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작성자 대종중
ㆍ작성일 2016-02-05 (금) 16:06
ㆍ분 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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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헌공(肅獻公) 좌의정(左議政) 휘(諱) 회수(晦壽) 신도비(神道碑)

서울에서 동쪽으로 30리 밖 양주(楊州) 조암동(槽巖洞) 을좌(乙坐)의 언덕은 호하(壺下) 박상국(朴相國)의 묘소이다. 이제 공이 돌아가신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 서울의 인사들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품위 있고 조용하며 일에 임해서는 흔들리지 않았으니, 어찌 다시 공과 같은 이를 볼 수 있을까? 위대하며 준수하고 엄정하며 자신을 신칙하여 법도가 있되, 어찌 다시 공과 같은 이를 볼 수 있을까? 더욱이 공은 같이 조정에 있는 신료들이 늘 우러르고 의지하던 자였다.”

 

공은 충정(忠貞)과 시례(詩禮)의 가풍을 이어받아 어렸을 때부터 풍채와 식견으로 친구들의 존경을 받았다. 처음 출사할 때부터 이미 재상감으로 촉망을 받았고, 네 임금을 섬기며 대우를 받은 것이 성대하였다. 두 조정에서 네 번이나 재상에 임명되었는데, 정책을 시행함에 혜택이 미치는 바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하여 명예와 덕을 온전하게 하였으니, 조야(朝野)가 감탄하고 사모하였다. 마치 필요한 물건이 한량없이 쓸모가 있는 듯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까닭 없이 그러했겠는가?

 

헌종 을사년(1845) 정월 10일에 왕이 숭정문(崇政門)에서 조회를 하고 치도(治道)를 자문하였다. 당시 공은 구경(九卿)의 반열에 이르러 특지(特旨)로 의정부(議政府) 우의정(右議政)에 발탁되었다. 왕의 선유(宣諭)가 지극히 정성스러우니 공은 나아가 감사를 드렸다. 그러자 왕은 말하기를 “경이 국사를 보게 되어 다행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3년이 지난 무신년(1848)에 공이 여러 번 사표를 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철종 을묘년(1855)에 나이 일흔이 되어 예경(禮經)을 인용하여 사퇴하려 하였으나 불허하고 오히려 다시 우의정으로 임명되었다. 그 다음해 또 여러 번 사표를 내니 왕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국가가 의지하여 그 안위를 맡기는 것은 연륜과 덕이 있는 대신이다. 경이 만약 사퇴하기로만 결의한다면, 국가를 누구와 더불어 다스린단 말인가? 따라서 경이 물러가는 것은 큰 집에 기둥을 빼는 것과 같으니, 비록 집이 기우러지지 않으려 한들 그럴 수 있겠는가?”

 

그리고 3년 만에 또 좌의정으로 임명되니 공은 다시 왕을 만나 뵙고 사직을 간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듬해 또 좌의정으로 연임되었는데, 공이 노환으로 사퇴하려 하자 왕이 말하기를 “경은 일신의 병을 걱정하나 나는 일국의 병을 걱정하고 있다. 몸의 병 고치는 방법으로 이 나라의 병을 고치게 하라.”라고 하였다.

 

그 후에 공이 돌아가시니 다음과 같이 전교를 내렸다.

“이 대신의 우아하고 공경하는 자태와 단정하고 삼가는 지조는 과인이 깊이 의지하는 바였고 조야가 크게 기대하는 바였다. 평소에 기력이 그래도 믿을 만하여 재상의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조리하게 하였는데, 갑자기 이렇게 서거하니 심히 애석하다.”

 

아아! 신하가 되어 왕이 중히 여기는 한마디 말만 얻어도 후세에 빛날 것인데, 두 대의 명철한 왕이 공의 덕량(德量)과 풍도(風度)를 표창하고 견해와 계책을 장려하였으니, 공은 옛날 어진 신하에 필적한다 할 것이다. 공의 진퇴가 민생의 안녕과 근심에 관련되고 공의 거취가 국가의 안위에 관계된다 하며, 큰 집을 지탱하는 기둥과 나라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에 비유하였으니, 위대한 왕의 말씀이 해나 별처럼 빛나는구나. 공의 공훈을 어찌 솥에만 새기고 역사서에만 기록할 뿐이겠는가?

 

공은 신념을 가지고 올곧게 행동하여 왕 앞에서 바른 소리를 하였다. 익종(翼宗)이 대리로 정사를 볼 적에 승지가 한 내관의 죄를 고발하자 세자가 내부적으로 처리하려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이들이 저지른 잘못은 비록 작은 과실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법에 따라 판결해야 하며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에 다름이 없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세자가 그 말을 따르며 말하기를 “그 말이 참으로 이치에 맞는다.”라고 하였다.

 

헌종 때는 간관(諫官) 중에 죄를 지은 자가 있었는데, 공이 재상으로서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옛날에 직언(直言)과 극간(極諫)으로 과목(科目)을 설정하고 습유(拾遺)와 보궐(補闕)로써 관명(官名)을 설치한 것은 다 진언하는 말을 받아들이려는 까닭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간언을 꺾으시니 받아들이는 도량이 어찌 그리 좁으신지요? 송(宋)나라 건륭(建隆) 이래로 일찍이 간언을 벌준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간관을 용서하기를 요청하니, 왕이 태도를 바꾸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으니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무감(武監)의 무리가 편전(便殿)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었는데, 공이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우리 조정의 법은 엄격했는데 요즘 풍습에는 잘못된 점이 있으니 반드시 법률에 따라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근래에 기강이 해이하여 중관(中官, 환관)이 길거리에서 시끄럽게 떠드는데, 거의 고관과 궁예(宮隸, 내관)가 방자하여 끌고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매번 듣는 이를 놀라게 하는 경우가 많사오니, 이것은 작은 것을 엄하게 막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릇 행문(倖門)이란 것은 조정의 관직이나 노비 같은 미미한 직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법을 어기는 자는 다 행문이오니, 먼저 궁내에서부터 이런 행문을 막으소서.”

 

내수사(內需司)에서 명례궁(明禮宮)을 위하여 거제포(巨濟浦)에 소금가마를 설치하자고 요청하였는데, 공은 민폐를 생각해서 이를 요청한 자를 처벌하라고 하였다. 그 때에 총위영(總衛營)을 신설하니 공이 말하기를 “지출하는 것이 모두 경비에서 나오는데, 총위영에서 마음대로 써서 폐해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반드시 절약을 하고 단속을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사실에 부합하니, 실로 감탄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다음과 같이 경계의 말을 올렸다.

“전하께서 편안하게 지내시는 궁궐, 아름다운 금옥(金玉), 성대한 의장과 물품, 장인이나 군대를 양성하는 데 드는 비용은 모두 백성들이 추위와 배고픔을 참고 살과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가며 티끌을 모아 태산을 이룬 것입니다. 즉위하신 지 10년이 되어도 실질적인 은덕이 궁벽한 곳까지 다 펼쳐지지 못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백성들이 괴롭고 곤궁하게 살며 울부짖는 소리를 듣지 못하시고, 백성들이 채찍질당하고 박해를 당하는 상황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릇 자기의 사심을 이기지 못하면 급하지도 않은 업무와 무익한 일들이 전하의 이목을 난잡하게 가리게 될 것입니다. 이로 인해 민생은 곤궁해지는 것입니다. 원컨대 고요하게 마음을 기르시어 사사로운 생각을 제거하시옵소서.”

 

왕이 안색을 고치고 말하기를, “이는 충성과 나를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니, 마땅히 명심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때 대궐 안에서 토목공사가 있었다. 공이 다음과 같이 진언을 올렸다.

“대궐 안에서 새집을 건축하고 옛집을 수리하는 공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비록 백성을 괴롭히지 않는다고는 말하나, 이는 기실 모두 무익하고 급하지도 않은 일로 또한 재물을 소모하고 검약의 덕을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그 재물이 어찌 백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하겠습니까?”

그러자 왕은 공을 칭찬하였다.

 

그때 또 빈궁(嬪宮)을 간택하는 예가 있었는데 공이 진언하기를, “의장의 규모와 복식이나 물품을 검소하게 해서 비용을 줄여, 장차 왕조의 복을 아끼소서.”라고 하였다.

 

공은 왕에게 경계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번 주청하였던 일을 아직 실시하지 않으시니, 이것은 전하께서 신을 믿지 않으신 것입니다. 전하께서 일찍이 한 번도 실행하지 않으신다면, 신이 또한 어찌 감히 전하의 말씀을 믿겠습니까? 그리하여 군신이 서로 믿지 않는다면, 국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은 밤마다 방황하여 눈물이 저절로 납니다. 또한 군신이 서로 문답하지 않는다면, 어찌 정치를 하겠습니까? 지금 고위직에 올라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 자가 전하께서는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신다면, 모든 일을 망치고 사방팔방이 피곤하게 되어 구제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옥체를 건강하게 보전하는 것에 대해 말하기를, “욕심을 절제하는 것을 근본으로 해서 기거(起居)를 삼가시고 정신을 마음속에서 굳건히 지킨 연후에야 외물이 유혹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경의 알뜰한 충심에 감동하였다.”라고 하였다.

 

공은 성품이 순정하여 나아가 왕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에 힘썼고 왕이 지향하는 것에 대해서 반드시 충언을 올렸다. 매번 주청할 때면 공경하여 정색을 하였으나 진실한 마음을 담은 것이기 때문에, 왕의 믿음을 받아서 여러 번 충정에서 나온 말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공은 항상 말하기를 “왕의 덕을 이루는 것은 전학(典學, 임금의 학문)에 달려 있고, 백성들의 생업을 지키는 것은 수령에 달려 있다.”라고 하였다.

 

순조 때에는 오랫동안 홍문관에서 재직했는데, 공이 숙직할 때엔 늘 강독을 하였으니, 그것은 공이 음독(音讀)을 잘하고 문의(文義)에도 정통하였기 때문이다. 익종이 세자로 있을 때 강의한 것이 칭찬을 많이 받았는데, 공도 또한 세자를 보좌하고 지도하는 것을 자임해서 글에 대해 설명을 해 드렸다. 위로 역대의 전장제도로부터 아래로 백성이 호소한 사정에 이르기까지, 널리 관련 자료를 인용하고 상세하고도 간절하게 정성을 다해 설명을 드리니 세자 또한 기꺼워하며 곧바로 받아들였다.

 

일찍이 왕이 밤에 수강궁(壽康宮)에서 부르시더니 말하기를, “영서(瀛署, 홍문관)에 있다는 말을 듣고 보고 싶어 불렀다.”라고 하면서 경서를 읽게 하시고 들으셨다.

 

헌종조에서 철종조까지 경연에서 왕을 대할 때에는 반드시 학문을 권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의 치란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백성의 일에 대해 말하자면 좋은 관리를 선임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한(漢)나라 황제가 좋은 관리를 아낀 것과 당(唐)나라 황제가 주첩(柱帖)에 이름을 쓴 것을 귀감으로 삼으소서.”

 

그리하여 책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군읍에 해독을 주는 자는 빨리 파면하라고도 청하고, 아직 얼마 되지 않은 자는 숙고해서 그냥 임용하도록 청하였다.

 

국가의 대전례나 대의절에 대하여 공에게 문의한 것이 많았다. 즉 순조의 사당에 ‘조(祖)’라고 칭하는 것, 인릉(仁陵, 순조의 능)과 수릉(綏陵, 익종의 능)과 휘경원(徽慶園, 수빈 박씨의 능)을 이장 때 대왕대비(익종의 비 조씨)의 복제, 봄가을로 능행(陵行)할 때의 복색, 지금 임금의 즉위 뒤 익종의 축식(祝式), 진종의 조례(祧禮), 순조실(純祖室)과 효정전(孝正殿)의 존호를 올리는 등의 절차는 모두 공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공은 반남(潘南) 사람이니 휘(諱)는 회수(晦壽)이고 자는 자목(子木)이며 신라 혁거세(赫居世)의 후예이다. 고려 말의 직제학(直提學)인 상충(尙衷)은 세상에서 반남선생(潘南先生)이라 불렀다. 그의 아들인 은(訔)은 조선에 들어와 좌의정(左議政)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서 시호는 평도공(平度公)이며 4대를 내려와 소(紹)는 사간(司諫)인데 호는 야천(冶川)이다. 그후 동선(東善)은 좌참찬(左參贊)으로서 정헌공(貞憲公)이고 정(炡)은 이조참판(吏曹參判) 금주군(錦洲君)으로서 충숙공(忠肅公)이다. 태상(泰尙)은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제학(大提學)으로서 호는 만휴(晩休)이고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니 공의 5대조이다.

 

고조부는 필순(弼純)이니 예산현감(禮山縣監)으로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증조부는 사임(師任)이니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인원(麟源)이니 공조정랑(工曹正郞)으로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는 종우(宗羽)이니 동지돈녕부사로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영산 신씨(靈山辛氏)이니 통덕랑(通德郞)인 명성(命聖)의 따님으로 정조 10년 병오년(1786) 3월 3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기품이 뛰어나고 영리하여 모든 아이들 중에 으뜸이었고, 아름답고 침착하여 보는 자는 다 큰 그릇임을 알았다. 장인인 죽석(竹石) 서태사(徐太史, 서영보(徐榮輔))도 일찍이 고관의 재목이라고 하였다. 순조 경오년(1810)에 진사를 해서 갑술년(1814)에 의릉참봉(懿陵參奉)이 되었다. 을해년(1815)에 중부도사(中部都事)로 갔다가 익위사 시정(翊衛司侍正),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로 옮겼으며, 혜경원(惠慶園), 소도감(所都監), 감조관(監造官)으로 공로가 있었다. 병자년(1816)에는 6품으로 승진하고 문과에 급제해서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임명되었다. 정축년(1817)에는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를 지냈다.

 

무인년(1818)에는 특별히 사서(司書)를 겸했는데, 관직(館職) 전에 겸직하는 것은 전례가 없기 때문에, 비록 임명이 중지되었으나 왕이 공에게 마음을 쓰는 것이 특별하였던 것이다. 기묘년(1819)에도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임명되고 경진년(1820)에는 용강현령(龍岡縣令)으로 나갔다. 모친상을 당하고 그 이듬해에 또 부친상을 당하여 자주 상을 당하니 슬픔이 지나쳐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다.


계미년(1823)에는 탈상을 하고 필선(弼善)에 임명되었으며 갑신년(1824)에는 특별히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겸필선(兼弼善),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평안도와 서울의 시관(試官), 부응교(副應敎), 겸문학(兼文學) 등에 임명되었다. 을유년(1825)에는 사복시정(司僕寺正), 봉상시정(奉常寺正),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옥서(玉署, 홍문관)와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을 맡았는데, 관직에 제수되는 것이 거의 비는 달이 없었으며 특지(特旨)를 많이 받았다.

 

익종이 대리할 때 공의 명석함과 근면함을 알아 국사를 함께 보려고 불러서 자문하니 대우가 날로 높아졌다. 그러나 공은 순순하게 사양하고 물러났다. 특별히 승지(承旨)로 임명되어 부승지에서 우승지로 3원(院)의 부제조(副提調)를 겸하였고 더욱 총애가 두터워져 예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정해년(1827)에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휘경원(徽慶園)의 친제(親祭)에 승지로서 곁에서 모셨다. 도승지로 승진하여 동지춘추관(同知春秋館), 의금부(義禁府), 경연(經筵)을 겸하였고, 호조와 병조의 참판, 한성우윤(漢城右尹)으로 전임했다가 충청감사(忠淸監司)로 나갔다.

 

이때 세자가 말하기를, “민생의 고달픔은 호서(湖西) 지방이 더욱 심하니 경을 이곳에 임명한다. 나는 경이 위엄과 은혜를 겸비하여 백성들을 구제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하였다. 부임한 이듬해에 흉년이 들자 창고를 열고 구휼하였다. 이에 어사(御史)가 표창을 상주하기에 공은 사표를 냈다. 세자가 말하기를 “구휼한 후이기 때문에 경을 교체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임기를 채운 뒤 이조참판으로 들어와 세손시강원(世孫侍講院) 좌유선(左諭善)을 겸하였다.

 

경인년(1830) 5월에 세자(익종)가 승하하니 공은 통곡하고 고향으로 물러났다가 신묘년(1831)에 사포서 제조(司圃署提調)가 되었다. 임진년(1832)에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로 올랐고 문우묘(文祐廟)로 입묘할 때 제향관(祭享官)이 되었다. 이어 공조참판에 임명되었고 승문원 유사당상(承文院有司堂上)을 겸하였다. 계사년(1833)에는 진위사(進慰使)에 응하여 겸진향부사(兼進香副使)로 다녀 왔다. 갑오년(1834)에는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고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으로 파견되었다. 11월에 순조가 승하하니 행장(行狀)과 시장(諡狀)의 찬집당상(撰輯堂上)이 되었다. 을미년(1835)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했으니, 우주(虞主)에 글을 쓴 공로였다. 한성부윤(漢城府尹), 형조판서, 대사헌을 지내고 지의금(知義禁), 지춘추(知春秋), 도총관(都摠管), 실록청 당상(實錄廳堂上) 등을 겸하였다.

 

정유년(1837)에는 평안감사로 나가서 자신을 엄정하고 청렴하게 바로잡았다. 경자년(1840)에는 연공정사(年貢正使)로 갔다 와서 예조판서로 임명되었다. 임인년(1842)에는 동성균내의원(同成均內醫院)ㆍ사직서(社稷署)ㆍ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 주사유사당상(籌司有司堂上) 등을 겸하였고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예조판서가 되어서 북도(北道)의 각 능을 살피고 와서 효현왕후(孝顯王后)의 산릉도감당상(山陵都監堂上)이 되었다. 갑진년(1844)에는 이조판서로 임명되었고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으며 판의금으로 가망(加望)되어 좌참찬에 올랐다.

 

을사년(1845) 봄에 매복(枚卜)으로 숭묘서(崇廟署), 내의원, 경모궁, 봉상시의 도제조를 겸하였다. 신해년(1851)에는 헌종실록청 총재관(憲宗實錄廳總裁官), 어영청 도제조(御營廳都提調)를 겸했다. 을묘년(1855)에는 휘경원을 옮겨 모실 때 도감 도제조를 겸하고, 정사년(1857)에는 추상존호도감 도제조(追上尊號都監都提調)를 겸하였다.

 

무오년에는 경주유수(慶州留守)로 나갔다. 당시 한강 이남은 쇠락하여 왕이 특별히 공을 임명하고 말하기를, “보호하고 다스릴 책임을 경의 위중(威重)함에 맡긴다.”라고 하였다. 공이 호조로부터 대금을 청해서 6천 냥을 빌려서, 연한(年限)으로 본영에 맡겨 조치가 잘되니 일영(一營)이 개혁되었다. 그래서 땅과 노비를 하사하고, 청시(請諡) 승습(承襲)의 정사(正使)로 삼았다. 마필을 받은 것이 아홉 차례이고 표범 가죽을 받은 것이 다섯 차례니, 돈장(敦匠), 서사(書寫, 글씨 쓰는 일), 헌작(獻酌, 제사 때 술을 올리는 것)의 공로로써 된 것이다.

 

철종 12년 신유년(1861)에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76년이다. 부음을 알리자 조정에서는 3일 동안 조회를 하지 않고 성복(成服)날에는 승지를 보내서 치제를 하였다. 이어 3년을 기한으로 녹봉을 지급할 것을 명하여 탈상 때까지 사용하게 하였으며, 슬퍼하는 예의를 다하고 전례대로 장례를 지내게 하였다.

 

초배(初配)는 서부인(徐夫人)으로 달성(達成)의 판돈녕 영보(榮輔)의 따님이고, 후배(後配)는 이부인(李夫人)이니 전주의 학생(學生) 원상(元常)의 따님인데, 부인의 도를 구비하였으며 함께 부장하였다. 종형인 초수(楚壽)의 아들 제승(齊承)이 후사로 들어와 문과에 급제하고 정언 벼슬을 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서녀(庶女)는 서상민(徐相民)에게 출가했으며 제승의 장남은 유양(攸陽)이고 차남은 어린데 종백숙(從伯叔)에게 출계하였다.

 

공은 자질이 아름답고 외모가 중후하며 마음가짐은 정직하고 일에 임해서는 신중하여, 내외의 여러 관직을 지내며 네 조정의 은총으로 포상까지 받았다. 군주를 보필하고 백성을 보호함을 자신의 책무로 삼아 성심을 다하여 흔들림이 없었다. 군덕(君德)을 기리는 요점은 행문(倖門)을 제거하고 일욕(逸欲)을 경계하는 것이요, 네 번이나 재상을 지내면서 올곧게 법도를 지키며 옛 법을 바꾸지 않으니 공업(功業)이 절로 이르렀다. 옛날에 향민중(向敏中)이 민사(民事)에 마음을 다하던 것이나, 두정헌(杜正獻)이 국가를 잊지 못했던 것, 여정혜(呂正惠)가 유난히 중후하여 요체를 알았던 것 등을 공은 거의 지녔던 것이다.

 

나는 공과는 어려서부터 깊은 인연을 맺어 재상으로 있을 때 수십 년 가까이 가르침을 받았는데, 의심이 있으면 질문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협력하였다. 깊은 사려와 굳은 약속은 매번 오히려 미치지 못할 것이라 여겼으니 함께 나무와 정자 산림 사이로 왕래하면서 푸른 소나무, 대나무 아래에서 흰 모발을 서로 마주하였다. 저번에 고향집에서 살 때 공이 병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빨리 가서 보니, 공의 안색은 생생하나 신음소리가 이어졌다 끊어지곤 하는데, 말하는 것은 모두 백성과 국가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평양병사로 갔던 이듬해 남방에는 백성의 어려움이 많았는데, 나 홀로 의정부에서 걱정했는데 사방을 돌아봐도 썰렁했다. 이 때에 어찌 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어진 종질(從姪) 참판(參判) 군이 묘비명을 부탁하니, 오늘날 공을 아는 사람으로 나보다 나은 자가 있겠는가? 이에 명(銘)을 짓는다.

 

반남 박씨 명성 있어 대대로 박식한 인물들이 계승하였네.

야천과 금주, 만휴 등 여러 분들 역사상에 유명하였는데,

아아, 공이 또 나서 더욱 공훈을 드러냈구나.

그 자질은 규장(珪璋) 같고 그 풍채는 학 같았네.

사려는 심원하고 지조를 지킴은 견고했네.

법규대로 행동했으니 오직 정직하였어라.

네 조정의 왕 보필하여 받은 대우가 융숭하였네.

왕의 덕이 날로 올랐으니 그때 공은 경연에 참여했고,

고을의 백성이 태평을 노래하니 그때 공은 수령이었네.

이조에서 인사를 맡아 명성이 높이 올랐고,

세 번이나 돈장(敦匠)하고 네 번이나 가서 일했네.

조정에서 자문하고 특별히 상을 주셨는데,

이르시길 “내가 정승 정한 것은 꿈도 점도 아니라.

덕이 갖추었고 도량이 넓으며 재주가 출중하고 공적을 쌓았도다.

선왕의 유신(遺臣)으로서 대소신료 모두 존경하니,

나라 구하는 의사요 집 떠받치는 들보로다.

아름답고 굳건한 경의 마음을 내가 아노라.”

이에 공은 재배돈수(再拜稽首)하고 신하로서 심력(心力)을 다했네.

충심을 다해 허물이 없으시도록 보좌하고 신하로서 덕을 기르시게 하였네.

 

밥 먹을 때도 잊지 못하는 것 오직 국가와 백성뿐이었네.

허물없이 법을 이루고 성색(聲色)에 동요하지 않았네.

아침에 아뢰면 저녁에 실행되니 그 은택이 펼쳐졌도다.

대체(大體)도 있고 공업(功業)도 있으니 이전의 공렬(功烈)을 본뜬 것이라.

사람들은 감탄하여 지난날을 추억하니,

아름다운 명성이 산과 같이 높은데 묻힌 곳은 조암동(槽巖洞)이로다.

공을 아는 벗이 돌에 이 명문을 새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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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신도비 환재 휘 규수 신도비 대종중 2016-02-05 306
14 신도비 평도공(平度公) 휘(諱) 은(訔) 신도비명(神道碑銘) 대종중 2016-02-05 763
13 신도비 문강공(文康公) 휘(諱) 소(紹) 신도비명(神道碑銘) 대종중 2016-02-05 796
12 신도비 졸헌공(拙軒公) 휘(諱) 응복(應福) 신도비명(神道碑銘) 대종중 2016-02-05 530
11 신도비 서포공(西浦公) 휘(諱) 동선(東善) 신도비명(神道碑銘) 대종중 2016-02-05 646
10 신도비 남곽공(南郭公) 동열(東說) 신도비명(神道碑銘) 대종중 2016-02-05 621
9 신도비 금계군(錦溪君)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朴公 신도비명(神道.. 대종중 2016-02-05 575
8 신도비 약창공 박엽 신도비 대종중 2016-02-05 585
7 신도비 문정공(文貞公) 분서(汾西) 휘(諱) 미(瀰) 신도비명(神道碑銘) 대종중 2016-02-05 576
6 신도비 금주군(錦洲君) 휘(諱) 정(炡) 신도비명(神道碑銘) 대종중 2016-02-05 503
5 신도비 문정공 서계(西溪) 휘(諱) 세당(世堂) 묘갈명(墓碣銘) 대종중 2016-02-05 561
4 신도비 문효공(文孝公) 만휴당(晩休堂) 휘(諱) 태상(泰尙) 신도비명 대종중 2016-02-05 599
3 신도비 충헌공(忠獻公) 증영의정(贈領議政) 휘(諱) 준원(準源) 신도비명.. 대종중 2016-02-05 663
2 신도비 충희공(忠僖公) 금성위(錦城尉) 명원(明源) 신도비명(神道碑銘) 대종중 2016-02-05 493
1 신도비 숙헌공(肅獻公) 좌의정(左議政) 휘(諱) 회수(晦壽) 신도비(神道.. 대종중 2016-02-05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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