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작성자 대종중
ㆍ작성일 2016-02-05 (금) 16:33
ㆍ분 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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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헌공(忠獻公) 증영의정(贈領議政) 휘(諱) 준원(準源) 신도비명(神道碑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충헌(忠獻) 박공(朴公)은 나의 외조부다. 나는 공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외조부와 손자[祖孫]로서의 친함이 있는데다 겸하여 스승과 제자[師弟]의 의리도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사물 하나를 알고 글자 하나를 알게 된 것이 모두 공의 공로와 정성 아님이 없다. 공은 힘써 권면하고 노고를 마다하지 않아서, 대도(大道)로 나를 인도하고 성훈(聖訓)으로 나를 경계하였다.

 

일찍이 내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학문을 전일하게 하지 않으면, 장차 유명무실(有名無實)하게 되어 후회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성(誠)이라는 것은 실리(實理)입니다. 독서를 하지 않으면 그만이나, 독서를 한다면 오직 진실하게 독서해야 합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나, 일을 한다면 오직 진실하게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매양 이에 유념하여 글자마다 생각을 다하고, 지루하고 고생스러움을 참고 견디며, 그저 대강 하여 책임이나 면하려는 뜻을 없애고, 들떠서 외물을 쫓는 마음을 없애는 것, 이것이 바로 성(誠)입니다. 곧 《대학(大學)》의 성의장(誠意章)에 나오는 ‘무자기(無自欺)’라는 것입니다. 오직 글을 읽고 일을 하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 말을 하거나 한 가지 일을 하는 것도 이렇게 조금도 허위나 착오가 없게 하면, 성인이 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중용(中庸)》의 ‘계구근독(戒懼謹獨)’에서 ‘독공이천하평(篤恭而天下平)’에 이르기까지 다른 방법이 없으니, 다만 하나의 성(誠)뿐입니다.”

 

아! 나는 그때 어려서 이치를 알 수 없었으니, 어찌 듣기 싫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이제 와서 고요히 생각하니 다시 들리는 듯 감흥이 그치지 않고, 추억하며 마음에 되새기게 된다. 이것이 내가 조손(祖孫)이면서 사제(師弟)라고 한 이유이다.

 

공의 휘(諱)는 준원(準源)이고 자(字)는 평숙(平叔)이니 반남(潘南) 사람이다. 비조(鼻祖)는 사로왕(斯盧王)이다. 그 뒤에 고려 때 절의로 이름이 드러난 문정공(文正公) 상충(尙衷)이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좌의정(左議政) 평도공(平度公) 은(訔)이 훈업이 성대하게 드러났다. 사간(司諫)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문강공(文康公) 소(紹)는 힘써 김안로(金安老)를 공박하다가 그 도당의 배척을 받았는데, 도학이 순정하여 정암(靜庵) 조문정(趙文正, 조광조(趙光祖))과 명성을 나란히 했으니 호는 야천선생(冶川先生)이다.

 

4대를 내려와서 세성(世城)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윤선도(尹善道), 권시(權諰)를 신랄하게 배척하였는데, 곧은 절개와 훌륭한 덕망으로 당대의 명신이 되었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는 목사(牧使) 태원(泰遠)이니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조부는 필리(弼履)니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는 사석(師錫)이니 진사(進士)가 되어서 여러 군현의 수령을 지냈지만 집에 남겨진 재산이 없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숙부인(淑夫人)이니 기계 유씨(杞溪 兪氏)로 이조참판(吏曹參判) 수기(受基)의 따님인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2남을 두었는데 공은 그 차남으로 공의 현달함으로 인해 증조부 이하가 증직(贈職)되었다.

 

공은 영조 15년 기미년(1739) 5월 20일 한양(漢陽) 사택에서 태어났다. 본래 자질이 특이하고 기운이 청수(淸秀)하며 골격이 준수하여 부모가 매우 사랑하였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사랑하고 어른을 섬기는 도리가 지성에서 나왔으니 행동과 일을 예절에 맞게 하였다. 천성이 또 독서를 좋아했는데, 장성해서는 뜻을 돈독히 하고 옛것을 좋아하여 육경(六經)과 백가(百家)의 책을 가져다 읽었다. 더욱 스스로 권면하여 맏형 근재공(近齋公)에게 질의를 하니, 근재공은 대유(大儒)인데도 이르기를 “식견이 정민(精敏)하여 내가 따를 수 없는 면이 있다.”라며 칭찬하였다.

 

신사년(1761)에 모부인의 병이 위독하자 팔을 찔러 피를 수혈하여 조금 더 연명하게 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여 슬픈 안색으로 곡을 하니, 조문 온 자들이 슬퍼하였다. 14년 뒤에 부친 찬성공(贊成公)이 병에 걸리자 공이 곁에서 모시면서 의관을 벗지 않았고, 병이 위독해지자 똥을 맛보아 그 길흉을 알아보고 밤에 하늘에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찬성공이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공은 모친상 때와 마찬가지로 몸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였다. 맏형을 아버지처럼 섬겨서 세상 사람들은 백강(伯康)의 우애를 오늘날에 본다고 하였다. 병오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니 공을 아는 자는 모두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늦게까지 뜻을 펴지 못하다가 조금 성취하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정미년(1787)에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이 되니 우리 자궁(慈宮)의 부친으로 처음 직임을 맡은 것이다.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로 승진하고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옮겼다. 당초에 우리 선왕께서 후사를 위해서 명문가를 간택하였는데, 자궁이 간택되었으니 자궁은 공의 셋째 따님이다. 2월에 가례(嘉禮)를 거행한 뒤 선왕께서 그 집이 협소함을 알고 특별히 가옥을 주어 살게 하였으나 공은 황공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또 유사들이 필요한 복식과 기물을 공에게 물었으나 공은 모두 생략하기를 원해서 끝내 사양하였다.

 

선왕께서 이 사실을 듣고 가상히 여겨 드디어 그의 뜻에 따라 하교하여 말하기를, “박씨는 우리나라의 거족(巨族)으로 대대로 청덕(淸德)을 지켜왔는데, 이제 국혼을 했으니 진실로 다행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곁에서 모시는 신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관직은 비록 낮아도 내가 대우함이 대신(大臣)과 같다. 그의 풍모를 보면 참으로 대신이다.”라고 하면서 보은현감(報恩縣監)에 제수하였다. 부임해서는 대치(大治)를 이루었는데, 법률을 지키고 권위와 은혜를 병행하니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감복하였다.

 

공이 개인적인 일로 입궐하였을 때 선왕이 왕자의 생산이 늦다고 말씀하자, 공은 대답하기를 “중궁의 춘추가 아직 어리니 다산(多産)의 희망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선왕이 주대(奏對)가 적절하다고 칭찬하였다.

 

경술년(1790)에 자궁이 임신한지 달포가 지나자, 선왕이 공에게 명하여 금중(禁中)에 숙직하게 하였다. 내가 태어나니 원자(元子)로 봉하였다. 그리하여 공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발탁하여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임명하였다. 또 원자의 외조부라 해서 전례에 따라 한 품계를 가자(加資)하니, 선왕이 공의 고사(固辭)하는 마음을 알고 허락한 것이다. 공은 이미 원자를 보양(保養)하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강보에 있을 때부터 장성하기까지 나를 항상 따라다니며 돌봤고, 음식도 반드시 직접 살펴서 조석으로 내게 주었는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계축년(1793)에 공은 숙선공주(淑善公主)의 출산을 도운 노고가 있었다. 마땅히 품계가 올라가게 되었으나, 공이 또 사양하므로 대신 말을 주었다. 병진년에 숙선옹주가 천연두에 걸리자 선왕이 병을 피하여 이문원(摛文院)으로 갔다. 공이 혼자 간호하여 치료의 때를 놓치지 않아 회복되었다. 그 달에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임명되었다.

 

기미년(1799)에 맏형 근재공이 돌아가시자 공은 비통함을 이기지 못했다. 그해가 공의 회갑이었지만 양친과 맏형을 사모해서 주찬(酒饌)을 먹지 않았다.

 

선왕이 일찍이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원자를 보호하는 것은 경의 한 몸에 달려 있으니, 원자를 이끌어주는 책임도 겸하게 한다. 국가에서는 보양관(輔養官)을 두는데, 내가 그 관직을 두지 않은 것은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또 책봉(冊封)한 뒤에 사부(師傅)를 둘 것이지만, 선을 가르치는 데 경만한 이가 없다. 안에서 원자의 공부를 권면하도록 하라.”

 

공은 황공해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원자가 점점 커가니 빨리 바른 사람을 선발하여 조석으로 곁에서 돕게 하십시오. 또 성상께서 몸소 가르치신다면 성인의 학문을 성취시키는 데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앞서 내가 말을 배울 때 공이 이미 문자(文字)를 깨우쳐 주었다. 점점 커서는 경전을 가르치는데 하루하루 수행할 과제를 매우 엄격하게 하였다. 겸해서 정주(程朱)의 잠명(箴銘)을 읽게 하니, 그것은 공이 손수 글씨를 쓴 것이었다. 이때부터 날로 더욱 수고로운 일이 많아서 쉴 사이도 없었다.

 

선왕께서는 공이 늙는 것을 걱정하여 때로 보약을 하사하였다. 공은 공무에서 물러나서도 여전히 관복을 입고 꿇어 앉아 독서를 하였는데 혹서기라고 하여 그만두지 않았다. 선왕이 일찍이 사람을 시켜 가보게 하여, 그 모습을 들어 알고는 말하기를 “이 사람은 신독(愼獨)하는 공부가 많다.”라고 하였다.

 

학문과 덕행을 보아 근재공을 요속(僚屬)에 선임하고, 선왕이 조정의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람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거니와 내가 볼 때 그 아우 역시 학자로서 여러 해 금직(禁直)을 수행함에 행실을 조심스럽게 하니,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한 경전의 뜻을 밝게 공부하여 선을 가르치는 재목으로 적절하니, 하필 관직으로 얽어매겠는가? 원자를 선으로 이끌어준 공로가 많은데, 나 또한 문장에 있어서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경신년(1800)에 선왕이 부스럼으로 몸이 편치 못하자, 공은 걱정이 낯빛에 드러나 부모님이 병이 든 것처럼 하였다. 아! 슬프게도 끝내 천붕(天崩, 임금의 상)의 아픔을 당하였다. 공 또한 슬퍼하고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붙들고 위로하였다. 처음에 선왕이 내가 어린 나이로 자신을 간호함을 걱정해서 물러가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어찌 할 바를 몰랐고, 선왕이 계신 전궁(殿宮)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옆에서 제지하여 들어가지 못했다. 다행히 공이 대신들에게 말해서 전궁에 나의 뜻을 전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운명하실 때 들어가서 영결(永訣)을 하게 되었다. 아! 공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천추의 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날 정순왕후(貞純王后, 영조 비 김씨)가 공을 총융사(摠戎使)로 임명했다가 바로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시켜서 숙직을 명하였고, 이내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임명하였다. 7월에 대신들이 청해서 공을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발탁하였다. 왕후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금일 이 지경을 당해서 주상도 어리고 국세도 위험하니,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는가?”라고 하시며, 공에게 공조판서(工曹判書), 의금부(義禁府) 제거(提擧), 총관(摠管)의 직책에 임명하였다가 장용영(壯勇營)으로 전임하였다. 또 대신들로 하여금 계주(啓奏)하게 해서 혼전도감(魂殿都監) 당상(堂上)에 임명하였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할 때 세 대신과 공을 영돈녕(領敦寧)으로 불러 국사를 부탁하였다. 공은 선왕께서 여러 번 조심조심하라고 하신 뜻을 받들어서 사양하고 임명을 받지 않았다. 능묘의 명정(銘旌)을 쓴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올라 특별히 효원전(孝元殿)의 향사관(享祀官)에 임명되었으며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정순왕후는 공에게 지성으로 왕가를 보호한 공이 있기 때문에 품계를 올리는 것이 합당하다며, 공을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의금(判義禁)의 직책에 발탁하고 또 판돈녕(判敦寧)으로 임용하였다.

 

임술년(1802)에는 금위대장(禁衛大將)으로 임명되었다. 11월에는 나의 병이 나아졌다 해서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올렸으니, 병간호를 위해 숙직한 노고 때문이었다. 을축년(1805)에 내가 또 천연두에 걸리자 공은 시종 한결같이 병간호로 노고가 많았다. 내가 나은 뒤에 보국대부(輔國大夫)로 가자(加資)해서 공조판서를 겸임하게 하였다.

 

공은 언제나 임명을 받으면 황공해서 사양하였는데 나이 들고 병도 들자 관직을 그만두고 정양(靜養)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해 가을에 공이 은퇴하기를 요청하기에 내가 부득이하여 허락하자 나가서 퇴거하다가 병인년(1806)에 갑자기 풍담증(風痰症)이 들었다. 정묘년(1807) 봄에 병환이 더욱 위독해지자, 나는 놀라 걱정이 되어 내시를 보내 문병을 했다. 공은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손수 ‘병자를 왕이 와서 보시니 조복과 허리에 두르는 띠로 몸을 덮으라.’라고 쓰고, 곁의 사람에게 보이면서 반드시 조복을 덮게 하였다. 내 이 말을 듣고 울어서 목이 쉬었으니, 비록 병석에서도 공경과 예절을 잃지 않음이 이러했던 것이다. 2월 7일 정침(正寢)에서 숨을 거두니 향년 69세였다.

 

나는 백관을 거느리고 애도하고 그날 교서를 내려 영의정에 추증하고 ‘충헌(忠獻)’이란 시호를 내렸다. 성복(成服) 날에 가서 조문하려 했으나 신하들이 차자(箚子)를 올려 만류하고 자궁도 간절하게 말리므로 그만 두었다. 그래서 나는 승지를 보내 조사(弔詞)를 짓고 조문하게 하고 대신의 예로 장사를 치르게 하였다. 또한 내수사(內需司)에 명해서 제물을 공급하게 하였다. 4월 11일에 여주(驪州) 황금평(黃金坪) 부인 묘 남쪽 언덕에 장사하고 장차 합장하려 했는데, 지세가 좋지 못해서 다시 다른 곳을 정하여 다음해 9월 20일에 소문리(蘇文里) 묘좌(卯坐)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남쪽으로 부인 묘와 수백 보쯤 떨어져서 묘역이 좌우에서 서로 보이는 곳이었다.

 

아! 공의 위대한 공적은 내가 비록 감히 일일이 모두 말할 수는 없지만, 평소 보고 들은 것만 대략 말해 보겠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누가 선인이 되고 현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을까마는 대부분 꾸밈과 허위를 숭상한다. 그러므로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상례는 사치스럽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하게 하라.”라고 하였으니, 대개 공자께서 시속의 병폐를 깊이 탄식하신 것이다.

 

일월(日月)은 하늘에 걸려 있으니 볼 수는 있어도 만질 수는 없다. 그러나 만물은 땅에 있으니 볼 수도 있고 제재하기도 쉽다. 그 멀어서 알 수 없는 것은 문(文)의 관(觀)이고 가까워서 살피기 쉬운 것은 질(質)의 용(用)이다. 만약 문의 남는 것과 질의 부족한 것을 참조할 수 있으면, 모두 예에 맞게 하고 행실을 독실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말로 공이 실지로 지니고 있는 바였다.

 

공경하고 온화하며 성신(誠信)이 간절함은 공의 말이다. 조심하고 여유로워 경(敬)을 숭상하고 사치하지 않은 것은 공의 공검(恭儉)이다. 물이 가득한 그릇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조심하고 삼간 것은 공의 충효이다. 온화하고 여유로워 거친 것을 포용하고 잘못을 감싸준 것은 공의 관대함이다.

 

선왕이 일찍이 공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서적을 알고 이치를 아는 것이 본디 선비인데 도도한 이 세상에 과연 그런 자가 있는가? 내가 정사를 다스리며 탄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말이 시사(時事)의 문제에 이르자 공이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문왕(文王)이 오래 사셨으니, 어찌 인재를 등용하지 않았을까?’라고 하였습니다. 문왕이 인재를 등용하여 열 사람이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문왕의 덕을 가지고 문왕처럼 오래 사신다면, 인재를 등용함이 어찌 주나라보다 적을 것이라고 이렇게 인재가 없음을 탄식하십니까? 오직 전하께서 진퇴(進退)와 소장(消長)의 기미를 깊이 살펴서 조정을 바로잡는 데 달려 있으니, 그 근본은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막아 먼저 군심(君心)을 바로잡는 데 있습니다.”

라고 하자 선왕이 가납(嘉納)하였다. 이를 통해서 공의 말을 알 수 있으니, 성신(誠信)하고 간절하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공은 본성이 담박해서 진기한 물건을 모으지 않고 비록 문방구라도 질박한 것을 숭상하여 자손들도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일찍이 숙직을 설 때 선왕이 나를 보내 공의 처소에 가보게 하니, 남루한 좌석 하나뿐이고 사방에 책이 쌓여 있는데 그 속은 먼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뒤에 선왕이 개수하도록 명하였다. 일찍이 공은 기름진 음식을 싫어하였는데 자궁이 그의 뜻을 받들어 담박한 음식만 차려 드리니 선왕이 보고 감탄했다. 또 내가 보니 입은 옷이 다 해지고 좌석도 다 떨어졌는데, 손에서는 책을 놓지 않았다. 애초부터 의복이나 음식 따위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며, 관대(冠帶)와 진신(搢紳)의 예복은 반드시 정숙하고 단정하게 하였다. 이를 통해 공의 공검(恭儉)을 알 수 있으니, 경(敬)을 숭상하고 사치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공은 가정에서 효성이 독실하였으며 그것을 옮겨서 임금에게 엄숙과 공경을 다했다. 진퇴와 행지(行止)가 모두 떳떳하였으니, 간혹 곁에서 모시는 이들도 공의 이름을 모를 정도였다. 사석에서 선왕을 친히 모실 때 경적을 토론하였고, 선왕이 시정(時政)의 득실을 물으면 오직 물음에만 대답하고 국가의 대사에는 하나도 간섭하지 않았다. 세도(世道)와 형정(刑政)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었으니, “형정이란 임금의 권한인데 신하가 어찌 감히 간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서경》 〈홍범〉에 나오는 “임금만이 위엄을 행하고 임금만이 복을 만든다.”는 구절을 암송하여 세 번 반복하며 영탄하였다. 나라의 형세가 위급할 때 곁에서 도와 나라를 지탱하고 안정시킨 것은, 거의 옛날 현신(賢臣)과 양보(良輔)보다 나았는데도, 자만하지 않고 삼가며 조심조심하였다. 이를 통해 공의 충효를 알 수 있으니, 마치 물이 가득한 그릇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조심하고 삼간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공은 곤궁한 이를 도와주는 데는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고, 사람을 접할 때는 진실과 정성에서 우러나와 충후한 뜻이 가득하였다. 남의 과실을 보면 못 본 것처럼 하고, 남의 선행을 들으면 기뻐하며 칭찬하였다. 백성을 다스리고 아전을 다룰 때 매로 때리는 형벌은 가하지 않고, 너그러움과 인자한 덕으로 대하였다. 일찍이 호읍(湖邑)에 있을 때 백성들이 인자한 아버지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공의 관대함을 알 수 있으니, 거친 것을 포용하고 잘못을 감싸준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무릇 이러한 여러 미덕은 모두 문과 질을 갖추고 있는 데서 나왔다. 《중용》에 이르기를, “열 개의 눈이 보고 열 개의 손가락이 가리킨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만의 하나라도 내가 공을 사사로이 칭송하겠는가?

 

아! 공은 천분이 본디 높은데다 또 일찍이 경사(經史)를 탐독하고 그 뜻을 강구하여 생활 규범의 근본으로 삼았다. 여기에 존심양성(存心養性)하는 공부를 더하여 홀로 있을 때에는 반성하고 움직일 때에는 조심조심하였다. 선행과 의덕(懿德)은 모두 성현을 본받아 나라에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함이 당대에 탁월하였으니, 그 마음속의 진실함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임금에게 고할 때 반드시 본원을 위주로 하고 나를 경계시킬 때 실리(實理)로 권면했던 것이다. 공의 사적을 기록함에 있어 오직 ‘성(誠)’이라는 한 글자뿐이니, 비단 나만이 공에게 힘입은 것이 아니라 실로 국가가 공에게 힘입어서 편안하게 되었다. 그런데 향년 70년도 안 되어 용모와 음성이 영원히 떠나갔으니 애통하고 애통하다.

 

공은 문장력이 풍부하여 글이 고아(古雅)하면서도 전중(典重)하였으니 작가의 법도가 있었다. 공이 평생 저술한 것은 수집하여 몇 권으로 만들어서 집에 간직하고 있다. 부인의 성은 원씨(元氏)이니 원주(原州)가 본관인데, 이조참판에 추증된 경유(景游)의 따님이고 목사(牧使)로 영의정에 추증된 명구(命龜)의 손녀이며 흥평위(興平尉) 몽린(夢鱗)의 증손녀이고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 두표(斗杓)의 5세손이다.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스스로 시례(詩禮)를 익혀서 단장(端莊)하고 정숙(靜肅)하였으며 부덕(婦德)을 갖추었으니, 여자 가운데 군자라는 칭호가 있었다. 공보다 24년 전에 돌아가셨다.

 

4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종보(宗輔)니 음판서(蔭判書)이며 차남은 종경(宗慶)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參判)이며 3남은 종익(宗翊)이니 요절하였고 4남은 종희(宗喜)니 감역(監役)이다. 맏사위는 신광해(申光海)니 어장(御將)이며 둘째 사위는 이요헌(李堯憲)이다. 측실 소생은 2남 2녀니 모두 어리다. 종보는 군수 서광수(徐廣修)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주수(周壽)는 문과에 합격하여 한림(翰林)이고 차남 기수(岐壽)는 종경의 후사로 출계(出系)했으며 삼남 호수(鎬壽)는 종익의 후사로 출계(出系)했고 사위는 진사 김병구(金炳球)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종경은 현령 이술모(李述模)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며, 종익은 사인(士人) 유언우(兪彦宇)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종희는 첨추(僉樞) 이언찬(李彦燦)의 딸을 아내로 맞아서 1남을 낳았으니 어리다. 이요헌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정신(鼎臣)이고 나머지는 어리며 딸은 남수헌(南壽献)에게 출가했다.

 

아! 내가 삼가 이 글을 지은 것은, 공의 아들 종경이 공의 유사(遺事)를 지었다는 말을 듣고 이를 가져다 상고하고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참작해서 공의 지성(至誠)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 성대하도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위대하다 충헌공(忠献公)이여! 선조의 기풍을 이었네.

총민하고 박식하여 모든 일에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네.

검약하고 간엄(簡嚴)하며 중후하고 공손하였네.

따뜻한 옥이나 단련한 금처럼 공이 우리나라에 태어났네.

지기(志氣)는 맑고 넓어 강물을 터놓은 것 같았네.

충과 효를 법으로 삼고 예와 의를 기준으로 삼았네.

일마다 삼가고 행동마다 조심하였네.

모든 행동거지는 법도에 따라 여유롭게 행하였지.

공이 숭상하고 힘쓴 것은 질박하고 거짓이 없는 것이라네.

책을 스승 삼으니 성현의 말이고,

의리와 이익의 분별에 밝으니 학문을 배워서라네.

공의 마음을 일러 맑디맑은 가을 물 같다 하였네.

정직한 군자는 오직 공을 일컫는 말이라네.

경사와 복을 쌓으니 공의 가문이요,

우리 자궁을 낳으니 많은 복을 받았네.

나 태어난 해는 경술년인데,

공은 나의 보호를 맡아 몸이 닳도록 힘썼으니,

처음부터 지금까지 공의 마음 한결같았지.

보도(輔導)의 명을 받들고도 공훈을 자랑하지 않았네.

나에게 공부하라고 권면하고 진실함을 힘쓰게 하였으니

진실하여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 이를 통해 성인의 경지에 들어간다 했네.

임금의 큰 도리를 외울 때는 공 앞으로 다가갔었네. 

18년 동안의 가르쳐 주신 것은 정직이라네.

선왕의 지우를 입으니 선왕께서 돌보아 주심이 더욱 깊었네.

선왕이 경전을 인용해 물어봄에 시간 가는 줄 몰랐고,

공이 바른 근본을 바라니 선왕의 마음 흡족하였네.

선왕은 경연에 임하여 포상하고 뛰어난 학문을 칭찬하였네.

선왕의 말씀 삿됨이 없으니 공이 본디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네.

선왕이 붕어하실 때 나는 아직 어렸다네.

다만 내 한 몸 힘입어 성취했을 뿐만이 아니라네.

국가가 위급할 때 기둥과 동량이 되었으며,

마음 다할 것을 맹세하여 선왕께 자신을 바쳤네.

공훈이 이와 같았으나 공로를 거두어 없는 듯이 하였지.

경전을 연구함을 권면하고 독려한 뒤에 하였네.

진귀한 물건 화려한 비단 속에서도 유자의 맑은 지조를 지녔네.

행한 일은 공덕이 되었는데 글로는 다 말하지 못하네.

이 비석에 명문 새겨 길이 후세에 전하네.

 

                                           순조 대왕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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