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작성자 대종중
ㆍ작성일 2016-02-05 (금)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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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분 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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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공(西浦公) 휘(諱) 동선(東善) 신도비명(神道碑銘)


 



 

인조 18년 경진년(1640) 정월 2일에 좌참찬(左參贊) 박공(朴公)이 관직에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의 공훈(功勳)으로 인해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그 해 2월에 김포(金浦) 마산리(馬山里) 신좌(辛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시호는 정헌공(貞憲公)이다. 태학사(太學士) 조복양(趙復陽) 공이 행장(行狀)을 짓고 영의정 남구만(南九萬) 공이 묘지(墓誌)를 지었는데, 공의 손자인 판중추(判中樞) 세당(世堂)이 신도비의 글이 아직 없다고 하여 나 파평(坡坪) 윤증(尹拯)에게 비명(碑銘)을 부탁하였으므로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살피건대 박씨(朴氏)의 원계(元系)는 신라에서 나와 나주(羅州)의 반남(潘南)을 본적으로 했다. 고려 말의 상충(尙衷)은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으로서 포은(圃隱)․목은(牧隱) 등의 여러 공들과 함께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인임(李仁任)이 북쪽의 원(元)나라와 내통해서 사신을 죽인 죄에 대해 항론(抗論)하다가 유배 가는 도중에 돌아가셨다. 세상에서는 반남선생이라 하였고 본조(本朝)에 와서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 은(訔)은 우리 태종을 섬겨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어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평도(平度)로 공의 7대조이다. 증조부는 조년(兆年)이고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소(紹)이고 호(號)는 야천(冶川)이다. 중종조에 김안로(金安老)의 중상모략을 받아 사간(司諫)으로 관직을 마친 뒤에 증직(贈職)이 내렸는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선고(先考)는 응천(應川)이고 사재감정(司宰監正)으로서 행동에 올바른 법도가 있었다. 여러 곳에 수령이 되어 치적이 드러났다. 선비(先妣)는 순천(順天) 김씨(金氏)로 사옹참봉(司甕參奉)인 희려(希呂)의 따님이다.


 

공의 휘(諱)는 동선(東善)이고 자(字)는 자수(子粹)이다. 명종 17년 임술년(1562) 6월 21일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진중하고 질박하였으며 놀이를 즐기지 않았다. 기축년(1589)에 진사가 되었고 경인년(1590)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었다. 계사년(1593)에는 검열(檢閱)에 임명되고 설서(說書)로 자리를 옮겼다. 광해군이 세자(世子)로서 전주(全州)에서 무군(撫軍, 전시에 있었던 왕세자의 行營)을 하였는데 공이 곁에서 모시면서 사서(司書)로 올랐다. 갑오년(1594)에는 정언(正言)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유명한 사람들이 최영경(崔永慶)의 죽음을 두고 정철(鄭徹) 공을 무고하자 그에 반대하여 봉상시주부(奉常寺主薄)로 자리를 옮겼다. 을미년(1595)에는 병조좌랑(兵曹佐郞)에서 남포현감(藍浦縣監)으로 나갔다.


 

병신년(1596)에 홍산적(鴻山賊) 이몽학(李夢鶴)이 몇몇 고을의 현령들을 포박하여 홍천(洪川)을 지나자 공은 수사(水使)인 최호(崔湖)를 불러 함께 치자고 하였다. 최호가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공이 의리로써 타이르고 꾸짖으니 그제야 이웃 현(縣)의 병사를 징발하고 홍천으로 진군해서 목사(牧使) 홍가신(洪可臣)과 병력을 합하여 성 위에 오른 뒤 적을 성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드디어 그 일당을 궤멸하고 이몽학을 참수하여 그들을 항복시켰다. 이후 조정에서 논공(論功)을 했는데, 공을 별로 기꺼워하지 않던 자가 논공의 일을 맡았다. 그가 유독 공을 논공에서 제외했는데, 공은 끝내 입을 다물고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정유년(1597)에 왜구가 다시 침략하자 공이 다시 수사를 불러 현 동쪽의 옥마봉(玉馬峯)을 차단하자고 하였다. 수사가 듣지 않자, 공이 관리와 백성들을 거느리고서 배를 타고 피난을 갔다. 사람이 많아 배에는 다 탈수가 없자 공이 탄 말에 태워서 건너 주니 읍인(邑人)들 사이에 그 말이 전해져 없어지지 않았다.


 

가을에는 조정으로 돌아와서 전적(典藉)․직강(直講)․예조좌랑(禮曹佐郞)․예조정랑(禮曹正郞)․병조정랑(兵曹正郞)․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통례(通禮)․종부(宗簿)․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의 관직을 거쳤다. 그간에 간혹 외직으로 경기도사(京畿都事)와 수안(遂安)․인천(仁川)․부평(富平)․남양(南陽) 등지의 부사(府使)를 지냈다. 가는 곳마다 백성을 다스리는 데 언제나 성실하게 하였다. 자기를 절제하고 부하들을 지도하는 데 힘을 썼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 공에게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을 말한다) 시절에 노고가 있었다고 해서 통정(通政)으로 승진하였다. 계축년(1613)에는 동지부사(冬至副使)로서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왔다.


 

갑인년(1614)에는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갔다가 만기를 채우고 돌아왔다. 당시에 모후(母后)를 폐위하려는 의론이 생겨나 이이첨(李爾瞻) 등이 백관을 위협해서 정청(庭請)을 벌였다. 공은 집의 문을 닫아걸고 정청에 나가지 않았다. 아전 가운데 공이 죄를 얻을 것을 걱정해서 피할 여지를 마련해 주고자 하는 이가 있었다. 그가 남몰래 정청에 참여한 사람들을 적은 명부에 이름을 적어 제출하였다. 공은 곧바로 실상을 폭로하여 그 아전이 거짓으로 한 짓이라고 말하고, 자신은 사실 정청에 나가지 않았음을 밝혔다. 이를 들은 이들이 경탄하였다. 그러나 흉도(凶徒)들은 멀리 유배 보낼 것을 논하니 사태는 예측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귀양은 가지 않았다. 임기를 그만 두는 상황이 되어 무마가 되었다. 그때부터 서울에는 자취를 끊고 기외(畿外)에서 혼자 살았다.


 

계해년(1623)에 인조가 반정(反正)해서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간흉들을 토벌하고 탐관오리들을 파면하여 공도(公道)를 회복하고 폐단을 개혁하여 새로운 정치를 돕는 것이 대부분 대각(臺閣, 사간원을 말함)에서 나왔다. 갑자년(1624)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이 공주(公州)로 나가는데 공은 병조참의(兵曹參議)로서 배종(陪從)을 했다가 적을 토벌한 뒤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 공로로 인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해서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을축년(1625)에는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임명되었고,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공이 기록되었다. 또한 아들의 공으로 인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였다. 병인년(1626)에는 도헌(都憲)이 되어 과거의 고시관(考試官)이 되었다. 그런데 대신의 자제들이 많이 참여하여 방에 들게 되자 공이 그 일을 논의하여 그 방(榜)을 파하였다. 정묘년(1627) 난에 임금이 강화(江華)로 행차하였는데 공은 대사헌으로서 호종하여 평양(平壤) 황주(黃州)의 성이 함락된 죄를 논하고 마침내 군율(軍律)을 바로 잡았다. 형조판서ㆍ좌우참찬(左右參贊)ㆍ지돈녕(知敦寧)ㆍ중추부사 겸 지경연(中樞府事兼知經筵)ㆍ의금부(義禁府)ㆍ춘추관사(春秋館事) 등을 거쳐서 다시 도헌(都憲)에 취임하였다. 경오년(1630)에는 장릉(章陵, 仁祖의 부친인 元宗)을 추숭해서 부묘(祔廟)하는 예전(禮典)이 있었는데, 공은 동료와 함께 존호(尊號)의 글자 수를 줄일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공을 유배시키도록 명하였다. 집의(執義)인 권도(權濤) 공도 또한 관작(官爵)이 삭탈되었으나 얼마 후에 대신들이 간언을 올려 파직을 중지시키고 다시 얼마 안 되어 복관되었다. 임신년(1632)에 아들이 죽어 비통해 하였다.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나갔다가 그 이듬해 경질되어 귀경한 후로는 여러 번 참찬과 대헌(大憲) 직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에 임금이 장차 강화도로 가려 할 때 공은 집안 식구와 작별하고 임금의 어가(御駕)를 따르려 했다. 그런데 임금이 늙고 병든 신하들은 먼저 가라고 명하였다. 공은 마침내 먼저 강화도로 들어갔다. 임금의 어가를 적병이 갑자기 추격하였기에 방향을 돌려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그 후에 강화도가 함락되자 공은 교동(喬桐)으로 왕손(王孫)을 배종(陪從)하였다가 바로 호서(湖西)로 내려갔다. 난리가 진정되어 서울로 돌아와서는 참찬으로 조정에 있었다. 경진년(1640)에는 79세가 되었는데, 공의 병이 위독해서 신기(神氣)가 상쾌하지 않았으나 약을 쓰지 못하게 거절하고 병풍에 쓰인 절구시(絶句詩)를 여러 번 읊었다.


 

약을 먹고 길이 살 길 구하는 것이,

어찌해서 백이(伯夷)ㆍ숙제(叔齊)만 하겠는가.

수양산(首陽山)에 고사리를 한 번 먹은 뒤

만고(萬古)에 길이 죽지 않았다네.


 

위와 같은 시다. 가인(家人)에게 말하기를 ‘나는 지금 부모의 유체(遺體)를 온전하게 하여 돌아가니 남은 한이 없다.’라 하였다. 그리고 나서 정침(正寢)으로 옮겨 유연한 모습으로 돌아가셨으니 이것이 공 일생의 전말이다.


 

공은 천성이 온화하면서도 엄격하여 행동에 일관된 법도가 있었고 순박해서 거짓이 없었다. 평소에는 외물(外物)에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거처하는 곳은 단출하고 사치하지 않았으며 종일토록 엄숙했고 선(善)을 즐기며 남을 사랑하였으니 어리석고 미천한 자라도 모두 존경하여 후덕한 어른이라고 하였다. 젊어서부터 관계(官界)에 올랐다가 조용히 물러나 경쟁(競爭)하지 않았으니 성실하셨다. 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는 듯이 했어도 큰 절개와 큰 일에 대해서는 의(義)와 정(正)을 지켜 뺏을 수 없는 늠름한 기상이 있었다. 사람들은 비로소 그의 용기에 감복하여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다. 여러 번 대석(臺席)의 장(長)이 되어 지론을 공평하게 하였고, 일을 처리할 때에는 일관된 모습을 보였다. 병인년(1626)과 정묘년(1627) 두 해에 걸쳐 올린 계(啓)는 거실(巨室, 권력이 있는 명문 거족)의 친구들도 난처해하던 것이었는데, 시론(時論)은 더욱 이것을 중히 여겼다.


 

그의 가법(家法)을 살펴보건대, 야천공(冶川公)으로부터 덕행(德行)으로 세상에 명성이 있었고, 중부(仲父)인 부원군(府院君) 응순(應順)은 임금의 장인(丈人)이 되었으며, 숙부인 대사헌(大司憲) 응남(應南)은 호가 남일(南逸)로 사림(士林)의 종주(宗主)가 되었다. 공의 형제와 종반(從班)은 십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다 시례(詩禮)로 입신양명(立身揚名)했으나 독실하고 검소함을 숭상하였으며 예법을 닦았다. 그래서 논자들은 국조(國朝)의 외척(外戚)으로서 문벌이 드러나고 명덕(名德)이 깨끗한 자로서 박씨 같은 이가 없다고 하였다.


 

공의 백형인 사간(司諫) 동현(東賢)은 호가 활당(活塘)이다. 천성이 강직하여 가정에서나 조정에서나 행동에 법도가 있었다. 공은 백형을 부친과 다름없이 섬겨 종신토록 그로써 모범으로 삼았고 또한 이로써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공은 나이 19세에 부친상을 당해서는 상제(喪祭)를 모두 가례(家禮)대로 시행하였다. 여러 형이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으므로 혼자서 어머니를 모셨는데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누이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과부로 살았기에 공과 함께 살았다. 고아가 된 여러 조카와 종손(從孫)들을 모두 기르고 가르쳐서 천동(賤童)으로 만들지 않았으니 집안이 언제나 화락했다.


 

어머니가 향년 92세로 세상을 마치니 슬픔과 예제(禮制)를 다하였다. 후에 재상의 자리에 이르러 봉록과 맛있는 음식을 누이와 같이 하였고, 조카와 손자 등 여러 집이 모두 어려웠을 때 아침저녁의 끼니나 상례의 비용을 모두 지급하였으니 공의 집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먼 일가들은 비록 비천한 자라도 정성껏 접대하고 도왔으니 감사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가정에서는 위엄을 부리지 않으면서도 엄격하였다. 책상은 반드시 정돈되어 있었으며 동복(僮僕)들은 명령을 어기지 않았다. 가인이 곁에 있을 때 그가 비록 어린아이라도 나쁜 말로 남을 욕하지는 못하였다. 이홍주(李弘胄) 상공은 항상 남들에게 감탄하여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서 가법을 지켜서 옛날에 칭송받던 양파(楊播)ㆍ유빈(柳玭)과 같은 이는 오직 자수(子粹, 朴東善의 字임) 뿐이다.’라고 하였다.


 

부인은 완산(完山) 이씨(李氏)로 성종(成宗)의 별자(別子)인 익양군(益陽君) 회(懷)의 증손녀이다. 용천군(龍川君) 수한(壽閑)의 손녀이며, 청성군(淸城君) 걸(傑)의 따님이다. 그의 성격은 엄격하고 법도가 있어서 일찍 일어나 일을 하기를 노년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가업은 청한(淸寒)했으나 능히 가산(家産)을 유지해서 제사와 손님 접대에 사용되는 것을 모두 저축하여 그것으로 남편의 뜻 받들기를 하루같이 하였다. 명종 21년 병인년(1566) 5월 9일에 태어나 효종 원년 경인년(1650) 3월 8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85세였다. 그 해 9월에 공의 묘에 부장(祔葬)하였다.


 

공은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정(炡)은 이조참판(吏曹參判)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금주군(錦洲君)에 봉해졌다. 그의 맑은 이름은 일세를 진동시켰으나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딸은 찰방(察訪) 정사무(鄭思武)에게 시집갔다. 금주군은 관찰사(觀察使) 윤안국(尹安國) 공의 따님과 결혼하여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세규(世圭)이며 문명(文名)이 있었으나 요절했다. 차남은 세견(世堅)으로 승지(承旨)를 지냈다. 셋째아들은 세후(世垕)로 재주와 지혜가 있었으나 단명했다. 넷째아들이 바로 세당(世堂)이다. 딸은 군수(郡守) 이영휘(李永輝)에게 시집갔다. 정사무는 1녀를 낳았는데 사인(士人)인 박경(朴熲)에게 시집갔다. 손자인 세규의 두 딸은 이지만(李之萬)ㆍ조창운(趙昌耘)에게 시집갔다. 세견은 아들 둘을 두었다. 태상(泰尙)은 이조판서(吏曹判書)ㆍ대제학(大提學)을 지냈고 태소(泰素)는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서 세규의 후사로 들어갔다. 세당은 아들 셋을 두었다. 태유(泰維)는 정언(正言)을 지냈고, 태보(泰輔)는 응교(應敎)를 지냈고 세후의 후사가 되었는데 기사년에 간언을 하다 사형된 뒤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어 그의 충성이 표창되었다. 막내는 태한(泰翰)이다. 두 딸은 이렴(李濂)ㆍ김홍석(金弘錫)에게 시집갔다. 이영휘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택제(澤濟)와 지금 광주부윤(廣州府尹)인 철제(澈濟)이다.


 

나는 후세에 태어나 미처 공의 얼굴을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 선조인 팔송공(八松公)이 정묘년에 사간원에서 공과 함께 일을 했는데 공이 창졸간에 일을 당해서도 정의를 지키면서 동요하지 않는 모습에 감복하셨다고 항상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왔다. 그 후에 나는 공의 여러 후손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공의 성덕을 익히 들었으니 그의 풍모를 직접 접한 것과 다름이 없다. 여러 어른들이 지은 행장과 묘지에 의거해서 삼가 명(銘)을 짓는다.


 

아아! 반남 박씨는 덕도 있고 명성도 있어,

대대(代代)로 이어지며 아름답게 국가의 복이 되었도다.

그 가운데 정헌공(貞憲公)은 능히 가성(家聲)을 울려서,

문(文)과 질(質)이 빈빈(彬彬)하여 일찍부터 이름을 알렸다.

난리 만나 실적 세웠고 어려울 때 절도를 지켜,

화 입는 것에 겁내지 않았으니 공을 어찌 자랑할까.

인조반정 때를 만나 현자의 길이 형통하니

팔십까지 수명 누리고 관직은 경(卿)의 지위에 오르셨다.

지성으로 의를 행하여 꿋꿋하신 풍모 있으니,

본말(本末)이 모두 바로 서고 시종일관 결점이 없었도다.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으나 공이 남긴 교화(敎化)는 더욱 세상에 떨쳐,

가업을 잇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니 그 명성이 없어지지 않네.

즐거움이 있는 이 구원(丘原)에 군자가 편하게 계시구나.

이에 삼가 비(碑)를 세우니 산기슭이 밝도다.

                                                                              윤증(尹拯)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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