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작성자 대종중
ㆍ작성일 2016-02-05 (금)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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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분 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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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헌공(拙軒公) 휘(諱) 응복(應福) 신도비명(神道碑銘)



 

나는 세상의 일을 겪어 혼쭐이 난 사람이다. 다시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거늘 하물며 내가 남을 안다고 자랑하겠는가. 다만 항상 우리 박공(朴公)을 추천하여 의심하지 않고 말하길, ‘말을 적게 하고 행실은 돈독하게 하는 것, 이것이 군자가 고인으로부터 구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공은 나와 함께 태학생(太學生)이 되었고, 같이 대부(大夫)의 반열에 올라 서로 알고 지낸 지가 앞뒤로 40여 년이나 되었다. 공의 덕을 보니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처음 만난 날처럼 늘 똑같이 하였다. 만일 공을 조금이라도 아는 자들이라면 나의 말을 믿을 터이니, 내가 이렇게 말하는데 병통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공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되었다. 여러 자제들이 행장을 가지고 내게 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희들은 당신의 문장 실력이 우리 선인의 명(銘)을 짓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선고(先考)께서는 당신이 지은 문장을 높게 여겼고 심지어는 정유년(1597)에 지은 상소문 한 통을 베껴 곁에 두고 때때로 읽으면서 ‘이것이 국가를 중흥(中興)시키는 상소문 가운데 제일간다.’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돌아가신 후에도 생각이 어두워지지 않으셨다면 당신이 지은 묘지명을 받는 것이 소원일 것입니다.”


 

생각건대 나는 시골 사람과 같은 존재라 애초에 올곧음을 팔아 명예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에 금기로 여기는 일을 건드리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 내 상소에 동조했던 이들도 위태롭게 여겨 높이려 하지도 않았고, 동조하지 않던 이들은 칼을 잡고 해치려 했다. 오직 공께서는 칭찬을 하였으니 이는 《서경(書經)》 〈진서(秦誓)〉 편에서 말한 ‘남이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가 지닌 것처럼 여기고, 남의 입에서 나온 말을 자기 입에서 나온 것처럼 할 뿐만이 아니다.’라는 말과 같다. 이 또한 옛날 대신들의 도리였다. 옛날에 양웅(揚雄)은 노나라의 두유생을 대신으로 인정해 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공의 위업이 미처 대신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대신과 같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가령 앞서 칭송받았던 일로 말하면 만석군(萬石君)과 장상여(張相如)와 같은 이들이나 되어야 혹시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나는 외람되게 공에게 지우(知遇)를 입었으나 내가 공에 대해 아는 것은 여전히 깊지 못하였다는 점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공이 나로부터 취한 것은 또한 구구하나마 나 스스로 뛰어나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그러니 장차 세상에서 나를 알아주는 이에 대해 말한다면 그는 필시 공일 것이다. 그러므로 감히 명(銘) 짓는 일을 사양할 수가 없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諱)는 응복(應福)이고 자(字)는 경중(慶仲)이다. 박씨(朴氏)는 나주(羅州)에서 나온 우리나라의 큰 가문으로서 명성과 품행이 그 가문에 대대로 전한다. 그 특출한 분으로서 고려 말에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을 지낸 반남(潘南) 선생 상충(尙衷)이 계셨는데, 스승의 도리를 지녔으며 강직한 절개가 있었다. 본조에서는 좌의정(左議政)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 은(訔)이 계셨는데 태종 임금의 지우를 입어 영달하였다. 공의 증조부ㆍ조부ㆍ선고(先考)의 3대는 중형(仲兄)인 국구(國舅)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응순(應順)의 덕으로 사후(死後)에 지위가 높아지게 되었다. 첨추(僉樞) 임종(林宗)에게는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조정랑(吏曹正郞) 조년(兆年)에게는 좌찬성(左贊成), 사간(司諫) 소(紹)에게는 영의정이 각각 추증되었다. 찬성공(贊成公)은 천성이 강직하여 젊은 시절에 상대한 분이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명에 지나지 않았다. 무오사화(戊午士禍)의 화가 미쳤을 때, 구차하게 피하려 하지 않았는데 얼마 후에 불행하게도 일찍 돌아가셨다. 의정공(議政公)은 안팎으로 순박하여 보는 이들은 그의 상서로움을 알았다. 어려서 독서하고 도를 구할 때 송당(松堂) 박영(朴英)에게 나아갔는데, 벗으로만 여기고 감히 스승으로 자처하지는 않았다. 그 후에 대과(大科)에 장원을 하였는데, 당시 인조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이끌어 함께 관료로 나아갔다. 그러나 기묘사화(己卯士禍)에 대해 징계하지 않자 성리학을 진강(進講)하며 김안로(金安魯)를 다시 써서는 안 된다고 있는 힘을 다하여 간쟁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간당(奸黨)의 배척을 받고 영남의 외가로 돌아가 생을 마쳤으니 향년 42세였다. 아내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남양(南陽) 홍씨(洪氏)로 시정(寺正) 사부(士俯)의 따님이고 대사헌(大司憲) 흥(興)의 손녀이다.


 

공은 의정공이 영남으로 옮기던 해에 태어났다. 중종 25년 경인년(1535)에 5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여의고 7세에 어머니를 따라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여러 아들을 위하여 훌륭한 스승을 구하여 가르쳤으니 세상에서는 맹자(孟子)의 어머니에 비교하였다. 공은 그때부터 사문(斯文)의 유조순(柳祖詢)에게 학문을 배웠다. 종일토록 어머니 곁에서 글을 읽으니 어머니가 좋아하였다. 만년에는 매번 손자들을 경계할 때 이 일을 들어 말씀하였다. 백형(伯兄) 응천(應川)이 여러 아우들을 엄하게 다스렸으니, 아우들은 백형을 부친처럼 섬겼다. 공은 더욱 그 뜻을 지켜 어기는 것이 없었고 고관이 되어서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소선(笑仙) 성제원(成悌元)과 이소(履素) 이중호(李仲虎)로부터 배웠으나 결국에는 이중호에게 귀착하였다. 언제나 학업이 끝나면 다른 아이들과 담소하지 않고 바로 돌아와 복습하여 아침에 외웠던 것을 익숙해질 때까지 익혔다. 약관(弱冠)이 되어 기유년(1549)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이중호는 어린 나이에 명성을 얻은 것을 기쁘게 여기지 않고 시를 지어 보내 그의 원대한 목표에 이르기를 권면하였으니, 그가 남들에게 소중하게 여겨진 것이 이와 같았다. 공 역시 이중호의 도타운 마음에 보답하여, 그의 사후 유가족들의 생활을 죽을 때까지 돌봐주었다.


 

갑자년(1564)에 급제하였는데,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 저작(著作)이 되었고, 다시 사관(史館)에 추천되어 봉교(奉敎)가 되었다. 이어서 전적(典籍)과 감찰(監察)을 역임하였고, 예조좌랑(禮曹佐郞)ㆍ형조좌랑(刑曹佐郞)ㆍ형조정랑(刑曹正郞)ㆍ예조정랑(禮曹正郞)ㆍ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냈다. 대간(臺諫)으로는 정언(正言)ㆍ지평(持平)ㆍ헌납(獻納)ㆍ장령(掌令)ㆍ사간(司諫)ㆍ집의(執義)를 지냈다. 사 (師儒)로는 사예(司藝)ㆍ사성(司成)을 지냈고, 제사(諸司)로는 내섬(內贍)ㆍ종부(宗簿)ㆍ봉상첨정(奉常僉正)ㆍ사복(司僕)ㆍ예빈(禮賓)ㆍ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냈으며, 낭관(郎官)으로는 검상(檢詳)ㆍ사인(舍人)을 지냈는데 혹은 앞뒤로 여러 번 맡기도 하였다.


 

공은 관직에 막 진출했을 때부터 시속의 무리들이 자주 자리를 옮기며 스스로 약진한 것을 좋게 생각하다가 기롱을 받는 일을 부끄러워했다. 숙형(叔兄)인 참판(參判) 응남(應男)은 인품과 문학으로써 사림들로부터 두터운 명망을 얻었는데, 일찍이 박정한 세태를 싫어하여 “내 아우는 절대로 이런 습관이 없으니 존경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니 공은 자못 이 뜻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그 후 10년간 사론(士論)이 분열되어 식견이 있는 이들이 걱정하였다. 공 역시 집안이 이미 왕후(王后)로 인해 인척이 되었으나 공명(功名)의 길을 더욱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과 어울려 왕래하는 일이 드물었고, 집안에 머물면서 날마다 책 속의 인물들만 상대하며 스스로 즐겼다. 간혹 손님이 오면 술을 나누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관직에 있을 때는 항상 자신의 맡은 임무만을 생각하였다. 어쩔 수 없이 시비에 관계되는 일이 있으면 당파(黨派)에 구애되지 않고 오직 일의 올바른 이치에 따라 처리하였다. 그러므로 풍간(諷諫)하고 의론하는 처지에 있으면서도 양심에 부끄럽지 않았다. 훗날 더욱 높은 자리에 올랐으나 이러한 지조를 지키며 소홀히 하지 않았다.


 

선조 10년 정축년(1577)에 집의에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이듬해에는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하였는데 모친상을 당했다. 어머니는 80의 나이로 영화와 봉양을 모두 누렸다. 공은 억지로 효도를 하려고 하지 않고 언제나 즐거운 낯으로 기쁘게 받들었다. 공은 모친상을 당해 슬픔이 극심하였는데 몸이 쇠약해져 이전의 상처럼 할 수 없었으나 똑같이 돈독한 마음으로 추모하여 3년간 여묘에 살며 모든 성심을 다했다. 탈상(脫喪)한 뒤에는 승지로 복직하여 공조ㆍ호조ㆍ형조의 참의(參議)와 병조의 참지(參知)ㆍ참의를 역임했다.


 

가까운 종실의 친척이 간사한 행동으로 명성을 얻고자 주계군(朱溪君, 성종 때 종친인 李深源을 말함)의 고사를 가져다가 편전(便殿)에서 청대(請對)하였는데 진실하고 곧은 말이 없었다. 공이 면전에서 그 사특함을 배척하였는데, 듣는 이들이 그 말을 의심하였다. 얼마 후에 그 실상이 밝혀졌는데, 사실은 그가 남의 꼬임에 빠져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었다. 결국에는 태도를 바꾸어 공의 의견을 믿게 되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역시 당시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나라를 그르친다는 지목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한 일을 바로잡는 상소(上疏)가 초야(草野)에서 올라왔는데 지신사(知申事)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은 언로(言路)를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여 스스로 사직하였고 그 사람도 과연 언로를 막았다는 죄목으로 죄를 얻었고 아울러 당시 동석해서 권면했던 이들까지 모두 축출되었다.


 

기축년(1589)에는 특별히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이조에 결원이 생겨서 보충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신구(新舊) 대신들이 서로 자리를 고집하다가 뜻밖에 모두 공을 언급하였으니, 이는 피차간에 혐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임명이 되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모두 늦은 일이라고 하였다. 이듬해에 대사헌이 되었다. 그때 역적과 친척이라는 이유로 한 대신이 질문을 받고서는 대답을 잘못하여 중형(重刑)이 거론되었다. 공이 그 일을 억울하게 여겨 기회를 타서 말을 꺼냈으니, 비록 당시의 의론에는 불쾌했더라도 식자들은 공의 의견에 찬동하였다. 그 후에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고 동지의금부(同知義禁府)를 겸했다.


 

임진년(1592)에 왜구가 침입했는데 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준비가 없었다. 임금은 서쪽으로 피난하는 도중에 동궁과 길이 갈렸다. 공은 예조참판으로서 부총관(副總管)을 겸해 임금을 호위하여 따랐는데, 아들인 동량(東亮)도 병조좌랑으로서 함께 하였다. 명령을 받아 머무느냐 떠나느냐를 결정할 때에 부자가 각기 임금께 말씀을 올렸으니, 자식은 효도를 하려 했고 아비는 충성을 하려 했다. 그 슬픈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그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에 대해서는 생략한다. 공은 후에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러서 대사간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간관(諫官)의 지위는 오히려 다시 성대해졌고 공에게는 장자(長者)의 말이 있었다.


 

계사년(1593)에는 공조참판으로서 왕을 모시고 돌아오는 길에 해주(海州)에 이르렀다. 장차 서울로 가려는데 대사헌으로서 병으로 인해 체직되어 머물다가 중전을 호위하였다. 을미년(1595)에 서울로 돌아와 형조참판이 되었다. 정유년(1597)에 남쪽의 경비가 다시 위급해졌으므로 동추(同樞)의 벼슬로 중전을 모시고 수안(遂安)으로 갔다. 그 이듬해 무술년(1598) 7월에 병으로 인해 수안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9세였다. 부음을 들은 임금은 조회를 중지하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치르게 했다. 중전께서도 은혜를 보태어 8월에 상여에 실려 돌아왔고, 양주(楊州) 금촌(金村) 선부인의 묘 아래에 장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선산(善山) 임씨(林氏)로 별좌(別坐) 구령(九齡)의 따님이다. 4남 1녀를 두었다. 동윤(東尹)은 생원으로서 세자부솔(世子副率)이 되었으나 공보다 먼저 죽었고, 동열(東說)은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동망(東望)은 평산부사(平山府使), 동량(東亮)은 이조참판이니 모두 문과 출신이다. 딸은 주부(主薄) 정혜연(鄭惠衍)에게 시집 갔다. 동윤은 별좌 허사익(許思益)의 딸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종(淙)이고 딸은 어리다. 동열은 상례(相禮) 신발(申撥)의 딸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호(濠) 외에는 모두 어리다. 동망은 사인(士人) 노수근(盧守謹)의 딸과 결혼하여 3남을 두었다. 동량은 승지 민선(閔善)의 딸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다 어리다.


 

공은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충실하고 고요했으며, 일을 대해서는 신중했고 사물을 대해서는 너그러웠으며, 친구 사이에는 신의가 있었고 동료들은 공경하고 아꼈다. 그래서 가난한 친구는 그의 의리에 감동하였고, 하인과 같은 천한 이들은 그의 어진 사랑을 존경하고 그리워하였다. 남의 그릇된 행위를 보면 곧장 충고를 하였으나 푸대접하지는 않았다. 시세(時勢)에 따라 세태만 좇는 자들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대대로 가정의 법규가 검소하여 공 역시 사치를 즐기지 않았으며 여색(女色)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집안사람들이 돈을 버는 일에 대해서는 담박하였다. 의복이나 음식 역시 서생(書生)일 때와 다름이 없었는데, 오직 책에 대해서만은 많이 모아서 비축하였다. 공무를 보는 가운데서도 열람을 하고 베껴서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러므로 고사(故事)를 많이 알아서 자제들에게 해줄 이야깃거리가 끊이질 않았다.


 

공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지 16년 만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고, 벼슬길에 들어선 지 14년 만에 당상관(堂上官)이 되었으며, 그로부터 13년 만에 재신(宰臣)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고 보면 모두 일정한 한도를 꽉 채운 뒤에야 다음 단계로 나갔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대개 공 자신의 신념이 그러하였기 때문이었다. 자제들을 가르칠 때도 그대로 하였기에 막내아들 동량이 해주에서 전랑을 거쳐 승지로 발탁이 되자 며칠 동안 근심하는 낯빛을 보였다. 내가 공소(公所)에서 뵙고 수안에서 또 뵈었는데, 동량이 도승지로 진급한다는 말을 듣고서는 이전과 같은 걱정이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아! 공의 덕은 그 유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먼저 상고할 만한 것을 생각하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동열 등 여러 자식들이 모두 그 가문에 걸맞은 것도 다 여기에 까닭이 있다. 혹 아직 그렇지 않아서 그 도를 몸에 갖추는 것이 미진하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는 분명 발전이 있을 것이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법도 있는 집의 아들을,

어진 어머니가 키우셨네.

현명한 스승 찾아 보내주어,

배움으로 지혜를 얻었지.

몸소 행하는 모습 이것이 바로,

독실함의 기초였다.

숙성하여 법도를 들었으니,

먼 훗날까지를 기대하며.

일생동안 마음에 지녔어라,

엽등(躐等)은 불가한 일.

출세를 위해 옮겨 다니던 세태에서 차분히 기다리니,

그 뒤가 온당하게 되었다네.

여러 관직을 거치며 시위소찬(尸位素餐)하지 않고,

말을 내 놓으면 충직하였다네.

그러나 어찌 그 시대에 끝내 시행될 수 있었으랴,

아! 한결같이 꿋꿋하신 분이시어.

아! 포용력이 넓었던 분이시어.

대신의 풍모를 가졌다네.

공이 후세에 남긴 은택(恩澤) 누가 이어 받을까.

자제들 모두 조정의 반열에 들어섰네.

내가 지는 명은 기리는 것이 아니고,

있는 사실을 밝힌 것이니,

그의 시문(詩文)에서 질정하라.

                                                                        최립(崔岦)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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