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작성자 대종중
ㆍ작성일 2016-02-05 (금)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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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분 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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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강공(文康公) 휘(諱) 소(紹) 신도비명(神道碑銘)


 




 



 

 


 

박순(朴淳)


 

박씨의 내력에는 시초가 있으니 양산(楊山)에서 신인(神人)이 즉위하여 신라 시조가 되었고 그 후예들이 삼한(三諱)에 흩어져 살았다. 그 중에서도 금성(錦城) 반남(潘南)에 살던 이들이 대대로 고관이 되어 가장 번성한 가문으로 이름이 났다. 휘(諱) 상충(尙衷)은 고려 조정에 출사하여 우문관직제학 판전교시사(右文館直提學判典校寺事)가 되었으니 충직함을 전하여 후손을 가르치고 이끌었다. 그 아들 은(訔)은 태종을 섬겨 벼슬이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이르렀고 공을 세워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분이 규(葵)를 낳으니 형조참판(刑曹參判)이요, 참판이 병문(秉文)을 낳으니 사직(司直)인데 공의 증조부이다. 이분이 임종(林宗)을 낳으니 통정대부 상주목사(通政大夫尙州牧使)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이 분이 조년(兆年)을 낳으니 벼슬이 이조정랑(吏曹正郎)에 이르렀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공은 이분의 장남이고 차남은 관(綰)이니 진사(進士)이며 막내는 집(緝)이다. 선비(先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된 이로 현감(縣監) 자선(孜善)의 따님인데 외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 역시 거족이다. 성종 24년 계축년(1493) 2월 14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諱)는 소(紹)요, 자(字)는 언주(彦冑)며 자호(自號)는 야천(冶川)이니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한양에 살았다. 8세에 고아가 되어 자매와 두 남동생과 함께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다. 연산군 때 인가를 많이 철거하자 부인이 여러 고아를 거느리고 합천(陜川) 야로현(冶爐縣)으로 남하하였으니 그 곳은 바로 공의 외가였다. 공은 기품이 빼어나고 풍도(風度)가 절로 형성되어 유년 시절부터 걸음걸이에 법도가 있었으니 벌써 위인(偉人)의 큰 그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겨우 10여세 쯤 되었을 때 현윤공(縣尹公)이 병에 걸리자 옆에서 모셨는데 나태하지 않아 밤에도 옷을 벗지 않으니 현윤공이 감탄해 “이 손자가 있어 내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직 총각 나이도 안 되었을 때 구도(求道)의 뜻을 가졌는데, 한훤당(寒暄堂) 김선생(金先生)이 일찍이 같은 고을 말곡촌(末谷村)에 살고 있어 고을사람 가운데 선생의 뜻과 덕행을 칭송하는 이가 있었다. 공이 그것을 듣고서 존모하여 매양 선생의 제자에게 물어 말과 의론, 행동을 반드시 그에 의지하여 체득해나갔다. 그때는 무오사화의 살륙이 일어난 뒤라서 선비들의 사기는 떨어졌으나 공은 홀로 공부에만 주력해서 강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근사록(近思錄)》,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가지고 가야산 절로 들어가서 옷깃을 여미고 끓어 앉아 침잠하고 연구하여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그래서 부모에게 문안하는 일 외에 산사를 나오지 않은 지가 7, 8년이나 되었다. 뒤에 박송당(朴松堂)의 학문이 연원이 있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가서 스승으로 섬겼다. 전심으로 가르침을 받고 의리를 연구해서 견식이 광대해지고 실천이 독실해져 조예가 깊고 높은 경지에 이르니 순정함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당시의 인사들이 모두들 교제하기를 원하였고 송당(松堂)도 또한 “자네가 나의 스승이요, 나의 벗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김안국(金安國) 공이 영남 관찰사로 왔을 때 공에 대해 친척의 우의도 있어 존중하니 모든 일을 반드시 자문하였다. 하루는 한 편의 책을 내보이면서 “나는 영남의 선비들에게 모범이 되고 표준이 될 만한 책을 제시하려 하는데 자네 뜻은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공이 “이는 상공(相公)이 좋은 뜻을 이루려 한 것이니 초학으로서 감히 간여할 바 아닙니다. 다만 이 책이 어찌《주자십훈(朱子十訓)》만 할까요”라고 하였다. 김공이 웃으면서 “내가 본직(本職)에 취임한 뒤 주야로 연구해서 이 책을 만들었는데 지금 자네의 말을 들으니 비로소 내 노력이 한만(閒慢)했음을 깨닫겠다”고 하고는 드디어 주희의 십훈(十訓)과 백록동규(白鹿洞規)를 써서 널리 주현(州縣)의 학교 벽에 두루 붙여 길이 모범이 되게 하였다. 공이 일찍이 “장엄하고 삼가하면 날로 강해지고 안일하고 제멋대로 하면 날로 경박해진다고 한 고인의 격언을 학자가 어찌 감히 잠시라도 소홀히 할까”라고 하였다. 또 “사람들은 《맹자》 글을 읽으면 문장에 능하게 된다고 말하나 내 생각으로는 《논어》가 더욱 절실하다”고 하며 반드시 매달 한 번씩은 읽었으니 그 자신을 다스리는 정밀함이 이러했던 것이다.


 

또한 일찍이 과거공부에는 힘을 쓰지 않았으나 재능이 뛰어나 무인년 가을 향시에서 합격되었는데, 삼과(三科)에서 다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그 이듬해 봄에는 사마시(司馬試)에 차석으로 합격하였다. 회시(會試)에 나아가 강석에 들어갔을 때는 동작이 침착하고 응대가 민첩하니 시강(試講)을 마친 뒤에 시관 제공들이 다 “오늘 옥당(玉堂)의 정자(正字)를 얻었으니 경하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때 조정암(趙靜庵)이 대사헌으로 좌석에 있다가 “그의 신채(神采)를 보건대 남의 아래에 굽히지 않을 사람이니 어찌 반드시 정자로 한정 지으리오"라고 하더니 과연 대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래서 여러 인사들이 모두 조정암이 사람을 알아본다고 하였다. 이 때 공의 이름은 이미 현량과(賢良科)에서 추천하는 인사 가운데 있었으나 바로 항시(恒試)에 나아가니 식자(識者)들은 그를 바르다고 여겼다. 그 후 전서(典書)가 되었다가 전중(殿中)으로 옮겨서 홍문관 수찬(弘文舘修撰)으로 임명되었다.


 

공이 이미 등과(登科)해서는 장차 지방 현령이 되어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편리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어머니 상을 당해 그의 본래 뜻을 이루지 못하니 그 침통함이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영남(嶺南)에서 운구하여 김포(金浦) 선영 아래 장례지내고 묘 아래에 오두막을 지어 안으로는 자신의 진심을 다하고 밖으로는 필요한 물건을 완비하니 고을사람들이 그의 지극한 효도에 감탄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는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로 임명되고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전임되었다가 또 수찬(修撰), 이조좌랑(吏曹佐郎)을 거쳐 누차 옮겨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에 이르렀다. 병조정랑(兵曹正郎),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이예조(吏禮曹)의 정랑(正郎),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을 역임하고 이윽고 사인(舍人)으로 승진했다가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으로 옮겼다.


 

그 후 자급(資級)이 차지 않아 내각(內閣), 동궁으로 누차 출입하였다. 그 때 여러 현인들이 사화를 당한 뒤라 사람들이 성리학을 꺼리니 서연(書筵)의 진강(進講)에서는 다만 관례에 따라 책임만 채울 뿐이었다. 마침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이 예각(藝閣)에서 머물며 승진하지 못하자 공이 이조(吏曹)에 있었기에 힘써 추천해서 설서(說書)로 삼았다. 그 후로 번갈아 문학(文學), 필선(弼善)이 되어 비로소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여러 책으로 성심을 다해 계도하였다. 동궁 빈사(賓師)의 자리에 있는 자들은 세자가 어리기 때문에 이것은 급무가 아니라 했으나 두 공은 그만 두지 아니하고 토론을 더욱 힘썼다. 인종(仁宗)의 훌륭한 자질은 비록 하늘에서 나왔다고 하겠지만 도덕이 숙성한 것이야 어찌 기른 바가 없이 그렇게 되었겠는가.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으로 승진해서 시강원보덕(侍講院補德)으로 전임되었다가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이 되었는데 대사간(大司諫) 박광영(朴光榮)이 인척이었기에 사양하였다. 교체되어 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가 되었다가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으로 옮겼고 다시 사간(司諫)이 되었다. 이 때 박홍린(朴洪鱗)이 헌납(獻納), 채무택(蔡無擇)이 정언(正言)이었는데 다 김안로(金安老)의 당이었다. 김안로가 파면되어 밖으로 쫓겨나자 군소 무리들이 바야흐로 그의 복직을 도모하여 사의(邪議)가 크게 일어나니 온 조정이 말을 못하였다. 공이 떨쳐 일어나 자신도 돌아보지 않고 그것을 막는 데 주력하니, 그 당류(黨類)가 성내고 배척해서 사성(司成)으로 좌천시키고 조금 뒤에는 파면시켰다. 이회재(李晦齋)가 밀양에서 와서 공을 대신하여 사간(司諫)이 되니 공이 회재에게 누가 미칠까 염려하여 회재가 두세 번 찾아와도 피하고 보지 않았지만 끝내 파면을 면치 못하였다. 공은 이미 사림의 중망(重望)을 받았으나 군소배들이 더욱 꺼려해서 드디어 남양(南陽) 촌사(村舍)로 피하였다가 겨우 일 년만에 가솔을 이끌고 다시 합천(陜川)으로 이사하였다. 공은 세상일에는 뜻을 끊고 오로지 독서에만 전력하니 비록 조석거리가 없어도 걱정하지 않았다. 중종 29년 갑오년(1534) 봄에 병이 들어 그해 가을 8월 21일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던 때에도 평일과 다름없이 얼굴과 손을 씻었다. 향년이 42세라 나라 사람들이 듣고서 상심하였다. 그의 벗인 김취성(金就成) 공이 울면서 지은 만사(輓詞)에는 “높은 학문에 잠심(潛心)한 경지, 원융(圓融)하여 체용(體用)이 온전하였네. 돌아가신 날 상심하니, 하늘이 수명을 더해주지 않았다네”라 하였으니 지기(知己)의 말이라 할 만하다.


 

그해 12월 24일에 야로현(冶爐縣) 서쪽 화양동(華陽洞) 괘산(掛山) 남쪽 언덕에 장사지내니 현윤공(縣尹公)의 묘와 같은 구역이다. 공과 조부가 그 후 반성군(潘城君)으로 인해 은혜를 입었는데 증작(贈爵)에 차이가 있었다.


 

공은 천품(天稟)이 이미 특출하였는데 학문으로 더해 몸소 실천하고 자득하니 마음은 맑게 빛나고 의표(儀表)는 한아(閒雅)하여 관대하되 절제가 있고 온화하되 제멋대로가 아니었다. 어머니를 섬기는 데는 지극한 효성이 있었고 형제에 대해서는 우애의 정이 독실했으며 은문(恩門)에 대해서는 은의(恩義)의 정도(正道)를 얻었다. 이치를 따라 실천해서 성대하면서 여유가 있었으니 미련한 선비가 조금씩 쌓아서 이룬 것이 아니었다. 평생 《대학》, 《논어》, 정자(程子), 주자(朱子)와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 등의 책으로 진학하는 계제로 삼아 깊이 보양(保養)하고 힘써 탐색해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기른 학력이 두터워서 영화(英華)가 밖으로 나타났다. 그의 용모를 바라보고 그의 말씨를 접하면 현명한 자는 그 마음에 감복하고 불초한 자는 그 덕에 감화 되니 사람들은 ‘명도(明道)의 유풍을 듣고서 흥기한 이’라고 말하였다.


 

일찍이 학자들에게 “학문하는 방법은 먼저 방심(放心)을 거두어 본원을 함양하며 의(義)와 리(利)를 변별하여 그 중대한 것만 세우면 그 밖의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다. 성현의 가르침은 하나의 이야기나 한마디 말도 모두 지극한 것이니 이를 따라서 나아가면 상달(上達)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의 글은 평이하고 전아하며 이치가 승(勝)하여 글자가 순조로웠고 시(詩)도 또한 온후하고 평담해서 화미함을 주로 하지 않았다. 일찍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무심하면 매번 많이 잊어버리는 데 이르고, 뜻을 두면 또한 부자연스럽게 된다네. 긴장과 이완이 적당하면 공(功)이 반드시 올 것이니, 진실로 허망한 인연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공의 학문은 마음을 잡아 보존함이 정밀하고 발이 실지(實地)를 밟으니 이미 자족해서 속임이 없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퇴직하고 남하할 때 길에서 시 한수를 지었으니 “명리(名利)의 앞에는 길이 몇 천이더냐, 강가에 돌아오니 고깃배 있네. 물과 같은 마음을 내 속에 거두었고, 구름 같은 만사(萬事)는 하늘에 부치었네”라고 하였다. 그가 영욕에 담담하고 자기 위치에 따를 뿐 원망이 없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공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깊이 〈육아(蓼莪)〉의 슬픔을 지녔으니 매양 상복 입은 자를 보면 반드시 그 부모의 나이가 얼마인가를 묻고서 오열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여러 숙부를 섬기는데 사랑과 공경을 다하였는데, 막내 숙모가 혼자되어 곤궁하게 늙으니 끊이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바치고 비록 멀리 떨어져 살아도 퇴근해서는 반드시 가 뵈었다. 재산을 분배할 때에는 한결같이 맏누이의 의견을 듣고 처분하였고 문안하고 봉양하는 것을 어머니처럼 하였다. 두 아우 관(綰)과 집(緝)은 강보 때에 고아가 되었는데 기르고 가르침에 은의(恩義)를 극진히 하여 마침내 모두 재능을 성취시켰다. 그리고 봉급이나 벗의 선물이 있으면 반드시 원근의 여러 친척에게 나누어 주어 친목하였고 두루 구휼하는 것이 독실하였으며 비록 처족이라 하더라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친구 중에 전염병에 걸려 사람들이 회피하는 자가 있으면 약을 주어 구제하고 마을에 상(喪)을 당했지만 가난해서 장례를 치룰 수 없는 이가 있으면 관곽(棺槨)을 주었으며, 비록 지극히 어리석고 천한 이라도 반드시 정성과 공경으로 대우해서 조금도 무시하지 않았고 벌레 같은 미물이라도 반드시 불쌍히 여겼다.


 

공이 이랑(吏郎)이 되었을 때다. 상공(相公) 이계맹(李繼孟)에게 시호를 내리는 관리로서 호남의 금성(錦城)에 갔는데, 그 고을 목사는 바로 눌재(訥齋) 박상(朴祥)으로 공보다 선배였다. 무릇 접대하는 공례(公禮)에서 조금도 겸양하지 않으니 박공이 처음에는 연소자가 기세를 부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행사를 다 마친 뒤에는 공이 바로 친밀하게 말하고 예의와 공경을 극진히 하니 박공이 비로소 그의 아량(雅量)에 탄복하게 되었다. 또 남의 무도함을 보면 간절하게 깨우쳐주었다. 허항(許沆) 형제는 공에게 친척이 되어 서로 왕래하면서 교분이 평소 두터웠으나 그들이 누이 집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서 준엄하게 꾸짖고서 절교하였다. 허항이 깊이 한을 품고 전력으로 배척하고 해를 끼쳐 곤경을 겪다가 먼 고을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재능은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이상은 당시에 행해지지 못했으니, 아아 애석하도다.


 

부인 홍씨(洪氏)는 사섬시정(司贍寺正) 사부(士俯)의 따님으로 또한 정숙한 덕이 있어 현모양처로서 본받을 만하였으니 향년이 85세이다. 공보다 44년 뒤에 세상을 떠나 양주(楊州) 풍양현(豊壤縣) 남쪽 금촌리(金村里)에 장례 지냈으니 따로 묘표가 있다. 5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응천(應川)은 계묘년에 사마시(司馬試)를 보아 사재감정(司宰監正)이 되었다. 마음을 쓰는 것이 자연스럽고 진실로 규범이 있어 여러 곳 수령이 되어 명성과 치적이 자못 드러났다. 사옹참봉(司甕參奉) 김희려(金希侶)의 딸에게 장가들어 6남 2녀를 낳으니 아들은 동현(東賢), 동호(東豪), 동로(東老), 동준(東俊), 동민(東民), 동선(東善)이다. 차남 응순(應順)은 을묘년에 사마시를 보고 영돈녕부사 반성부원군(領敦寧府事潘城府院君)이 되었으며 순후하고 삼가하며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어 세상에서 장자(長者)라고 일컬었다. 문천정(文川正) 수갑(壽甲)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동언(東彦)이요, 또 딸 하나를 낳았는데 지금의 왕비시다. 셋째 아들 응남(應男)이니 계축년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 충성스럽고 개결하고 우뚝 서서 동요되지 않았으며 학력으로 경지가 올라 조예가 매우 높으니 사림이 의지하여 국가의 주춧돌로 여겼으나 불행하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장원별좌(掌苑別坐) 윤화(尹和)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동도(東燾), 동휴(東烋), 동점(東點)이다. 사재감정과 반성군은 뒤에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넷째 아들 응복(應福)은 갑자년 제과에 합격해서 지금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로 있는데, 인후하고 독실하며 규각을 드러내지 않고 절조가 확고하다. 금화별제(禁火別提) 임구령(林九齡)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동윤(東尹), 동열(東說), 동망(東望), 동량(東亮)이다. 막내아들 응인(應寅)은 무오년 사마시를 거쳐 지금은 장단부사(長湍府使)니 가정 교훈을 잘 지켜서 여러 형의 장점을 이었으니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창락찰방(昌樂察訪) 변희눌(卞希訥)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4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동기(東紀), 동적(東績), 동위(東緯)이다. 큰딸은 사도시정(司䆃寺正) 이희백(李希伯)에게 출가해서 5남 2녀를 낳으니 아들은 대추(大秋), 대화(大禾), 대수(大秀), 대형(大馨), 대년(大年)이며 차녀는 진사 박성원(朴誠元)에게 출가해서 딸 하나를 낳았다. 이상 내외제손(內外諸孫)이 백여 인이니 문벌의 성함은 자고로 다시 없는 것이다. 모두 집안의 규범을 받들어 겸공(謙恭)하고 충후해서 고귀하여도 변하지 않으니 박씨의 경사는 한이 없을 것이다. 아아, 인자는 반드시 후손이 있고 하늘의 보답은 오래된 후에 정해진다고 하더니 이것이 그 증험이 아니겠는가. 이에 명(銘)을 짓는다.


 

멀고먼 신의 세계(世系), 발원한 곳 깊고 깊으니,

대대로 아름다운 덕에 힘써 오래 뻗쳐왔네.

탁월하신 저 부자(夫子)는 진실로 그 꽃이라,

천구(天球)의 순수한 바탕, 쪼지 않아도 깨끗하다네.

현명한 스승께 훈도(薰陶) 받아 그 학문 순수하니,

일찍이 도를 보아 그 식견이 원대했네.

깊은 뿌리에 가지가 무성하니 기량이 절로 이루어졌고,

단장(端莊)하고 높으며 화락하고 밝았네.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어 벼슬에 의지해 드러나니,

진사시 시험관 앞에서 문장을 떨쳤다네.

진사시에서 이름 높고 대책(對策)에서 으뜸 되니,

대로를 활보하고 아름다운 명성이 더욱 빛났다네.

한림원에 두 번 들어가고 세자궁에 세 번 들어가,

주공 공자 연역하여 황도(皇道) 왕도(王道) 찬술했네.

문하성(門下省)에서 선언(善言)을 올리고 사헌부 대관으로 기강을 잡았으니,

정색하고 반열에 있으면 소나무의 단단함이요 옥의 강함이라.

성인을 희구하는 현인이 되어 임금을 보필하려는 뜻 장구하더니,

불운할 때 태어나 마침내 재난과 함께 했네.

바른 이상 못 피웠고 좋은 포부 못 펴니,

강건한 날개 꺾여 먼 길에 넘어졌네.

궁벽진 곳에 사니 생활조차 곤궁하나,

문을 닫고 공부한 지 여러 해였지.

한가로이 속세 떠나 큰 즐거움 지녔으니,

곤궁해도 변치 않는 군자의 강함일세.

당연히 장수해야 할 것인데 천리는 또 아득하여,

난초 혜초 꺾이듯 이제 돌아가셨네.

정의롭고 곤궁한 이는 죽더라도 사람들이 사모하고,

요행히 복 받는 이들은 살았을 때도 도리어 사람들이 비웃는다네.

공이 얻은 바가 하필 장수일까,

본래 지닌 뛰어난 포부 기(夔)와 설(卨)을 압도하네.

높은 의표는 특출하고 온갖 행실은 모두 결함이 없으니,

고인에게 부끄럽지 않고 후세 철인에게도 모범이 될 만하네.

오래도록 전해져 일월처럼 밝으리니,

누가 장수하고 누가 요절했는지 식자들은 알리라.

하물며 하늘이 후손에게 은혜를 베풀어 또한 크게 번성하게 함에랴,

고관들이 서로 잇고 충효가 돈독하네.

그러므로 맑고 성스러운 기운 모여 왕비가 나신 상서가 있으니,

대궐에서 정치를 보좌하여 임금이 받은 천명이 무궁하리.

촉도(蜀道)처럼 길고 험했어도 진실로 번창하리니,

진한 향기요 빛나는 그 광채로다.

산에 벌려 수직으로 솟도록 소나무 잣나무를 심고서,

그 덕을 기록한 말을 바쳐 이 단단한 돌에 새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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