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작성자 대종중
ㆍ작성일 2016-02-05 (금) 17:12
ㆍ분 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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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도공(平度公) 휘(諱) 은(訔) 신도비명(神道碑銘)

 



  

박세채(朴世采)

 

우리 9대조 좌의정 금천부원군 평도공(左議政錦川府院君平度公)은 영락(永樂) 20년 세종 4년(1422)에 서거하시어 양주(楊州) 치소 남쪽 중량포(中良浦)에 장사지냈다. 75년 뒤인 홍치(弘治) 9년 병진년 연산군 때에 그 산이 나라의 쓰는 바가 되었기에 마침내 8월 임진일에 광주(廣州) 치소 북쪽 고다기리(高多岐里) 계좌(癸坐) 정향(丁向)의 언덕으로 묘를 옮겨 부인의 묘와 함께 쌍분(雙墳)이 되었다.


공의 휘(諱)는 은(訔)이요, 자(字)는 앙지(仰止)며 호(號)는 조은(釣隱)이다. 박씨의 세계(世系)는 신라 시조인 혁거세(赫居世)에서 나왔다. 신라가 망한 뒤 후손들이 여러 읍에 흩어져살았는데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을 얻은 이가 공의 선조이다. 증조부 윤무(允武)는 양온령(良醞令)이요 조부 수(秀)는 밀직부사(密直副使)며 선고(先考) 상충(尙衷)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서 세상에서 반남선생(潘南先生)이라고 일컬었다. 반남선생은 젊어서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사우(師友)가 되었으며 뒤에는 학관(學官)을 겸해서 유학을 함께 창도하였다. 신우(辛禑) 초년에 간신 이인임(李仁任)이 국정을 전단해서 북원(北元)의 사신을 맞이할 것을 의논할 적에 선생이 두 번 상소를 올려 그의 잘못을 극언하고 잇달아 이인임의 죄를 청하니 여러 간신들이 모두 성을 내며 장형을 가하고 유배를 보냈는데 길에서 돌아가셨다. 본조 금상(今上) 7년 유사(有司)에게 명해서 ‘문정(文正)’이라고 시호를 내린 뒤 제사를 지내고 사당을 지어 기렸다. 선비(先妣)는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에 추증되었으니 한산 이씨(韓山李氏)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의 따님이다.


공은 명 홍무(洪武) 3년 공민왕 19년 경술년(1370년)에 태어나니 도량이 출중하였다. 6세에 부모를 모두 잃고 의지할 데 없이 홀로 고생하였다. 조금 커서 분발하여 스스로 독서할 줄 알자 외숙인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이 시로써 기쁨을 표시하였다. 9세에 판숭복도감사(判崇福都監事)가 되었고 16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19세에 병과(丙科) 제2인(第二人)으로 급제하였는데, 그 때 대책(對策)의 문사(文辭)가 매우 뛰어나서 시험을 관장하던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양촌(楊村) 권근(權近)이 다 그의 글을 취했다고 한다. 전례에 따라 권지전교시교감(權知典校寺校勘)에 임용되었고 여러 번 자리를 옮겨 후덕부승통례문부사(厚德府承通禮門副使)가 되었다. 다음해 임신년에 개성부소윤(開城府少尹)으로 옮겼는데, 마침 태조대왕(太祖大王)이 개국해서 지방으로 나가 지금주사(知錦州事)가 되었고 조금 뒤 치적이 뛰어나 좌보각 겸지제교(左輔閣兼知製敎)가 되었다.


얼마 뒤 다시 지영주사(知永州事)가 되었을 때 태종이 잠저(潛邸)에 있었는데, 의기투합하여 큰 그릇으로 여겼다. 마침내 공이 상소해서 “합하(閤下)께서 저를 보통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으시니 제가 어찌 보통 사람으로서 보답하겠습니까. 지금 합하께서는 임금과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하고 국가와 존망을 같이 하시니 이것이 합하께 생사(生死)를 의탁하는 소이요, 권신(權臣)에게 아부하는 것이 아닙니다”고 하였다. 수년 뒤에 조정에 들어가 사헌시사(司憲侍史)가 되었는데 계림군(鷄林君) 유량(柳亮)이 일찍이 일 처리 때문에 공을 비난하였으나 공은 굴하지 않았다. 그때 조정에서는 유공(柳公)이 몰래 항복한 왜인과 결탁하였다고 생각하고 사헌부에게 다스리게 하였다. 집정자들은 공이 유공에게 숙원이 있으니 반드시 이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다. 공이 대(臺)에 오르자 유공은 공을 보고 문득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서리가 죄안을 들고 공에게 나아가니 공이 붓을 던지며 큰소리로 “허물 아닌 것으로 남을 모함하는 일을 나는 하지 않노라”고 하고 마침내 서명하지 않아 유공이 무사하게 되었다. 이 일로 집정자의 뜻을 거슬러 다시 지춘주사(知春州事)로 좌천되었다. 유공이 후에 정승이 되어 공에게 감사해 하며 “나는 진실로 소인이다”라고 하였다.


무인년 사변이 있었을 때 태종은 오래전부터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는데 공이 병사를 거느리고 가니 태종이 머물러 의논에 참여해서 책략을 결정하게 하였다. 승진하여 사헌중승(司憲中丞)에 임명되었다. 정종 원년 기묘년(1389)에 사수감(司水監), 지형조등사(知刑曹等事)를 거쳤다. 이듬해 역신 박포(朴苞)가 또 반란을 도모하자 공이 태종을 도와서 전략을 세우니 그 무리들이 모두 처형되었다. 그 후 인녕부 좌사윤 세자좌보덕(仁寧府左司尹世子左輔德)이 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위계에 올랐다가 좌산기상시 보문각직제학사(左散騎常侍寶文閣直提學士)가 되었고 얼마 안 되어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 태종이 즉위하니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위계로 올라 형조전서 수문전직학사(刑曹典書修文殿直學士)가 되었다. 신사년 공의 나이 32세 때, 다시 호조, 병조, 이조 등 삼조 전서(三曹典書)를 거쳐서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으로서 가정대부(嘉靖大夫)의 위계에 올라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가 조금 있다가 다시 반성군(潘城君)이 되었다.


이듬해에 강원도관찰출척사(江原道觀察黜涉使)가 되었고 태종 3년 기미년에 한성윤(漢城尹)으로 옮겼으며 병술년에는 다시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공은 고을 수령으로부터 관찰사에 이르기까지 임명된 곳마다 위엄과 은택이 있었다. 마침 명 황제가 환관 황엄(黃儼)을 보내 제주도의 동불(銅佛)을 구하였는데 황엄이 탐욕스럽고 포악하니 여러 도민들이 풍문을 듣고 두려워하였는데 공이 홀로 예의로서 접대하니 그의 위세를 거두고 감히 방자하게 굴지 않았다. 그가 돌아갈 때 태종에게 “전하의 충신은 오직 박은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좌군도총제부 동지총제 집현전제학(左軍都摠制府同知摠制集賢殿提學)에 임명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의 위계에 올랐다. 그 후 명 황태후 진향사(進香使)로서 북경에 다녀와 복명하고 참지의정부사 겸 사헌부대사헌(參知議政府事兼司憲府大司憲)에 임명되었다. 공이 누차 입각(入閣)된 이들을 쫓아내니 가장 기강을 세운 이로 이름이 났다.


이때 좌정승(左政丞) 하륜(河崙)이 국사를 전결하고 다른 재상들은 오직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는데 공이 적절하지 않는 일을 보게 되면 문득 일어나 하공 앞에 나아가 힘껏 쟁론하고 듣지 않으면 공도 또한 서명하지 않았다. 하공이 매우 꺼려 형조판서로 전임되었다. 기축년에는 보문각제학 겸 의용순찰사사(寶文閣提學兼義勇巡察使事)에 임명되었다가 지방으로 나가 서북도순문찰리사 겸 평양부윤(西北都巡問察理使兼平壤府尹)이 되었다. 명을 받아 평양성을 쌓았는데 겨우 60일 만에 완공하였으되 한 사람도 처벌하지 않았다. 태종이 조정의 신하를 보내어 궁중의 술과 겉옷과 속옷 일습(一襲)을 하사하였다. 공은 또 의주(義州)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유랑하니 그해 조세를 감해 달라고 말하여 태종이 특별히 이를 허락하였다.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호조판서로 옮겼고 주현(州縣)의 연혁으로 인해 금천군(錦川君)에 다시 봉해졌다. 또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겸하였는데, 송사를 판결할 때는 그 실정(實情)을 아는 데 힘쓰고 대중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곤장을 때리는 데 정수(定數)가 없음을 보고 “매질 아래 무엇을 구해 얻지 못 할까”라 하면서 바로 계를 올려 태형(笞刑)은 30대를 치는 것을 일차로 하자고 하니 길이 불변의 규정이 되어 지금까지 그에 의지한다.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전임되었다가 조금 뒤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겸하였다. 을미년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의 위계에 올라 이조판서로 임명되었는데 상소하여 옛 전장(典章)을 바꾸지 말라고 청하니 태종이 가납하였다. 옛 제도에 이조(吏曹)가 대간(臺諫)의 공적을 살펴보는 일이 있으니 공은 또 계를 올려 이를 실행하기를 청하였다.


병신년에 공이 47세로서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로 임명되었고 조금 뒤에 의정부 우의정 겸 수문관 대제학 영경연사 세자부 금천부원군(議政府右議政兼修文館大提學領經筵事世子傅錦川府院君)에 승진하였고 공신으로서 동덕(同德)의 호(號)를 더하였다. 겨울에 이조판서를 겸하고 세자사(世子師)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세종이 즉위하니 태상왕(太上王) 을 봉숭(封崇)하는 진책관(進策官)이 되었다. 이때 비로소 경연(經筵)을 열었는데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하였으며 항상 국가가 백성에게 절제 없이 취하는 것을 염려하여 당(唐)의 조용조(租庸調) 법에 의거하여 백성의 부역을 균등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세종이 채용하지 못하였다가 뒤에 정부(政府)에 글을 내려 한탄하였다. 신축년에 병으로 면직하고 부원군으로서 사제(私第)로 나왔다. 그때 태조에 배향할 공신을 논의하였는데 태상왕이 ‘남은(南誾), 이제(李濟)는 공이 크니 추배(追配)할 만하다’고 하니 유정현(柳廷顯), 허조(許稠) 등 군신(群臣)들이 모두 지지하였다. 태상왕이 김익정(金益精)을 시켜 공에게 가서 묻게 하니 “남은 등은 진실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으나 태상왕 전하께서 지극히 공정하시어 그의 공만 알고 죄는 용서하여 태조의 유지(遺志)를 시행하시니 신은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해서 남은과 이제가 마침내 추배(追配)될 수 있었다.


다음해 임인년에 병이 더욱 심해지니 태상왕이 약을 하사하고 한편으로 궁궐음식을 나누어 주었으며, 궁중 요리사를 공의 사저로 보내어 “조석으로 나에게 내었던 음식으로 보살피라”고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태상왕도 이미 병이 들었는데 오히려 내관을 보내어 문병하니 공이 태상왕의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울면서 “노신은 병으로 죽을 것이오나 성명(聖明)께서는 만년을 누리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5월 9일에 서거하니 향년 53세이다. 부음을 알리니 조정에서는 전례대로 조회를 하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에 태상왕이 서거하였다.


공의 부인은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 주씨(周氏)로서 전법판서(典法判書) 언방(彦邦)의 따님이다. 3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 규(葵)는 경상도관찰사요, 차남 강(薑)은 좌익공신 금천군(佐翼功臣錦川君)이며 막내아들 훤(萱)은 경주부윤(慶州府尹)이다. 딸들은 각각 부사(府使) 윤구(尹救), 상호군(上護軍) 김윤(金潤), 관찰사(觀察使) 이중(李重), 판중추(判中樞) 어효첨(魚孝瞻)에게 출가하였으며 손자 증손 이하는 너무 많아서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 뒤 인성(仁聖), 의인(懿仁) 두 왕후가 인종(仁宗) 선조(宣祖)의 성덕(聖德)과 짝하였으니 실로 태임(太任) 태사(太姒)의 성대한 가문이 된 것이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호쾌하고 기특하며 견식이 명확하고 투철하며 의론이 확실(確實)한데다 청렴과 신중, 부지런함으로써 이루어 조정 안팎을 출입함에 명성과 업적이 성대하였다. 어린 나이에 이미 태종에게 지우를 받아 중간에 어려움도 겪었으나 충성과 계책이 더욱 드러나서 그때부터 유악(帷幄)에서 부지런히 애쓰며 특별한 우대를 받았다. 이에 군대를 다스리고 나라를 통치하는 대계와 관련된 일이라면 반드시 참여하여 논의하게 하였으니 비록 동열(同列)의 제공(諸公)들은 듣지 못하였어도 공은 홀로 들을 수 있었다. 어떤 때에는 사심이 있는 것으로 의심받기도 했으나 그 원인을 조사해보면 확실히 다 그렇지 않았다.


장례 때 세종이 ‘평도(平度)’란 시호를 내렸으니 ‘평’은 기강을 다스린다는 뜻이고 ‘도’는 마음이 의로 제어한다는 뜻이다. 또한 제관(祭官)을 보내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생각컨대 경은 성품이 명민하고 도량이 크고 깊어 재예(才藝)로 일찍이 과장(科場)에서 합격하였고 명성은 이미 다른 관리들보다 뛰어났다. 재능은 세상을 경영하는 데 능하였고 총명하여 전장(典章)과 제도(制度)에 익숙하였으며 도(道)는 시의(時宜)를 통달한 것이고 유술(儒術)로 빛을 내었도다. 풍채는 고고하여 세속인과 합하기 어렵고 의론은 당당하여 스승이 될 만하다. 수령으로 등용하면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흠모하였고 조정에 임명하면 기강을 바로잡아 엄숙해졌도다. 관서(關西)에 성을 쌓은 성대한 공적은 신백(申伯)의 정성을 넘어서지 못하랴. 태형(笞刑)을 줄였던 어진 마음은 소공(蘇公)이 벌에 신중했던 일에 부끄러움 없으리라. 형관(刑官)이 되었을 땐 억울한 옥사가 저절로 다스려졌고 말고삐 잡고 수령으로 나갔을 땐 송덕의 노래가 누차 일어났도다. 근본이 마음에 뿌리내려 단단해 뽑을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면 어찌 우아한 아름다움이 겉으로 나타나 찬연한 문채가 있겠는가. 처음에는 우리 집안을 걱정하더니 끝내 선왕의 창업을 도왔도다. 공신에게 내린 단서(丹書)는 임금의 맹서를 드러내니 흰 해처럼 그 충성은 빛났어라. 그의 작위를 조정에서 으뜸이 되게 하여 이조에서 인사권을 전담케 한 것은 당연하도다. 부덕한 내가 대업을 이어받아 탕왕과 문왕의 치적은 분산되어 잇기 어려우나 이윤(伊尹), 소공(召公)의 사업이야 거의 그대에 힘입어 이루어졌도다. 바야흐로 나라와 함께 복록을 누리기를 바랐는데 어찌 하늘이 원치 않을 줄 알았으랴. 경이 세상을 떠나던 날은 바로 내가 부왕의 상을 당하던 때라 갑자기 곤궁한 일을 당하여 마음이 무너지듯 하였으니 어찌 근심할 겨를이 있었겠는가. 지난 행적을 뒤좇아 생각하니 애연히 슬픈 생각이 일어나도다. 이미 시호로 이름을 내린 뒤에 간소한 제물로 끝을 장식하노라.”


이것은 대개 공의 출처(出處) 대체(大體)가 이미 갖추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임금과 신하가 제대로 만난 때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아, 성대하도다.


처음 공을 광주(廣州)로 이장(移葬)하였을 때 공의 손자인 숭질(崇質)이 호조판서로서 묘비와 묘갈 두 가지 글을 다 썼으나 오직 장사 지낼 때의 날짜와 자손의 관직과 품계만을 기록하였으며 공의 실제 자취에 대해서는 끝내 천발한 바가 없었다. 이제 부득이 삼가 공의 유장(遺狀)과 다른 책에서 한두 가지 본 것을 모아 묘비문을 만들어 신도(神道)의 동남쪽에 세우니 후일에 참배하러 온 후손이 이로 인해 그 대략을 알기를 바라노라. 오직 그 연대가 오래되어 견문이 미칠 수가 없지만 빠진 것은 있어도 과장한 바는 없을 것이니 이것이 내 자신의 역량을 다 바친 글이다. 이에 명(銘)을 붙이노니 다음과 같다.


아득한 홍가(鴻嘉) 연간에 백마가 자취를 드러내니,

이에 신인(神人)이 탄생하여 저 진한(辰韓)에 임금이 되었다네.

그 사이에 천년이 지나 그 후예들은 나뉘어져 살아가니,

비옥한 금성(錦城)은 남방에 으뜸일세.

아아 우리 선조 책을 읽고 실행하여,

덕을 쌓고 경사 심어 오랜 뒤에 일어났네.

탁월하신 문정공(文正公)은 고려말에 태어나,

학문은 세상의 스승이 되었고 충성은 세상이 의지하는 바 되었네.

원흉이 해쳐 후세가 탄식하였으니,

시호를 내리고 사당을 세워 이로써 권면하였네.

오직 공이 이어 받음에 기린의 뿔이요 봉황의 부리니,

나라의 예악 문물 보게 되자 성대한 시대에 크게 울었다네.

이때 임금께서 백성을 편안히 하고 구제할 것을 생각하니,

어찌 영웅이 없으리오 공에게 크게 의지했네.

마음으로 따라 친하였고 수족처럼 보았으니,

부지런히 힘써 계책을 세우자 여유롭게 치적이 이루어졌네.

그때 내란을 평정하여 공훈이 특별하며,

사헌부의 수장이 되어서는 해치(獬豸)처럼 신이(神異) 했네.

지방의 수령이 되어서는 따뜻한 봄이라고 칭송 받았고,

수상이 되어서 국정으로 나아갔네.

마침 사왕(嗣王)이 등극하여 왕위를 계승하니,

처음 경연을 열어 참된 뜻을 강론했네.

백성에게 고정된 부세(賦稅)인 조용조(租庸調)를 시험하니,

밝은 임금 훌륭한 신하는 천년에 한번 만날 뿐이라네.

공이 서거하고 태종도 바로 승하하였으니,

시호를 내리고 제사를 지내 공덕을 공경했네.

하물며 후손 중에 왕비 두 분 나왔으니,

우리 동성(同姓) 중에 누가 공의 위대함만 할까.

어느 해 이장했나 이백 년이 다 되니,

또렷이 새긴 글자 이지러져 지나는 자 눈물짓네.

미천한 내가 이를 두려워해 감히 뒤쫓아 드러내니,

산과 물처럼 고결(高潔)한 선생의 유풍이여 전하여 후세를 비추리라.

#96면

 

신도비명(神道碑銘) 추기(追記)

 

아아, 우리 선조 평도공(平度公)의 덕업(德業)과 공훈은 위로 지극한 다스림을 보좌하고 아래로는 자손을 위하여 복을 만드는 데 이르렀다. 문순공(文純公) 신도비문이야 아마도 백세에까지 마멸되지 않은 것이나 끝내 그것이 묘도(墓道)를 영화롭게 드러내지 못하고 드디어 황량한 벌판 작은 비석으로 겨우 성명만 표기하여 오백년 뒤 지금에 이르렀다. 이는 대개 자손들이 깊이 부끄러워할 일이나 지금까지 머뭇거린 원인을 살펴보면 실로 재물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금년 봄 종회(宗會) 자리에서 비로소 비석을 세울 논의를 내니 도유사(都有司)인 심서(尋緖) 군이 먼저 일부를 부담하고 이어서 승심(勝尋), 호서(好緖), 승서(承緖), 남서(南緖), 화서(驊緖), 명준(明雋) 등도 또한 그와 더불어 재계하고 정성을 기울이기를 원했다. 이 여섯 사람은 또한 상임유사(常任有司)이다. 드디어 법식에 따라 교룡으로 꾸민 머리, 거북이 형상의 받침을 갖추어 세우고 장차 이번 중양절에 제사 지낼 때 고하기로 하였다. 계획이 이루어지자 대략 위와 같이 사유를 기록한다.

 

단기 4304년 9월, 18대손 승정(勝貞)이 삼가 기록하고 20대손 찬하(贊夏)가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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