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작성자 대종중
ㆍ작성일 2016-02-05 (금) 16:12
ㆍ분 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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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희공(忠僖公) 금성위(錦城尉) 명원(明源) 신도비명(神道碑銘)


 

 

 

내가 즉위한 지 14년 되는 가을에 금성위(錦城尉) 박공(朴公) 명원(明源)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풍수지리를 시행한 것은 후한(後漢)과 진(晉)나라 때 시작되어 당(唐)나라와 송(宋)나라에서 성행했으니, 그것의 시행이 정말로 허위였다면 어찌 사람들로 하여금 이처럼 우러러 믿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정자(程子)는 비록 풍수지리를 믿지 않았지만 ‘저기가 평안하다거나 여기가 평안하다.’라고 말한 바 있고, 주자(朱子)는 실제로 그 설을 깊이 연구해서 그 어버이를 장사지내는 땅을 그 법을 따라 찾았습니다. 또 벗이 산릉(山陵)의 득실에 대해 논하자 말하기를, ‘자손으로서 그 조부를 장사지냄에 반드시 그 삼가고 공경하는 마음을 다하여 평안하게 하고, 영원히 모시려는 계획을 해서 조상의 형체를 온전하게 하며, 신령을 편안하게 하면 자손들이 번성하고 제사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니 이는 자연의 이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풍수지리학에 대해 살펴보지도 않고 정자와 주자가 이런 말을 하였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원소(園所)는 얼마나 중한 곳입니까? 이제 신하로서 만세의 대계를 생각하는 자는 마음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고 의리상 참으로 소신을 감히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비록 평소 지리의 설을 잘 알지 못하지만, 사람들이 알기 쉽고 보기 쉬운 것을 가지고 논해보겠습니다. 떼가 말라죽는 것이 첫째이고, 좌청룡에 구멍이 난 것이 둘째이고, 뒤쪽에 물살의 충격을 받는 것이 셋째이고, 뒤쪽에 돌을 쌓음이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 넷째입니다. 이 몇 가지를 통해 보면 그 풍기(風氣)의 순하지 않음과 토질이 좋지 않음과 지세의 낮음을 대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묘역 안에 뱀의 흔적이 있는 것은 더더욱 놀랍고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제가 예전에 풍수가의 말을 들어보니 형국(形局)이 둘러싸지 않은 것이 아니고 안대(案對)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사수(砂水)의 법으로 따질 때는 지가(地家)가 크게 꺼리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한 말이 만의 하나라도 그럴싸한 점이 있다면, 성궁(聖躬, 임금의 몸)이 어떻게 되고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성상께서 갑오년(1774, 영조50)에 처음으로 원소를 배알하신 후로 병신년(1776, 정조 즉위) 즉위 후까지, 생각이 전부 원소의 안부(安否)에 있어 밤이나 낮이나 잠자리 한 번 편히 못 드신 줄 압니다. 그런데 몇 해를 두고 지켜봐도 어느 신하 하나 전하를 위해 그 일을 추진한 이가 없어서 신으로서는 적이 슬펐습니다. 옛날 영조 신해년(1731, 영조7)에 대신 이하 제신이 무신년 이후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으로 왕께 다가가 장침(長寢)을 옮겨 모실 것을 건의했기에, 국조(國祚)가 만년을 가리라고 기대했던 것 아닙니까? 열성(列聖)의 혈통이 전해지는 것도 오직 성궁에 달렸고, 300년 종묘사직의 의탁도 오직 성궁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원소가 좋아야 성궁이 편안하고, 성궁이 편안해야 본지(本支)가 백대를 갈 것입니다. 옛 분들이 이른바 종묘에 제사 올리고 자손을 보존한다고 한 그 말이 바로 여기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내가 대신과 경재(卿宰), 삼사(三司)의 신하들을 불러 그들의 의견을 모아 의문을 해소한 뒤에, 공에게 명하여 수원읍 치소 부근에 자리를 보아 잡게 하고 그곳으로 옮겨 모신 예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전에도 그곳을 두고 말했던 자가 있었으니 그가 말하기를 “천재일우의 기회이고 천 리를 다녀도 만나기 어려운 자리입니다.”라고 했었다. 그렇게 만나기 어려운 자리에다 우리 왕가의 억만 년 끝이 없을 기반을 잡았으니, 공의 정성과 공로가 아니었더라면 누가 이 일을 해냈겠는가? 내가 그래서 작년 가을 이후로 공을 은인이자 훈구(勳舊)로 여긴다고 한 것이다.
 

공의 자(字)는 회보(晦甫)이고 반남(潘南) 사람이며 사로왕(斯盧王)이 그 시조이다. 그 후대에 와서 문정공(文正公) 상충(尙衷)이 고려조에서 곧은 절의로 이름났고, 본조에 들어와서는 좌의정 평도공(平度公) 은(訔), 금계군(錦溪君) 충익공(忠翼公) 동량(東亮)이 훈업(勳業)으로 이름을 냈다. 금양위(錦陽尉) 문정공(文貞公) 미(瀰)는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져서 드디어 우리나라 갑족(甲族)이 된 것이다. 공의 증조는 태두(泰斗)니 군수였고, 조부는 필하(弼夏)니 참봉이다. 선고(先考)는 사정(師正)이니 참판이며, 선비(先妣)는 함평 이씨(咸平李氏)이니 택상(宅相)의 따님이다. 
 

공은 영조 을사년(1725, 영조1) 10월 21일에 태어나 나이 14세 때 화평귀주(和平貴主)를 아내로 맞으면서 금성위에 봉해지고, 여덟 번 전직 끝에 위계가 수록대부(綏祿大夫)에 이르렀다. 더러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에 제수된 일도 있고, 태상(太常), 전의(典醫), 선공(繕工), 사재(司宰), 장흥(長興), 제용(濟用) 등의 제조(提調)를 겸임하기도 했다. 사신으로 연경(燕京)을 세 차례나 갔다 오기도 하고, 여러 차례 보책(寶冊)을 쓴 공로로 말을 하사받기도 했다.
 

공은 성품이 간결하고 풍채가 헌칠했으며, 몸가짐이 변함이 없고 말은 항상 적었다. 비록 부귀영화 속에서 살았으나 조용하기가 정녀(靜女)와 같고, 담박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다. 그러나 혹 나가서 사무를 맡게 되면 안으로는 마음을 다하고 정기가 밖으로 넘쳐흘러 더러는 남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충성과 절의라면 아주 늠름한 열사(烈士)의 기풍이 있어 어떠한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하였다. 화평귀주의 내조 또한 공과 필적할 만하여 여러모로 공을 도왔다. 무진년을 전후하여 공의 내외가 했던 일을 보면 우뚝하여 길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공 같은 이야말로 어찌 나라의 충신이 아니겠는가?
 

공은 부모에 대하여 살아 있을 때 사랑하고 죽은 뒤에 사모하기를 다 아이의 심정으로 했다. 심지어 묘소를 이장하기 위하여 10여 년을 두고 기호(畿湖)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풍수(風水)로 이름난 자만 있으면, 비록 미천한 중이라 하더라도 후한 예물을 주어 맞이했다. 형제 사이에도 우애가 돈독하여 중형(仲兄)이 서거하자, 너무 슬퍼한 나머지 폐가 상하고 두 귀가 거의 어두워졌다. 홀로된 누님이 의지할 곳이 없자 살 집을 마련해 주고, 후사를 정해 주고 먹을 것을 대주는 등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선조를 받드는 일에 있어서도 먼 장래를 생각하여 자기가 먼저 출자하고, 이어 일가들을 설득해서 제전(祭田)을 사서 사당에 제사 지냈다.
 

공의 가정생활은 이러했다. 성조(聖祖)가 귀주(貴主)를 매우 사랑하시어, 귀주가 사가(私家)에 가 있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는 점을 생각했기 때문에, 부마도 사가에 가 있는 날은 일 년에 겨우 여드레밖에 안 되었다. 귀주가 죽은 후에도 집의 모습을 귀주가 만든 법식을 따라 하여 지금까지도 바꾸지 않고 있다. 병신년(1736, 영조12) 이전에는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갈 때 반드시 귀주의 사(祠)로 가서 안부를 여쭈었다. 
 

처음 귀주가 공에게로 시집갈 때 대군(大君)의 옛집이 이현(梨峴)에 있었다. 그 집을 공에게 주자 공은 글을 올려 완강히 사양하였으므로 끝내는 다른 집으로 바꾸어서 주었다. 혹시 특례로 민전(民田)을 주는 경우가 있으면, 반드시 명령을 철회하도록 간청하였다. 만약 억지로 주면 첩안[牒]만 집에다 간직하고 감히 실물은 받지 않았다. 그릇이나 노리갯감 중에도 궁중에서 쓰던 오래된 물건이면, 반드시 간곡하게 청하여 꼭 돌려보내고 자기 집에다 두지 않았다.

천성이 산과 물을 좋아하여 교외 별서에 작은 집을 짓고 꽃과 대나무 등을 심어 두고는 지팡이 짚고 거닐곤 했는데, 맑은 눈동자에 하얀 머리가 마치 세상 밖의 사람처럼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었다.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이었지만 많이 마시지는 않았고, 거나할 정도면 시나 읊조리며 그렇게 늙어갔던 것이다.
 

또 조정 생활은 이러했다. 궁궐을 출입할 때면 일정한 법도가 있어 젊어서부터 늘그막까지 조금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지켰다. 진대(晉對)가 있을 때는 다른 여러 의빈(儀賓)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물러나고 감히 혼자 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와 말하다가도 혹시 말이 조정 일에 미치면 응답을 않고 좌우만 돌아보고 있었다. 
 

공의 아들 상철(相喆)이 어린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자 공은 문을 굳게 닫고 들어앉아 조정의 신료들을 일체 상대하지 않고 얼굴에는 걱정하는 빛이 있었다. 조카인 종덕(宗德)이 인사권을 수십 년간 잡고 있었는데, 공 자신이 일체 거기에 끼어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들도 감히 이 일을 가지고 공을 매도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때 조정의 공론이 사색(四色)으로 나뉘어 숱한 변고를 겪었기 때문에, 권세를 부리던 집들 중에 뒤에 죄에 걸린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공만은 아름다운 명성을 그대로 지키고 가문도 그대로 보존했는데, 그것은 공이 평소 근약(謹約)했던 힘이 컸던 것이다.
 

영조께서 여러 의빈(儀賓)들 중에서 특히 공을 사랑하여 다른 궁액(宮掖)들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은례(恩禮)로 시종일관하셨다. 우리 선군(先君)께서도 공을 가장 애중히 여겨 어려운 일만 있으면, 곧 공에게 가서 자문하니 공과 귀주는 이점에 매우 감격하여 힘썼다. 그래서 국가를 다스리고 보익한 일 중에는 외정(外廷)에서 알지 못하는 것과 국사(國史)에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 있었을 것인데, 늦게 태어난 내가 어찌 그 속을 다 알 것이며 또 안다고 한들 어찌 차마 그 말을 할 것인가? 다만 시를 써서 서로 주고받고 시첩을 두고 서로 논평하며 공과 격의 없이 다정하게 지내시던 일은 지금도 여전히 상상이 된다. 선희궁(宣禧宮) 궁호를 고치도록 글을 올려 청했던 것 같은 일이 그 한 예이니 아! 슬프다.
 

내가 대리청정을 할 때도 공은 선왕께 다 갚지 못한 은혜를 떠올려, 아는 것은 무엇이나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무슨 일이든 힘쓰기를 꺼려하지 않았으니, 공의 행적을 쓰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연경을 갈 때만 해도 계속된 장마로 물이 넘쳐 임진강 길이 막혔으므로 공을 따라간 사람들 모두가 조금 머물자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공은 말하기를, “사행 길은 기한이 있는 것인데, 그럼 나더러 왕명을 풀밭에다 버려 버리란 말인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그들 말을 듣지 않고 길을 재촉해 물을 건넜는데 물도 방해가 되지 못했다. 열하(熱河)에 이르자 예부(禮部)가 공에게 강요하여 번승(番僧)에게 절을 하도록 했다. 공은 그때도 꼼짝 않고 서서 말하기를, “신하된 자는 사사롭게 남들과 사귀는 법이 없는 것인데, 내 어찌 그에게 무릎을 굽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들이 아무리 무슨 말을 해도 끝까지 동요하지 않았다. 
 

또 장례 일을 보살핀 것만 하더라도 내가 공에게 옛날 영안위(永安尉)와 동양위(東陽尉)가 하던 대로만 할 것을 특별히 명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제도에 의빈(儀賓)은 일정한 감무(監務)를 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병오년(1786, 정조10) 왕세자가 죽었을 때 초상에서부터 장례 때까지 심지어 장지 정하는 일까지도 그 모두를 공에게 맡기자, 공은 더위를 먹어 거의 위태로운 상태였는데도 감히 쉬지 않고 더위를 무릅쓰고 동분서주하여 별 탈 없이 일을 마쳤다. 이는 모두 공이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실적인 것이다. 그 큼직큼직한 것들이 그러한데 나머지 일들을 논해 무엇 하겠는가?
 

공에게는 작은 초상화 두 장이 있었는데 영조께서 거기에다 어필로 찬(贊)을 써 주기도 하셨다. 한평생 독서를 좋아하고 필찰(筆札)에도 능했지만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저술로는 《만보정시집(晩葆亭詩集)》이 있고, 그 밖에 《연행록(燕行錄)》, 《열하일기(熱河日記)》 등 약간의 책이 있다. 만보(晩葆)라는 호는 바로 내가 공의 집에 갔을 때 공의 문미(門楣)에다가 편액으로 써 붙인 것이다. 공이 늘그막에 와서 한가롭게 쉬고 싶다고 하였는데, 나는 그가 떠나는 것이 싫어 허락하지 않았더니, 경술년(1790, 정조14) 3월 25일 66세의 나이로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공이 임종 때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라에 은혜를 보답하지 못하니,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 없다. 내가 죽으면 예장(禮葬)을 받지 말라.”라고 하고는, 자기 사적인 일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얼마나 현자인가? 나도 공의 유지(遺志)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 상전(常典)에 비하여 부의를 조금만 더하라 하였다. 사신(詞臣)이 행장을 쓰고 태상(太常)이 시호를 정하여 5월 16일 귀주의 묘와 합장하게 했다. 귀주는 영조의 셋째 따님으로 영빈 이씨(暎嬪李氏) 소생인데, 그의 효우(孝友)에 대해 영조의 칭찬이 대단했다. 나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에서 한 손으로 하늘을 떠받친 사람이라고 했으니, 여기에서 그의 현철한 규범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은 자기 형의 아들 상철(相喆)을 후사로 삼았는데, 지금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부윤(府尹)으로 재직 중이다. 측실(側室) 소생으로는 종선(宗善), 종현(宗顯), 종건(宗謇), 종련(宗璉)과 사위 장선(張僎), 서근수(徐瑾修), 이건영(李建永)이 있다. 상철의 계자(系子) 횡수(紭壽)는 참봉(參奉)이고 횡수의 아들은 제일(齊一)이며, 사위는 이희선(李羲先)과 홍정규(洪正圭)이다.
 

아! 공의 언행(言行)과 사공(事功)에 대해 당연히 명법(銘法)에 맞춰 명(銘)을 해야 할 것이니 누가 나만큼 공을 알 것인가? 내가 공에 대해 비록 서툰 말이나마 아끼겠는가? 그리하여 서를 쓰고 명을 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금성이 관향인 박씨들, 대대로 좋은 명성 이어왔다네. 

큰 쇠북에 공로 새겨지고, 곧기는 옥형(玉衡)과 같았다네.

꽃다운 명성 계속 유전되어, 훌륭한 문장 국가 전책을 맡으니

공이 선업을 받들고,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네.

선왕께서 훌륭하다고 하시니, 명문의 착한 자손이라네.

향기 속에 자색 굴레의 말 탄 사람, 누가 살펴보았나

공은 그렇게도 진실하여, 요조숙녀처럼 진중하셨네.

강명한 속마음과 부드러운 겉모습에, 어른에게 공순하고 어린이를 사랑했다네.

강함을 갈무리하고 부드러움을 지키시니, 내 공에게 배운 바 있다네.

감히 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 대의 사랑이 그리도 후하셨네.

변할 줄 모르는 대절은, 홀로 위태로운 국운을 유지하셨네.

높은 산꼭대기에, 아름다운 기운이 서리게 되었다네.

누구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 더욱더 성하고 번창하였네.

돌아가신 공이 무슨 유감 있으리? 돌아가심에 슬퍼하고 살아서는 영광이었네.

다만 그의 공로를 못다 갚아, 내가 공에게 많은 빚을 졌구나.

그래도 이 비를 세우니, 비석머리가 저토록 우뚝하여라.

공의 사적을 깊이 새기니, 꾸며 댄 말은 절대로 없다네.

화락하고 단아한 군자를, 내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숭정(崇禎) 기원 163년 경술년(1790) 정조(正祖)께서 친히 지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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