 공이 부임한 지 겨우 5개월인데 은혜와 사랑으로 인심을 감복시킨 것이 이와 같았다. 청나라 사신이 돌아가자 즉시 이조참판에 제수되었고 얼마 안 되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병인년(1686)과 정묘년(1687) 2년 동안에 대사성 겸비변사유사당상(大司成兼備邊司有司堂上), 동지경연(同知經筳), 이조ㆍ호조의 참판, 대사헌, 도승지 겸예문제학(都承旨兼藝文提學), 동지성균(同知成均), 공조ㆍ예조ㆍ병조의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공이 내직에 있음을 꺼려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 북도에서는 매년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이리저리 떠돌며 생업을 잃은 자가 많았다. 공은 그곳에 부임하여 세금은 줄이고 부역은 없앴으며, 백성의 이익은 이루고 백성들의 해로움은 제거하는 등 곤궁한 자들을 두루 구휼하였다.

 

무진년(1688) 가을에도 또 흉년이 들었다. 공은 백성이 크게 곤궁하게 될 줄을 알고서 미리 주군(州郡)의 백성을 경계해서 절약하고 식량을 축적하도록 하였다. 또한 여러 읍의 창고와 민가의 호수를 계산하여 식구대로 양곡을 주어 보릿고개를 넘기게 하였다. 그리고 부족한 것은 영남 지방 중 바닷가 근처에 있는 군읍(郡邑)과 관서 지방 인근의 여러 군읍에서 곡식을 옮겨 줄 것을 요청하여 3만여 섬을 얻었다. 이 곡식을 가지고 백성들을 골고루 먹이니, 사람들은 흉년의 근심을 잊게 되었다.

 

기사년(1689) 여름에는 임기가 다 되어 들어와서 동지중추(同知中樞)로 임명되었다가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전임하였다. 가을에는 호조로 옮겼다. 겨울에는 조위사(弔尉使)로서 연경에 갔는데, 행장이 단출하였다. 여러 서리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재상의 마음은 우리들 모두가 알고 있으니, 공처럼 청렴하고 검약한 이는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

 

경오년(1690) 봄에 귀국해서 복명하고 다시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었다. 공은 기사년(1689)에 내직으로 들어온 뒤로는 벼슬하기를 즐기지 아니하고 임명을 받을 때마다 문득 병이 있다고 해서 사양을 하였다. 그러나 가을에 다시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갔다. 이전의 부사가 모두 게으름을 피우고 일을 하지 않아 송사가 10년이나 밀려있었다. 공은 그것을 부지런히 처결해서 쌓여 있는 문서가 모두 없어졌다. 공의 관할 내에는 세도 있는 호족들의 전장(田莊)이 많이 있어서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는데, 공이 모조리 정리하여 다스리니 간사하고 포악한 자가 자취를 감추고 힘없고 약한 자들이 살 곳을 얻게 되어 고을 전체가 잘 다스려졌다. 그리고 여가로는 매죽(梅竹)을 가꾸고 그 사이에서 읊조리며 유연하게 세상을 잊은 듯하였다. 3년 만에 이임해가니 읍인들이 비석을 세워 그 덕을 칭송하였다.

 

그리고 돌아온 뒤에 다시는 도성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선영 아래 집을 짓고서 계부(季父) 서계공(西溪公, 박세당(朴世堂))과 함께 아침저녁으로 지팡이를 짚고 서로 추종하면서 여생을 보내려하였다.

 

계유년(1693)에 황해관찰사(黃海觀察使)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갑술년(1694) 여름에는 왕이 또 조정의 관리들을 모두 배척하고, 옛 관료들을 불러들였는데, 특히 공은 이조참판 겸동지의금(吏曹參判兼同知義禁)으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에 옛 관료 대부분이 도성 밖에 있어 조정이 거의 비어있었다. 왕은 공이 오는 지를 하루에도 서너 차례나 물으니 공은 부득이 성내로 들어가서 임명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조판서 겸동지경연 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세자우빈객(刑曹判書兼同知經筵成均館事弘文館提學世子右賓客)으로 승진하였다가 조금 뒤에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으로 임명되어 중궁복위(中宮復位)의 옥책문(玉冊文)을 지어 올렸다.

 

처음에 중궁(中宮, 인현왕후 민비(閔妃))이 복위될 때 재상들이 도성 밖에 있었다. 예조에서는 판서(判書)가 없었는데, 왕이 급작스럽게 명령을 내리니 예의(禮儀)에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병조판서 서문중(徐文重)이 대신과 예조판서가 입조한 뒤에 절차를 강정(講定)하자고 청하였으니, 대례(大禮)를 신중하게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공을 불러 의론하고 승정원(承政院)으로부터 이미 먼저 이 뜻을 왕에게 올렸다. 이때 수상(首相) 남구만(南九萬) 공과 서공을 배제하려는 자가 유생 박상경(朴尙絅)을 시켜서 상소하였고, 대관(臺官) 정호(鄭澔)와 함께 연이어 두 재상을 논척하고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공도 연좌되었는데, 모함하는 말이 극히 위험하였다. 공은 도성 밖으로 나와서 상소를 올리고 벌주기를 기다리니, 왕이 너그럽게 용서하여 바로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었다. 그때 책례(冊禮)할 기일이 급박하여 독실한 유시(諭示)로써 돌아오기를 재촉하였기 때문에 공은 어쩔 수없이 일을 보았던 것이다.

 

가을에 우참찬 겸동지경연춘추관사(右參贊兼同知經筵春秋館事)를 제수하였다. 겨울에 좌참찬(左參贊), 예조판서 겸지의금부사(禮曹判書兼知義禁府事)로 전임하였다.

 

을해년(1695) 봄에 왕세자의 입학례(入學禮)가 있었는데, 공이 대제학으로서 참여하였으니 이는 옛날 박사(博士)의 직임에 해당되었다. 세자가 또 관례(冠禮)를 행하였는데, 공은 예조판서로서 찬관(贊冠)이 되었다. 또 존명(尊名)을 정함에 그 예를 잘 수행하여 여러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니, 조정의 관료들이 존경하고 우러러보았다.

 

여름에는 대사헌을 거쳐서 좌참찬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죄적(罪籍)에 있는 자가 매우 많았다. 대신(大臣)들이 조정에서 회의하여 석방하기를 청하였으나, 대신(臺臣)들이 수긍하지 않고 모두 회피하여 논의가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명(李師命)ㆍ이상(李翔)을 부학(副學)으로 복관시켰다. 그러나 오도일(吳道一)은 이사명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하고, 수찬(修撰) 민진형(閔震炯)은 이상을 신원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모두 대간(臺諫)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때 공이 구언(求言)으로 인하여 상소를 올렸다. “대신(大臣)과 대신(臺臣)의 논의가 분산되어 있으니 조속히 조처를 내리시어 생각과 뜻이 서로 믿음을 주고 가부간에 서로 이해하여 조화롭게 진정되도록 노력함으로써 인심을 감복시키소서. 이사명과 이상의 일은 애당초 명백하게 분변할 단서가 없었는데 지레 먼저 복관시켰으니 어찌 시비의 의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러한 일들에 대해 명백한 하교를 내리신 적이 없습니다. 상벌이 얼마나 큰 권한인데 스스로 총람하지 않으시고 다만 관습만 따라 행하십니까? 이러고서도 어찌 무너진 기강을 떨쳐 세우고 세인(世人)들이 권려(勸勵)할 바를 알게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왕이 비답(批答)을 내린 것이 수십 줄이었는데, ‘스스로 총람하지 못한 것은 실로 나의 병’이라 교시하여 두 사람을 복관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었다.

 

가을에는 예조판서로 옮겼고 왕의 약시중을 든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공조판서를 거쳐서 다시 예조로 돌아왔다.

 

병자년(1696) 봄에는 이조판서로 임명되어 인사 정책을 할 때에 공평하게 처리하니 청탁하는 일이 없어졌다. 그해 흉년이 들어 유민들이 서울로 몰려든 것이 무려 수만 명이나 되었다. 조정에서는 동서의 도성 밖에 구호장(救護場)을 설치하여 나누어 진휼하려고 재신(宰臣)을 선출해서 관장하게 하였는데, 공은 성 동쪽을 주관하였다. 공은 매일 그 진휼장에 가서 나누어 먹이는 것을 친히 감독하였는데, 불쌍히 여기고 슬퍼함이 지성에서 나왔다. 굶주린 백성들은 공을 보려고 와서는 모두 앞에 모여들어 손을 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의 자비로 구휼하심이 이러하오니, 비록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공은 계해년(1683)부터 상을 치르다 병을 얻었는데, 그 후에 사신으로 외국을 다녀오며 또한 몸이 더욱 상하게 되었다. 이때에 와서 초췌함이 더욱 심하여 심신이 매우 피로하였다. 집안사람들이 걱정하여 일을 줄이고 조리에 힘쓰라고 권하였으나 공은 탄식하며 말하였다. “나의 병이 위태로운 줄 어찌 알지 못하겠느냐? 다만 국가는 불행하게 여러 번 변고를 당하였는데도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은 오직 물러나서 스스로를 보존하기만 생각하고 있다. 내가 금년에 직위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온 몸을 바쳐 직무로 죽는 것이 오히려 나의 본분이다.” 그리고 갑자기 가벼운 감기가 더해져 더욱 괴롭게 되었다. 여러 번 상소하여 사퇴를 요청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병중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상소를 올려 구휼할 방도를 논하였다. 그래서 무릇 혼란스러운 꿈속의 말까지도 모두 나라를 근심해서 시속(時俗)을 걱정하는 일이었다. 왕은 내관을 보내어 문병을 하고 어찬을 보내셨다. 대신이 입대(入對)하여 전조(銓曹)의 업무가 비게 되었다는 이유로 공의 직임을 우선 해임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사람을 보내 병을 살피게 하였는데 조석을 버티기 어렵다고 하였다. 지금 제법 여러 날이 지났으니 차도가 있지 않겠는가?” 대신이 이미 위독하다고 아뢰자 왕이 근심스럽게 여겼으니, 몹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여기에 이르렀다. 체직되어 형조 판서로 옮겼다가 또 체직되어 부호군에 붙여졌다. 마침내 5월7일에 건덕방(建德坊)에 있는 집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61세였다.

 

부음을 알리니, 왕은 이틀 동안 조회를 보지 않으시고, 의례(儀例)대로 부전(賻典)을 하고 조제(肇祭)를 하였으며, 따로 유사를 시켜서 상구(喪具)를 갖추게 하였다. 그리고 왕은 특별히 후하게 장례를 치르게 하면서 “나의 진도(震悼)하고 진휼(軫恤)하는 뜻을 표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왕세자 또한 궁관을 보내와서 조문하고 관 1구(具)를 택하여 내렸다. 위로는 조정 관료에서 아래로는 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슬퍼하였다. 이해 7월 6일에 양주(楊州) 수락산(水落山)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공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순수하며 차분하고 조용하였으며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까웠다. 용의(容儀)는 단아하고 엄정하였으며 말에 거칠고 속된 기가 없었다. 효도와 우애의 행실은 더욱 독실하고 지극하였다. 예전에 승지공(承旨公)이 만년에 풍병(風病)이 들어 몸을 침석에 맡긴 지가 10년이나 되었다. 공은 그 동안에 근무시간 외에는 곁을 떠난 적이 없이 간호하며 응대하기를 시종 한결같이 하였으며, 병이 조금이라도 도지면 하룻밤 사이에 안색이 금방 까맣게 변하였다. 아우 좌랑공(佐郞公) 태소(泰素)와는 서로 지기(知己)처럼 대하였다. 그가 죽게 되자 애통해서 말하기를, “내 몸의 반을 잃었으니, 내 어찌 살까?”라고 하였는데, 조카들을 자기의 소생처럼 돌보며 보기만 하면 문득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외가에서 염병(染病)으로 상이 자주 발생하자 친척이나 친구도 감히 가보지 못하였는데, 공은 홀로 의약으로부터 염빈(殮殯)하는 데까지 마음을 다해서 구호하였다. 또한 홀로 어린 종 몇 명과 더불어 한 달 여 만에 다섯 번이나 장사를 지내니, 사람들이 모두 어려운 일이라고 해서 그 의리에 감복하였다.

 

본성이 준엄하고 결백하였으며 진취하는 데에 더욱 신중을 기하였다. 일찍이 “사람의 부덕은 조급한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천만의 죄과가 모두 이에서 나온다.”라고 하였다. 남이 경쟁하는 습성을 보면 마치 자신을 더럽힐 듯 여겼기 때문에 교제도 드물게 하였다. 공이 퇴근해서는 문득 쓸고 조용히 앉아서 오직 서사(書史)만을 스스로 즐기니, 고담(枯淡)하다고 나무라는 자도 있었다. 그러자 공은 “고담한 것도 또한 어려운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집이 본래 매우 가난하여 출사하기 전에는 향촌에 살았다. 몸소 천한 일을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감당하지 못하였지만 공은 태연하게 처리하였고, 고관이 되어서도 이러한 태도는 변하지는 않았다. 작고한 뒤에는 남은 양식이 없고 모아 둔 의복도 없어서 염장(殮葬)할 때 들어온 부의만으로 충당하니, 조문객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공은 조정에 들어와서 청요직(淸要職)과 화현직(華顯職)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뭇사람들의 중망이 쏠렸지만 공은 번번이 공손하게 물러나 사양하여 잘잘못이나 총욕(寵辱)을 마음에 담아 둔 적이 없었다.

 

수십 년 이래 당론(黨論)이 갈수록 심해지고 서로 배척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었다. 공은 분수를 생각하고 정도를 지켜 굽히거나 흔들린 적이 없었다. 매양 일을 논할 때마다 반드시 임금의 덕을 규계하고 간언함으로써 잘못을 바로잡는 것을 우선하니 당시의 청의(淸議)가 의지하여 중히 여겼다. 공은 기국과 도량이 바르고 단정하였으며 말하고 웃는 것도 절도가 있었는데 마음속은 화락하고 평이하여 경계를 두지 않았다. 후배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주기를 좋아하여 매양 고인의 언행으로써 정성껏 지도하였다.

 

시문(詩文)을 지을 때는 사리가 통창하고 말은 간결하게 하였으며 허언과 과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더욱이 감식하는데 특장이 있어서 당시의 후배들이 배운 바를 다투어 질문을 하였는데, 그의 제평(題評)이 합당하여 각기 스스로 경복하였다. 시험관이 되어 글을 취할 때에는 오직 섬달(贍達)하고 전아함만을 추구하였고, 화려하게 겉을 수식하는 것은 배척하였다. 근세에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고시관 중에서 오직 공만큼 공정하고 사심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 공은 비록 과거로서 입신하였으나, 어려서부터 경서를 연구해서 깊은 조예가 있었다. 공의 장인인 창강(滄江) 조속(趙涑) 공은 사람을 칭찬하는 일이 적었으나, 유독 공만은 사랑하였다. 그래서 공이 온다는 말만 들으면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만나서는, “이 사람은 대유(大儒)니, 나이가 적다고 해서 홀대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였다. 재상 김석주(金錫冑) 공은 일찍이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며, “지금 사람들이 예를 아는 선비를 거론함에 반드시 속세를 떠난 은사를 말하지만, 나의 소견으로는 학식이 넓고 예문에 깊은 이로 박 아무개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공은 항상 말하기를, “사람은 성심(誠心)이 없으면 만사를 이룰 수가 없다.”라고 하면서 그로 인하여 재호(齋號)는 ‘존성(存誠)’이라고 하였고, 또 아호(雅號)는 ‘만휴당(晩休堂)’이라고 하였다. 정부인(貞夫人) 풍양 조씨는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 필순(弼純)은 참봉(參奉)이고, 차남은 필건(弼健)이다. 장녀는 부사(府使) 신확(申瓁)에게, 차녀는 시직(侍直) 이수함(李壽涵)에게, 그 다음은 사인(士人) 이병철(李秉哲)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필순의 2남 3녀 중 장남은 사임(師任)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필건의 두 아들 역시 모두 어리다. 신확의 2남 3녀 중 아들은 석하(錫夏)ㆍ상하(翔夏) 이고, 사위는 조해수(趙海壽)ㆍ이헌장(李獻章)ㆍ이진순(李眞淳)이다. 이수함의 외동딸은 윤지온(尹志溫)에게 출가하였다. 이병철의 2남 1녀는 어리다.

 

공은 우리 집과 연혼(連婚)을 해서 공이 약관(弱冠) 때에 우리 아버지께서 한번 보시고는 깊이 칭찬하며 호걸지사라고 지목하였다. 나도 또한 어려서부터 공의 부자ㆍ형제들과 교유하면서 크고 작은 일에 관계없이 모두 마음으로 친근하게 느끼고 흠모하였던 것이 노년까지 계속되었다. 공의 아우 사수가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공도 또한 이어서 돌아가셨다하니 애통한 심정이 가슴속에 절실하다. 필순 형제가 공의 사행을 기록한 행장을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내가 글을 잘 짓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부탁하는 것은 내가 공을 잘 알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인정상 거절할 수는 없어 삼가 그 행장을 간추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집안에서

보옥 같은 훌륭한 자질을 타고났네.

효도와 우애를 실천하고

좋은 절조 지키셨네.

문학으로 관직에 나아가고

아정(雅正)으로 스스로를 지키니

내외직을 역임하면서도

구차한 것 하나 없었네.

갈림길 많은 이 세상

평지도 있고 언덕도 있으나

조용하게 진심을 따를 뿐

붕당은 따르지 않았다네.

지위가 장관 되어서도

몸은 한사(寒士)와 같았으니

표리가 오직 한결같고

시종(始終)이 둘이 아니었다네.

나는 공의 덕을 흠앙하노니

오로지 성(誠)을 추구하여

그것으로 자호(自號)로 삼고

평생토록 실천하였다 할 만하네.

당(堂)처럼 높다란 이 무덤에

공의 의관 간직했으니

이와 같이 공을 명(銘)하여도

부끄러움 없으리

윤증(尹拯) 지음.

 

공의 휘(諱)는 태상(泰尙)이요, 자(字)는 사행(士行)이며, 성은 박씨니, 그 선계는 나주(羅州)의 반남현(潘南縣) 사람이다. 고려 말의 상충(尙衷)은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으로서 문덕과 충절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반남선생’이라 하였는데, 뒤에 문정(文正)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증조부 동선(東善)은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조부 정(炡)은 정사공신(靖社功臣) 금주군(錦洲君)으로서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는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선고(先考) 세견(世堅)은 승정원우승지(承政院右承旨)로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 정부인(貞夫人) 해주 최씨는 판관(判官) 연(渷)의 따님이고, 대사헌(大司憲) 유원(有源)의 손녀이다.

 

공은 인조 14년 병자년(1636) 12월 5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병이 잦았다. 10세 때 비로소 책을 읽었지만, 이해력이 뛰어나 스승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며, 학문이 나날이 발전하여 갑오년(1654)에 진사가 되었다. 갑진년(1664)에 모친상을 당하자 초상을 치를 때에 예를 다하여 향당에서 칭송하였다. 기유년(1669)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신해년(1671)에 정시(庭試)에서 장원이 되었는데, 이름을 개봉하자 고시관들이 인재를 얻었다고 서로 축하하였다. 관례에 따라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는데, 다시 2일 만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아직 창방(唱榜)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제수된 것은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공은 너무 급하게 관직을 내렸다는 혐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부임하지 않았다.

 

임자년(1672) 여름에는 전적(典籍)과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정언(正言)으로 전임되었다. 가을에 호서 지방에 과거의 시관(試官)이 되었는데, 과장(科場)을 여는 날에 화약고(火藥庫)에 불이 났다고 급히 외치는 자가 있었다. 뜰에 가득한 사람들이 놀라 술렁거리고 함께 자리하고 있던 자들도 일어나 살피고자 하였다. 공이 저지하며 말하기를, “이는 과장을 어지럽히려고 일을 벌인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제생들이 우르르 일어나 문을 열어 불을 피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만약 불이 염초(焰硝)에 붙었다면 사람들이 이미 불길 속에 있을 것인데 피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제생들이 서로 돌아보며 거짓임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이후 와언(訛言)을 퍼뜨린 자를 찾아내어 죄를 주었다.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다. 궁궐 안 사람 중에 신령에게 기도하고 제사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법대로 잡아 다스리니 부중(府中)이 엄숙해졌다.

 

계축년(1673) 봄에 다시 병조좌랑으로부터 정언(正言)이 되었다. 한번은 임금 앞에서 일을 논할 때에 말이 몹시 강직하였으므로 현종이 매우 노하였는데, 공은 오히려 강하게 간쟁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근래 대신들은 한 번 온당치 않다는 하교를 받들면 대번에 인피하고 굳게 간쟁하지 못하는데, 오늘 박태상은 참으로 간신(諫臣)의 체모를 얻었으니, 의당 너그러이 용납하셔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의 노여움이 마침내 풀렸다. 정태화가 물러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성상께서 거듭 진노하셨는데도 사기(辭氣)가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으니, 박정언(朴正言)은 참으로 두려워할 만한 자이다.”라고 하였다. 체직되어 병조좌랑이 되었다가 지평(持平)으로 옮겼다. 재이(災異)로 인해 동료와 함께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일곱 가지 일로 진계(陳戒)하였다. 가을에 홍문관에 뽑혀 들어가 부수찬(副修撰)이 되고 교리(校理)에 올랐다. 이어 북평사(北評事)로 나갔는데, 군사와 백성에게 피해를 주는 변방 고을의 고질적인 폐습을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개정하였다.

 

갑인년(1674) 가을에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들어가서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을묘년(1675) 봄에는 호남에 암행어사로 갔다가 수찬(修撰)으로 돌아왔다. 여름에 다시 부수찬에 제수되었다. 상소하여 득실을 논하였는데 당시의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면직되었다. 가을에 사예(司藝)로 돌아와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병진년(1676) 여름에 또 암행어사로서 관북지방을 살폈다. 가을에는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가서 온화함과 간이함으로 행정을 하였고, 백성들을 가까이하여 그들의 뜻이 통하도록 힘썼다. 옛 관습에 해안가의 주현(州縣)에 세미(稅米)를 싣고 가는 배가 관내에서 전복된 것이 있으면, 그 쌀을 건져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을에 그것을 상환시켰다. 그런데 지방관이 모두 태만해서 제때 쌀을 건져내지 않고 물속에서 여러 날을 방치하자, 쌀이 부패하여 먹지 못하게 되어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였다. 공이 홍주로 간 이듬해에 익산(益山)의 세미배가 관내에 와서 전복이 되었다. 공은 보고를 듣고 즉시 100여 리를 달려가 해안에 이르렀는데 해가 이미 저문 뒤였다. 달빛에 의지하여 돛을 올리고 바닷길로 또 20여 리를 가서 배가 전복된 곳에 다다랐다. 그리고는 수부(水夫)에게 명하여 뱃머리를 여러 방향으로 나누고 밧줄을 묶어 등에 지게 하여 침몰된 배를 끌어냈다. 배를 끌어내고 보니 쌀가마가 다 온전하였다. 이를 옮겨 실어 해안에 가져다가 볕에 말리니 쌀이 그다지 상하지 않았다. 그해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이 모두 죽을까 겁내며 다투어서 가져갔으니, 이로 인해서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다.

 

정사년(1677) 가을에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사직하고 돌아왔다. 무오년(1678)에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 임명되었다. 기미년(1679)에 종부시정(宗簿寺正)으로 옮겼고, 또 사예(司藝)ㆍ예빈(禮賓)ㆍ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역임하였다. 겨울에 중시(重試)에 발탁이 되어 통정(通政)으로 올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임명되었다가 좌승지(左承旨)로 옮겼다.

 

경신년(1680) 봄에는 왕이 시정(時政)을 개기(改紀)할 때 이조판서 이원정(李元禎)이 제일 먼저 죄를 받게 되었다. 비망기에는, “태아(太阿)를 거꾸로 쥐었다.”란 어구가 있었다. 동료가 왕께 고치기를 청하자 공이 연명(連名)을 허락하였다. 또 왕은 재상 김수항(金壽恒)을 죄에 얽어 넣으려는 대신(臺臣)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공이 나아가서 말하기를, “이원정은 실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왕의 명령이 준엄하셨으니, 다만 왕의 뜻을 맞추어서 사사로운 뜻만을 이루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다시 캐물을 단서도 없으니, 대신을 체포하는 것은 마침내 후폐(後弊)를 남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왕이 한 때의 감정으로 눈앞의 쾌함만 취함은 부당합니다.”라고 하니 왕은 수긍하였다. 그러고 물러났는데 편견을 지닌 자들이, 이원정을 위해 복역(覆逆)하는 계사를 올리는 데에 참여한 것이 부당하였고, 재상 김수항을 무함한 무리들은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끊임없이 비난하였다.

 

여름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다. 그때에 재상 정재숭(鄭載崇)이 전장(銓長)이 되었는데, 하루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우리들이 정사를 새롭게 시작하는 때에 물정을 잘 몰라서 주의(注擬)하는 사이에 요직에 있는 사람들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많았으니 장차 어찌해야 하는가?” 공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만 공평한 마음으로 공의(公議)를 잡아서 남이 무능하다고 하면 물러나면 그만입니다. 그 외의 거짓에 관해서는 자연스럽게 아는 자는 알 것이니, 어찌 서투른 일을 가지고 억지로 조정해서 사람들에게 부합하기를 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재상 정재숭이 기뻐하면서 “나의 뜻도 또한 그러하오.”라고 말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훈척들이 모두 공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가을에 형조참의(刑曹參議)로 교체되고 병조참지(兵曹參知)ㆍ참의(參議)로 전임되었다.

 

그해 겨울에 인경왕비(仁敬王妃)가 승하하였는데, 봄에 예조의 보좌관 자리에 결원이 생겼다. 영의정 김수항이 공으로 하여금 잠시 예조의 일을 보도록 하였다. 그때에 왕은 창경궁에 계시고 빈전(殯殿)은 경덕궁에 있었다. 왕이 아직 두창(痘瘡)을 치르지 않았는데 상사(喪事)가 난 빌미가 두창이었으므로 두 궁이 서로 소통할 수 없었다. 이에 예제를 변통할 것이 많았는데, 공이 합당하게 조처하여 정리와 형식에 부족한 점이 없었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영의정은 깊이 감복해서 “본래부터 박영공(朴令公)이 문아(文雅)에 뛰어난 줄은 알았지만, 그의 재의(才議)가 이러한 줄은 생각도 못하였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예조의 본관이 되었다가 곧 대사간(大司諫)으로 옮겼는데, 병으로 다시 예조에 돌아왔다.

 

신유년(1681) 봄에 이조참의로 임명되었으나 공이 인사와 전형을 즐기지 않아 다섯 차례나 사퇴하는 상소를 하고 재차 부름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끝내 허락하지 않아 할 수 없이 그 직무에 나아갔는데, 권세의 다툼을 막아 벼슬길을 깨끗하게 하였다.

 

예전에 공이 이조의 인사를 담당하였을 때, 일을 처리하는 자가 공이 오기 전에 외척들을 끌어들이려고 하다가 실패하였다. 그런데 그가 또 외척의 자식을 추천하여 먼저 전랑(銓郞)에게 말하니 공이 이것을 제지하였다. 그 사람은 그때 언관으로 있었는데, 드디어 경신년(1680)에 있었던 정원의 일을 거론하여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는 내용으로 공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왕은 그것이 거짓임 알고서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또한 왕은 공이 사표를 낼 때에는 비답을 내려 저지시켰으나, 공은 기어이 사퇴해서 이에 교체되었다.

 

대개 경신년 초에 ‘좌우만 돌아보는 자’로 하여금 그 상황에 처하게 하였다면 바로 이 기회를 타서 투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공의 진술한 바는, 사리를 곧게 논술하고 시비를 바로잡아 위로는 인군의 덕을 규정하는데 명백하고 화평해서 당론에는 치우친 바가 없었다. 서로 다투던 그때에 공처럼 아정(雅正)하고 식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이것을 분별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심을 가지고 이와 같이 헐뜯으니, 사람들은 모두 놀랐던 것이다. 공은 홀로 “당시에 왕께서 노하심이 엄중하여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앞자리에서 두려워하였고, 기주(記注)는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빠뜨렸다. 그래서 널리 들은 것이 실상과는 어긋났으니, 이런 반박이 있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라고 말하며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여름에는 다시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었다. 겨울에는 인천부사(仁川府使)로 임명되었으나, 아버지의 병환으로 부임은 하지 못하였다.

 

임술년(1682)에 예조참의(禮曹參議)ㆍ판결사(判決事)ㆍ대사성 겸승문원부제조(大司成兼承文院副提調)를 역임하였다. 겨울에 대사간이 되었다가 병으로 체직되었다. 계해년(1683) 봄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을축년(1685)에 탈상하고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임명되었다가 병조로 옮겼다. 왕이 국자감의 장관은 많은 선비들의 모범이므로 그 선발을 신중히 하고자 하여 대신에게 선택하여 의망(擬望)하도록 특명을 내리자, 대신이 공을 선택하여 올렸다. 이에 대사성에 다시 제수되었다.

 

여름에는 평안관찰사(平安觀察使)로 나갔다. 하직 인사를 하는 날에 왕이 인견하여 이르기를, “경이 오래도록 근시(近侍)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경의 마음가짐이 공평함을 잘 알고 있으니, 힘쓰라.”라고 하였다. 대개 공이 3년 사이에 열 번 승정원에 들어갔는데 이치에 근거하고 법을 지켜 치밀하고 간절하게 아뢰었고, 강연(講筵)에 출입하여 크게 보익한 것이 많았다. 이에 왕이 그 현명함을 알았으므로 이와 같이 특별히 하교하신 것이었다. 관서 지방은 중국을 왕래하는 길이므로 으레 금을 내어 상인에게 빌려 주고 이문을 취하여 그것을 공용(公用)에 충당하였다. 관리가 날마다 문서를 끼고 계산하는 것이 이득과 재물이 불어나고 줄어들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공이 항상 이마를 찡그리며 말하기를, “어찌 사대부로서 이런 거간꾼 노릇이나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겨울에 청나라 사신이 와서 변방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오는 것에 대해 문책하였다. 조정에서는 부신(符信)도 없이 공을 불러 조사하여 처벌하고자 하였다.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번신(藩臣)을 종이쪽지 하나로 부르니, 만약 변고가 있다면 어찌 낭패가 될 일이 없겠는가?”라고 하고 공은 곧장 관할지의 경계로 나가서는 임지를 함부로 떠나서는 안 됨을 조정에 전달하였다. 이에 조정이 비로소 선전관(宣傳官)을 보내 부신을 가지고 가서 불러오게 하였다. 부신을 맞추어 보고 나서 공이 차고 있는 것을 거두고자 하니, 공이 손을 들어 저지하며 말하기를, “혹 나를 체포하라는 교지(敎旨)가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나는 스스로 번신의 자격으로 부름에 나아가야 하는데, 이 부신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부신을 가진 자가 주저하며 물러났다. 그가 일에 임하여 자세히 살피는 것이 이와 같았다. 감영을 떠나는 날에 사인(士人)과 부녀자들이 달려 나와 수레를 에워싸고 말하기를, “우리 부모를 잃었다.”라고 하였고, 심지어 성곽에 올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며 우는 이들도 있었다. 공이 부임한 지 겨우 5개월인데 은혜와 사랑으로 인심을 감복시킨 것이 이와 같았다. 청나라 사신이 돌아가자 즉시 이조참판에 제수되었고 얼마 안 되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병인년(1686)과 정묘년(1687) 2년 동안에 대사성 겸비변사유사당상(大司成兼備邊司有司堂上), 동지경연(同知經筳), 이조ㆍ호조의 참판, 대사헌, 도승지 겸예문제학(都承旨兼藝文提學), 동지성균(同知成均), 공조ㆍ예조ㆍ병조의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공이 내직에 있음을 꺼려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 북도에서는 매년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이리저리 떠돌며 생업을 잃은 자가 많았다. 공은 그곳에 부임하여 세금은 줄이고 부역은 없앴으며, 백성의 이익은 이루고 백성들의 해로움은 제거하는 등 곤궁한 자들을 두루 구휼하였다.

 

무진년(1688) 가을에도 또 흉년이 들었다. 공은 백성이 크게 곤궁하게 될 줄을 알고서 미리 주군(州郡)의 백성을 경계해서 절약하고 식량을 축적하도록 하였다. 또한 여러 읍의 창고와 민가의 호수를 계산하여 식구대로 양곡을 주어 보릿고개를 넘기게 하였다. 그리고 부족한 것은 영남 지방 중 바닷가 근처에 있는 군읍(郡邑)과 관서 지방 인근의 여러 군읍에서 곡식을 옮겨 줄 것을 요청하여 3만여 섬을 얻었다. 이 곡식을 가지고 백성들을 골고루 먹이니, 사람들은 흉년의 근심을 잊게 되었다.

 

기사년(1689) 여름에는 임기가 다 되어 들어와서 동지중추(同知中樞)로 임명되었다가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전임하였다. 가을에는 호조로 옮겼다. 겨울에는 조위사(弔尉使)로서 연경에 갔는데, 행장이 단출하였다. 여러 서리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재상의 마음은 우리들 모두가 알고 있으니, 공처럼 청렴하고 검약한 이는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

 

경오년(1690) 봄에 귀국해서 복명하고 다시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었다. 공은 기사년(1689)에 내직으로 들어온 뒤로는 벼슬하기를 즐기지 아니하고 임명을 받을 때마다 문득 병이 있다고 해서 사양을 하였다. 그러나 가을에 다시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갔다. 이전의 부사가 모두 게으름을 피우고 일을 하지 않아 송사가 10년이나 밀려있었다. 공은 그것을 부지런히 처결해서 쌓여 있는 문서가 모두 없어졌다. 공의 관할 내에는 세도 있는 호족들의 전장(田莊)이 많이 있어서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는데, 공이 모조리 정리하여 다스리니 간사하고 포악한 자가 자취를 감추고 힘없고 약한 자들이 살 곳을 얻게 되어 고을 전체가 잘 다스려졌다. 그리고 여가로는 매죽(梅竹)을 가꾸고 그 사이에서 읊조리며 유연하게 세상을 잊은 듯하였다. 3년 만에 이임해가니 읍인들이 비석을 세워 그 덕을 칭송하였다.

 

그리고 돌아온 뒤에 다시는 도성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선영 아래 집을 짓고서 계부(季父) 서계공(西溪公, 박세당(朴世堂))과 함께 아침저녁으로 지팡이를 짚고 서로 추종하면서 여생을 보내려하였다.

 

계유년(1693)에 황해관찰사(黃海觀察使)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갑술년(1694) 여름에는 왕이 또 조정의 관리들을 모두 배척하고, 옛 관료들을 불러들였는데, 특히 공은 이조참판 겸동지의금(吏曹參判兼同知義禁)으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에 옛 관료 대부분이 도성 밖에 있어 조정이 거의 비어있었다. 왕은 공이 오는 지를 하루에도 서너 차례나 물으니 공은 부득이 성내로 들어가서 임명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조판서 겸동지경연 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세자우빈객(刑曹判書兼同知經筵成均館事弘文館提學世子右賓客)으로 승진하였다가 조금 뒤에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으로 임명되어 중궁복위(中宮復位)의 옥책문(玉冊文)을 지어 올렸다.

 

처음에 중궁(中宮, 인현왕후 민비(閔妃))이 복위될 때 재상들이 도성 밖에 있었다. 예조에서는 판서(判書)가 없었는데, 왕이 급작스럽게 명령을 내리니 예의(禮儀)에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병조판서 서문중(徐文重)이 대신과 예조판서가 입조한 뒤에 절차를 강정(講定)하자고 청하였으니, 대례(大禮)를 신중하게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공을 불러 의론하고 승정원(承政院)으로부터 이미 먼저 이 뜻을 왕에게 올렸다. 이때 수상(首相) 남구만(南九萬) 공과 서공을 배제하려는 자가 유생 박상경(朴尙絅)을 시켜서 상소하였고, 대관(臺官) 정호(鄭澔)와 함께 연이어 두 재상을 논척하고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공도 연좌되었는데, 모함하는 말이 극히 위험하였다. 공은 도성 밖으로 나와서 상소를 올리고 벌주기를 기다리니, 왕이 너그럽게 용서하여 바로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었다. 그때 책례(冊禮)할 기일이 급박하여 독실한 유시(諭示)로써 돌아오기를 재촉하였기 때문에 공은 어쩔 수없이 일을 보았던 것이다.

 

가을에 우참찬 겸동지경연춘추관사(右參贊兼同知經筵春秋館事)를 제수하였다. 겨울에 좌참찬(左參贊), 예조판서 겸지의금부사(禮曹判書兼知義禁府事)로 전임하였다.

 

을해년(1695) 봄에 왕세자의 입학례(入學禮)가 있었는데, 공이 대제학으로서 참여하였으니 이는 옛날 박사(博士)의 직임에 해당되었다. 세자가 또 관례(冠禮)를 행하였는데, 공은 예조판서로서 찬관(贊冠)이 되었다. 또 존명(尊名)을 정함에 그 예를 잘 수행하여 여러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니, 조정의 관료들이 존경하고 우러러보았다.

 

여름에는 대사헌을 거쳐서 좌참찬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죄적(罪籍)에 있는 자가 매우 많았다. 대신(大臣)들이 조정에서 회의하여 석방하기를 청하였으나, 대신(臺臣)들이 수긍하지 않고 모두 회피하여 논의가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명(李師命)ㆍ이상(李翔)을 부학(副學)으로 복관시켰다. 그러나 오도일(吳道一)은 이사명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하고, 수찬(修撰) 민진형(閔震炯)은 이상을 신원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모두 대간(臺諫)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때 공이 구언(求言)으로 인하여 상소를 올렸다. “대신(大臣)과 대신(臺臣)의 논의가 분산되어 있으니 조속히 조처를 내리시어 생각과 뜻이 서로 믿음을 주고 가부간에 서로 이해하여 조화롭게 진정되도록 노력함으로써 인심을 감복시키소서. 이사명과 이상의 일은 애당초 명백하게 분변할 단서가 없었는데 지레 먼저 복관시켰으니 어찌 시비의 의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러한 일들에 대해 명백한 하교를 내리신 적이 없습니다. 상벌이 얼마나 큰 권한인데 스스로 총람하지 않으시고 다만 관습만 따라 행하십니까? 이러고서도 어찌 무너진 기강을 떨쳐 세우고 세인(世人)들이 권려(勸勵)할 바를 알게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왕이 비답(批答)을 내린 것이 수십 줄이었는데, ‘스스로 총람하지 못한 것은 실로 나의 병’이라 교시하여 두 사람을 복관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었다.

 

가을에는 예조판서로 옮겼고 왕의 약시중을 든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공조판서를 거쳐서 다시 예조로 돌아왔다.

 

병자년(1696) 봄에는 이조판서로 임명되어 인사 정책을 할 때에 공평하게 처리하니 청탁하는 일이 없어졌다. 그해 흉년이 들어 유민들이 서울로 몰려든 것이 무려 수만 명이나 되었다. 조정에서는 동서의 도성 밖에 구호장(救護場)을 설치하여 나누어 진휼하려고 재신(宰臣)을 선출해서 관장하게 하였는데, 공은 성 동쪽을 주관하였다. 공은 매일 그 진휼장에 가서 나누어 먹이는 것을 친히 감독하였는데, 불쌍히 여기고 슬퍼함이 지성에서 나왔다. 굶주린 백성들은 공을 보려고 와서는 모두 앞에 모여들어 손을 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의 자비로 구휼하심이 이러하오니, 비록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공은 계해년(1683)부터 상을 치르다 병을 얻었는데, 그 후에 사신으로 외국을 다녀오며 또한 몸이 더욱 상하게 되었다. 이때에 와서 초췌함이 더욱 심하여 심신이 매우 피로하였다. 집안사람들이 걱정하여 일을 줄이고 조리에 힘쓰라고 권하였으나 공은 탄식하며 말하였다. “나의 병이 위태로운 줄 어찌 알지 못하겠느냐? 다만 국가는 불행하게 여러 번 변고를 당하였는데도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은 오직 물러나서 스스로를 보존하기만 생각하고 있다. 내가 금년에 직위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온 몸을 바쳐 직무로 죽는 것이 오히려 나의 본분이다.” 그리고 갑자기 가벼운 감기가 더해져 더욱 괴롭게 되었다. 여러 번 상소하여 사퇴를 요청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병중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상소를 올려 구휼할 방도를 논하였다. 그래서 무릇 혼란스러운 꿈속의 말까지도 모두 나라를 근심해서 시속(時俗)을 걱정하는 일이었다. 왕은 내관을 보내어 문병을 하고 어찬을 보내셨다. 대신이 입대(入對)하여 전조(銓曹)의 업무가 비게 되었다는 이유로 공의 직임을 우선 해임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사람을 보내 병을 살피게 하였는데 조석을 버티기 어렵다고 하였다. 지금 제법 여러 날이 지났으니 차도가 있지 않겠는가?” 대신이 이미 위독하다고 아뢰자 왕이 근심스럽게 여겼으니, 몹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여기에 이르렀다. 체직되어 형조 판서로 옮겼다가 또 체직되어 부호군에 붙여졌다. 마침내 5월7일에 건덕방(建德坊)에 있는 집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61세였다.

 

부음을 알리니, 왕은 이틀 동안 조회를 보지 않으시고, 의례(儀例)대로 부전(賻典)을 하고 조제(肇祭)를 하였으며, 따로 유사를 시켜서 상구(喪具)를 갖추게 하였다. 그리고 왕은 특별히 후하게 장례를 치르게 하면서 “나의 진도(震悼)하고 진휼(軫恤)하는 뜻을 표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왕세자 또한 궁관을 보내와서 조문하고 관 1구(具)를 택하여 내렸다. 위로는 조정 관료에서 아래로는 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슬퍼하였다. 이해 7월 6일에 양주(楊州) 수락산(水落山)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공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순수하며 차분하고 조용하였으며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까웠다. 용의(容儀)는 단아하고 엄정하였으며 말에 거칠고 속된 기가 없었다. 효도와 우애의 행실은 더욱 독실하고 지극하였다. 예전에 승지공(承旨公)이 만년에 풍병(風病)이 들어 몸을 침석에 맡긴 지가 10년이나 되었다. 공은 그 동안에 근무시간 외에는 곁을 떠난 적이 없이 간호하며 응대하기를 시종 한결같이 하였으며, 병이 조금이라도 도지면 하룻밤 사이에 안색이 금방 까맣게 변하였다. 아우 좌랑공(佐郞公) 태소(泰素)와는 서로 지기(知己)처럼 대하였다. 그가 죽게 되자 애통해서 말하기를, “내 몸의 반을 잃었으니, 내 어찌 살까?”라고 하였는데, 조카들을 자기의 소생처럼 돌보며 보기만 하면 문득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외가에서 염병(染病)으로 상이 자주 발생하자 친척이나 친구도 감히 가보지 못하였는데, 공은 홀로 의약으로부터 염빈(殮殯)하는 데까지 마음을 다해서 구호하였다. 또한 홀로 어린 종 몇 명과 더불어 한 달 여 만에 다섯 번이나 장사를 지내니, 사람들이 모두 어려운 일이라고 해서 그 의리에 감복하였다.

 

본성이 준엄하고 결백하였으며 진취하는 데에 더욱 신중을 기하였다. 일찍이 “사람의 부덕은 조급한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천만의 죄과가 모두 이에서 나온다.”라고 하였다. 남이 경쟁하는 습성을 보면 마치 자신을 더럽힐 듯 여겼기 때문에 교제도 드물게 하였다. 공이 퇴근해서는 문득 쓸고 조용히 앉아서 오직 서사(書史)만을 스스로 즐기니, 고담(枯淡)하다고 나무라는 자도 있었다. 그러자 공은 “고담한 것도 또한 어려운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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