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작성자 대종중
ㆍ작성일 2016-02-05 (금)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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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분 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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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군(錦溪君)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朴公 신도비명(神道碑銘)

 

 인조 13년 을해년(1635) 2월 5일에 고(故) 판부사(判府事) 오창(梧窓) 박공(朴公)이 돌아가셨는데, 나는 시골에서 병들어 지냈기에 직접 가서 곡하지 못하고 만사(輓詞)만 지어 슬픈 마음을 전했다. 그런데 장사(葬事)를 치른 뒤에 그의 아들인 도위군(都尉君) 미(瀰)가 동양군(東陽君) 신 군(申 君奭)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내게 묘비명(墓碑銘)을 부탁하였다. 내가 그 선친과 교유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공이 귀양 가 있을 적에 일찍이 편지를 보내 주어 서로 알게 되었는데, 그 일에 대해 스스로 서술하고는 한두 명의 다른 사람들과 나의 형제가 능히 그 뜻을 알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내가 그 글을 읽어 보고는 마음속으로 못내 근심하였으나 아직 답장을 보내지 못하던 차에 공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니 명을 짓는 것을 또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살피건대 공의 휘(諱)는 동량(東亮)이고 자(字)는 자룡(子龍)이며 자호(自號)는 오창(梧窓)이다. 분진(汾津)의 봉성(鳳城)에 살았으므로 또 다른 호를 봉주(鳳洲)라고 하였다. 박씨(朴氏)는 실로 신라 국조(國祖)의 후손이다. 자손들이 분파(分派)해서 나주(羅州)의 반남(潘南)으로 옮겨 거처한 분이 공의 선대(先代)였다. 고려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상충(尙衷)은 직언을 하다가 절사(節死)한 사실이 역사에 전해 온다. 그의 아들인 은(訔)은 우리 태종을 섬겨서 좌의정(左議政)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올랐다. 다시 세대를 전하여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낸 임종(林宗)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의 아들은 이조정랑(吏曹正郞) 조년(兆年)이다. 그의 아들은 사간(司諫)을 지낸 소(紹)이다. 사간공은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응복(應福)을 낳았는데, 공은 바로 대사헌공의 넷째 아들이다.


박씨는 본래 귀족(貴族)이었다. 공의 숙부인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응순(應順)에 이르러 표창을 하여 은혜를 기록함에 따라 사간(司諫)ㆍ영의정(領議政)ㆍ정랑(正郞)ㆍ좌찬성(左贊成)ㆍ목사(牧使)ㆍ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의 증직(贈職)이 내렸다. 그때부터 가문이 더욱 번창하였다. 의정공(議政公)은 기묘사림(己卯士林)으로 높이 받들어졌다. 그의 아들 다섯 사람이 모두 재행(才行)으로 드러나게 되고, 공의 형제와 여러 사촌들이 모두 화려한 경력을 가지게 되면서부터는 세상 사람들이 모공(某公)의 아들과 손자는 그 재목이 이러한 자리를 차지해 마땅하다고 말하여 외척이라는 이유로 혐의를 두지 않았다. 사람들이 박씨 집안에 현자가 많다는 것을 안 것이다. 공이 일품위(一品位)로 올라서고 난 뒤에는 선고(先考) 대사헌공에게 여러 차례 추증하여 영의정에 반천부원군(潘川府院君)을 추증하였고, 선비(先妣) 임씨(林氏)를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하였다. 정경부인의 아버지는 좌승지로 추증된 임구령(林九齡)으로, 석천(石川) 선생 임억령(林億齡)의 아우이다. 융경(隆慶) 기사년(1569) 7월 24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사람됨이 잘 담금질하여 벼린 칼날 같았는데, 어렸을 적부터 곧바로 그 날카로움이 드러났다. 서너 살이 되었을 때 글을 배웠는데, 곧 철저히 깨달아 알았다. 아홉 살 때 할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밤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천둥이 치자 공이 옷깃을 바로 하고 일어나 앉아 있었다. 이에 할머니가 이상하게 여겨 “아가는 어찌하여 홀로 공경스러운 자세로 앉아 있느냐?” 라고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우레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태도를 바르게 한다【공자(孔子)가 실행하던 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고 할머니가 몹시 기이하게 여겼다. 조금 자라서는 훌륭하다는 명성이 동년배들을 뛰어넘어 성대하고 혁혁하였다.


17세 때에 여흥(驪興) 민씨(閔氏)의 집안에 장가들었다. 처가에 있을 때에도 반드시 매일 부모를 가서 뵙고 물러났으며,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온갖 놀이를 하면서도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독서를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친구들도 알지 못했다. 무릇 문장에 있어서는 공이 글을 짓는 것을 보고 누구나 다 신(神)이 돕는 경지라고 말하였다. 기축년(1589)에는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에는 문과 병과(丙科)로 급제해서 승정원(承政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임명되었다. 추천을 받아 사관(史館)에 들어가서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이후 대교(待敎)ㆍ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 강연(講筵)에서 기록을 하는데 남보다 매우 민첩하여 칭송을 받았다. 마침 새로 천거를 할 때 공은 조급하게 권세를 탐내는 귀문(貴門)과 권세가의 자제들은 모두 배척하고, 사림의 명망을 가지고 능히 직무를 볼 수 있는 한미한 가문의 선비들을 추천하였다. 이로 인해 권귀(權貴)들의 비위에 거슬려 논핵을 당해 파직되었다.


임진년(1592)에는 전례에 따라 호조정랑(戶曹正郞)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부(地部, 戶曹를 가리킴)는 공문서가 몰려드는 부서여서 ‘부서총(簿書叢)’이라 불렸는데 일에 익숙한 아전들도 그 번거로움을 감당해내지 못하는 정도였다. 그러므로 아전들이 제수된 사람들의 명단을 보고는 자못 깔보았는데, 공이 손으로 주묵(朱墨)을 잡고 검열하면 한 번 보고 난 뒤에 빠진 것이 없었다. 이에 노련한 아전들도 크게 놀라며 혀를 내둘렀다. 병조(兵曹)로 자리를 옮겨서는 말에 관한 업무인 마정(馬政)을 주로 처리했다. 일을 맡아본지 오래지 않아서 갑자기 왜란이 일어났다. 그 때문에 장사(將士)들 가운데 전쟁터에서 사람이 탈 말과 짐을 실을 말을 공에게 마련해 달라고 요구하는 자가 날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도 공은 여유롭게 대처하였다. 서쪽으로 파천하는 날까지도 말이 아직 4000여 필이나 남아 있었다.


공은 임금의 행차를 따라갔는데 밤에 임진강(臨津江)에 이르니 병졸들은 모두 달아나고 임금만 혼자 배 안에 앉아 있었다. 공은 도승지(都承旨)인 이항복(李恒福) 공과 직접 60여 명을 불러 모았다. 임금이 행차를 하게 되어 송도(松都)에 이르렀을 때, 장관(長官)과 같이 문하(門下)에서 숙직을 하였는데 밤에 병졸이 놀라자 장관도 창졸간에 보지도 못하고 역시 문을 밀치고 나가려 하였다. 공이 그 이 를 알고 동요하지 말도록 붙들어 말려서 조금 뒤에 안정되었다. 장관은 평소에 공을 재주가 있다고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더욱 그의 담대한 용기를 칭찬하고 일을 당하면 반드시 ‘박랑(朴郞), 박랑(朴郞)’이라고 일컬으며 공을 찾았다. 또한 또 비변사랑(備邊司郞)을 겸하여 기밀(機密)의 일을 참여하여 들었다. 어가(御駕)가 평양(平壤)으로 진주(進駐)해서 한 달이 지나니 백성들이 믿고 안도하였으며 외지에 있던 이들도 성 안으로 들어왔다.


임진강에서 군대가 궤멸되고 적군이 패강(浿江)으로 들이닥치자 조정(朝廷)에서는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는 논의가 나왔다. 군신(群臣)들 가운데 함흥(咸興)으로 가자고 주장하는 이가 많았는데 우의정인 윤두수(尹斗壽)와 이유징(李幼澄)만이 공과 함께 평양을 지키자는 계책을 내고 힘껏 논쟁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백성들은 어가가 출발할 준비를 한다는 소식을 갑작스럽게 듣고는 길을 막고 떠들어 대면서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공이 급하게 계책을 진달하여 그 계책대로 함에 따라 백성들이 비로소 물러갔다.

 

영변(寧邊)에 이르렀을 때 세자에게 명하여 국사를 총괄하고 군대를 지휘하게 하고 상께서는 강을 건너 요동(遼東)으로 들어가 중국에 내부(內附)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조정 신하들이 잇따라 도망쳐서 상을 따르는 자가 10여 인에 불과하였는데, 낭서(郞署)들 가운데에는 겨우 공 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이에 육조(六曹)와 비국(備局)과 춘추(春秋)와 내승(內乘)의 여러 임무가 모두 공에게 맡겨졌다. 공은 여기저기 분주하게 오가면서 온 힘을 다해 일을 하느라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 그런데도 매번 위태롭고 힘든 때를 당해서는 번번이 척후병을 자처하여 직접 어가를 호위하니, 상께서 마음속으로 중하게 여겼다. 이때 대사헌공이 늙어 병든 몸으로 분조(分朝)에 소속되어 가던 도중에 병세가 위독해지자, 공이 사정을 아뢰어 머물러 병세를 보살피라는 왕명을 받았다. 그런데 대사헌공이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은 이미 어가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는바, 차마 또 신의 아들로 하여금 아비를 먼저하고 임금을 뒤로하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듣는 자들이 측은하게 여겼다.


 

공이 마침내 어가를 따라가 의주(義州)에 이르러 이조좌랑에 제수되었는데,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얼마 뒤에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당시에 기무(機務)가 더욱더 많아져 상하의 사람들이 모두들 허둥거렸다. 공은 그 사이에서 주선하면서 영특함을 발휘하여 시원스럽게 처리하였는데, 재상들이 공의 계책을 옳다고 여겨 시행한 바가 많았다. 얼마 뒤에 조정 관원들이 차츰차츰 모여들었는데, 지난날에 바른 사람을 헐뜯던 자들이 다 없어지지 않아 스스로 불화(不和)의 단서를 드러내었다. 이에 분별하자는 의논이 크게 일어났는데, 공은 한결같이 잘 조정하면서 치우침이 없이 추천하였다. 그러자 여러 노성한 분들이 앞 다투어 공에게 세도(世道)를 바로잡을 책임을 떠맡으라고 권면하였다.


 

공은 중국말을 잘하였으므로 전후로 중국 조정의 관원들을 접대할 때면 반드시 왕의 앞에 있었는데, 매번 고문(顧問)을 받을 적마다 대답하는 것이 아주 상세하고 단아하였다. 이에 중국 사람들이 모두들 주목하여 보았으며, 상께서도 역시 재주가 있다고 여겼다.


 

계사년(1593) 10월에 임금께서 해주(海州)로 돌아와 머물러 있으면서 공을 직급을 뛰어넘어 동부승지에 제수하였다. 공은 감당해 내지 못할까 두려워 재차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좌승지로 전보되었다가 병으로 체차되었다. 다음 해인 갑오년(1594)에 도승지로 승진하였는데, 이때 공의 나이가 겨우 26세였다. 공은 더욱더 두려워하면서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마침내 사임하였다. 공이 전에 병조(兵曹)에 있을 적에 장관으로 있었던 사람이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공을 끌어들여 비변사 부제조(備邊司副提調)로 삼았는데, 이는 공을 대우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자리를 만든 것이다. 공은 불가한 점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극력 사양하였다.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경사(京師)에 조회 가서 동지를 하례하였다.


 

정유년(1597)에 왜적이 침입했다는 경보가 다시 급박해지자 왕비와 후궁을 받들어 모시고 수안(遂安)으로 가서 머물러 있었는데, 고을들이 여전히 피해를 복구하지 못하여 일이 대부분 안정되지 않았으나 공에게 의지하여 꾸려 나갈 수가 있었다. 얼마 뒤에 도승지로 소환되었다. 명나라의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왕이 제천(堤川)으로 내려가 주둔해 있으면서 응원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제천은 왜영(倭營)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 혹자들이 이르기를, “성상을 옹위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왜적들에게 임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종신(從臣)들 가운데 뽑힌 자들이 모두 가지 않으려고 머뭇거리면서 속으로 두려워하였다. 공은 전에 외방(外方)에 있었으므로 선발된 사람 가운데 끼어 있지 않았으나, 상소를 올려 따라가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마침 왕께서 내려가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해직되어 귀성(歸省)하였다. 그러자 특명으로 품계를 올려 주어 떠나가는 길을 빛나게 해 주었다.


 

공은 어버이의 봉양을 위하여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어 나갔다. 몇 달 뒤에 대사헌공의 상을 당하였다.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상을 당하여 대궐에 나아가 곡하고 상차(喪次)로 되돌아왔다. 상기를 마치고 호군(護軍)에 제수되었다. 산릉(山陵)의 자리를 오랫동안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상소를 올려 요설(妖說)을 깨뜨림에 따라 드디어 길한 곳을 얻을 수 있었다. 경기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면되었다. 병이 낫지 않고 계속되자 상께서 염려하여 의원을 보내어 병세를 묻고 약물을 하사하였는데, 대신(大臣)을 대우하는 예와 같이 하였으며, 다른 은혜로운 하사품은 또 더 많았다. 공은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하였으며, 이로 인해 외직에 보임해 주어 병을 조리하고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게 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말뜻이 아주 간절하였다. 이에 왕께서 읽어보고 감탄하면서 수찰(手札)을 내려 너그러운 내용으로 답하고는 외직에 보임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이듬해인 임인년(1602)에 조사(詔使) 고천준(顧天埈)과 최정건(崔廷健)이 나왔는데, 접대하기가 아주 어려워 머무르는 곳마다 힘이 달렸다. 상께서는 기전(畿甸) 지역은 더욱 물품이 부족할 것이라고 여겨 곧바로 공을 재차 경기 관찰사에 제수하였다. 공은 조처를 함에 있어서 올바른 방도를 얻어 두 사신이 끝내 많은 재물을 얻어 돌아갔으며, 백성들은 큰 고통을 당하지 않았다. 그 뒤 병으로 인해 사임하였다.


 

또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도내의 업무가 한가로울 때가 많아 순행을 하면서 지나가는 곳마다 여러 명승지를 둘러보았는데, 옛 친구나 빈한한 선비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면서 몹시 즐겁게 놀았을 뿐, 나머지는 털끝만치도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영월(寧越)에 갔을 때에는 노산군(魯山君, 端宗을 말함)의 묘에 나아가 제사를 지냈는데, 묘가 황폐해진 것을 보고는 상심하였다. 상께서 조정으로 돌아온 뒤에 근신(近臣)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는 실로 공이 발의한 것이었다.


 

조정에서 임진년에 수고한 여러 신하들의 공로를 기록할 때 공이 건의하기를, “모두 사직을 위한 일이기는 하나 창과 방패를 들고 싸운 사람은 말고삐를 잡고 따라간 사람과 서로 차이가 있을 뿐만이 아니니, 의당 무공을 세운 사람을 많이 녹공(錄功)하여 장사(將士)들의 마음을 위로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공의 말을 옳게 여겼다. 그러나 당시에 권세를 쥐고 있던 정승이 기각시켜 공의 말을 쓰지 않았고, 원종공신(原從功臣)을 감정(勘定)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인원수를 많이 뽑아 무시당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다. 공은 제조(提調)로서 그 일을 주관하면서 일체를 다 문서를 살피고 행실에 의거하여 처리하였다. 그러자 녹공되지 못한 자들도 스스로 원통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윽고 이등공신에 책훈되어서 호성 공신(扈聖功臣)이라는 호를 하사받았으며, 품계가 뛰어올라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졌다. 공은 양전(兩銓)과 탁지(度支)와 춘관(春官)과 추관(秋官)에서 참판(參判)과 참의(參議)의 직에 두세 차례 제수되기도 하였고, 대사성(大司成)과 대사헌(大司憲)과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제수된 것이 각각 한 차례였으며, 경연(經筵)과 관각(館閣), 금오(金吾)와 총관(摠管), 승문원(承文院)의 제조(提調) 역시 누차 겸임하였다. 그러나 모두 오래 있지 않고 옮겨졌다. 이후 호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공은 항상 나라 재정의 수입과 지출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을 걱정하여 묵은 폐단을 크게 개혁하고자 하였다. 이에 바야흐로 참판과 더불어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는데, 얼마 뒤에 외직으로 나가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평안도는 큰길에 위치해 있어 사신들의 행차가 줄을 이었으며, 관할하는 곳이 넓어 공문서가 아주 많은 지역이었다. 그런데다가 변경 오랑캐들의 침입이 자주 발생하였으며, 백성들의 풍속이 송사를 좋아하고 뇌물이 횡행하였으므로 정사(政事)를 하는 자들이 괴롭게 여겼다. 그런데도 공은 이를 잘 다스려 쌓인 문건을 물로 씻은 듯이 말끔히 처리하였으므로, 양쪽이 서로 다투는 사이에 추잡한 말이 없었다.


 

한가한 틈에는 유학을 일으키고 무예를 익히고 저축을 늘리게 하였으며, 백성들의 고통을 두루 물으면서 험요(險要)한 곳을 직접 돌아다니고, 빙성(氷城, 흙과 얼음으로 만든 성)을 쌓아 겨울철의 방어에 대비하였는데, 이러한 여러 가지 거행하기 어려운 일들을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거행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손님을 초대하여 술자리를 베풀어 풍류(風流)를 간간이 발하였으며, 친족들을 어루만져 주었는데, 친소(親疏)에 따른 대우가 적절했으므로 인정에 잘 화합하였다. 또 강포한 아전으로서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를 내쫓았으며, 채수(債帥)로서 탐학을 부린 자의 정상을 적발해 내어 금지시켰는데, 채수는 권세를 잡고 있던 정승의 희로를 조종할 수 있는 자였고, 강포한 아전은 바로 공의 조카뻘로서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더욱더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임씨(林氏) 부인이 장수하고 강녕하여 먼저 막내아들이 있는 신천(信川)의 치소(治所)로부터 둘째 아들이 있는 황주(黃州)로 옮겨 왔는데, 왕래함에 있어서 빛이 나는 듯하였다. 공이 또 평양으로 맞이해 와 아침저녁으로 잘 봉양하면서 강호의 누관(樓觀) 가운데 경치가 좋은 곳을 가려 수연(壽宴)을 베풀었다. 그리고 여러 자손 형제들이 좌우에서 모시고 즐겁게 해 주니, 원근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면서 칭찬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어 원래의 봉호를 지닌 채 집으로 돌아갔다.


 

선조(宣祖)의 상을 당하여 공을 수릉관(守陵官)으로 삼았다. 그해 겨울에 임씨 부인이 졸하였다. 공은 부음을 받고 밖으로 나가 호곡(號哭)하면서 조정에서 조처가 있기를 기다렸으며, 체차의 명을 듣자마자 그 즉시 상차(喪次)로 달려갔다. 그러나 곧 조지(朝旨, 조정의 명령)를 받들고 서둘러 돌아와 장사 지내는 곳으로 가서 참여하였다. 선조께서는 파천하는 중에 공을 보기를 한 집안의 부자간과 같이 하였으며, 공 역시 은혜에 감격하여 뼛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이에 스스로 방상(方喪)으로 자처하여 마치 아버지의 상을 당한 것처럼 하였다. 그런데다가 또 늙은 모친을 생각하여 걱정이 가슴속에 맺혀졌다. 두 상을 한꺼번에 당함에 미쳐서는 말투와 용모가 참혹하고 초췌해져 좌우 사람들이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은혜를 베푸는 예에 따라 세 품계가 뛰어올랐다. 국상을 마치고는 집에 있는 상차로 돌아갔다.


 

신해년(1611)에 외직을 마치고 다시 원래의 봉호를 지닌 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이이첨(李爾瞻) 등과 더불어 은밀히 창화(唱和)하면서 스스로 임금을 도운 공로가 있다고 하면서 기세를 떨치며 방자하게 굴었다. 정인홍은 심지어 어지러운 말로 어진 이들을 비방하기까지 하였는데, 그 말투가 마치 욕설을 하는 것과 같았다. 이에 공은 상소를 올려 정인홍을 극력 배척하였으므로, 간당(奸黨)들이 몹시 한스럽게 여겨 앞 다투어 공을 해치려고 하였다.


 

이때 마침 봉산(鳳山)의 수령으로 있는 신률(申慄)이 급변을 올렸다. 신률은 본디 간사한 사람으로서 여러 간흉들의 뜻이 화(禍)를 얽어내어 권병(權柄)을 도둑질하려는 데 있다는 것을 알고는, 떠돌아다니는 거지 가운데 형편없는 자를 체포한 다음, 독한 형벌을 가해 억지로 승복시켜 역모를 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친히 국청(鞫廳)에 나와 안문(按問)하였는데, 공이 추관(推官)으로서 들어와 앉아 있다가 그의 공사(供辭) 중에 어긋나는 것을 가끔 대신(大臣)의 물음으로 인하여 낱낱이 말하니, 이이첨 등이 곁에 있다가 눈을 흘겼다. 다음날 광해군이 하교를 내리기를, “박동량(朴東亮)은 역적을 비호하면서 구해 주려고 하였으니, 판의금부사의 직을 체차하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언관(言官)으로 있던 자들이 간흉들의 뜻에 따라 공을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하였는데, 광해군이 단지 삭탈관작하라고만 명하였다. 한참이 지난 뒤에 다시 원봉(原封)으로 서용되었다.


 

계축년(1613) 여름에 박응서(朴應犀)의 옥사가 일어났다. 박응서는 공사(供辭)에서 서양갑(徐羊甲)과 정협(鄭浹) 등을 끌어들였는데, 전후가 한 맥락으로, 모든 것이 이이첨의 무리가 위협하여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국구(國舅)인 김제남(金悌男)을 화란(禍亂)의 괴수로 지목하면서 칠신(七臣)을 끌어들였는데, 결국은 영창대군(永昌大君) 이의(李㼁)에게 책임을 돌렸다. 영창대군 이의는 당시 나이가 겨우 일곱 살이었다. 처음에 선조께서 병이 깊어졌을 때 영창대군 이의를 염려하였고, 또한 뒷날에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이에 유교(遺敎)를 직접 써서 광해군에게 동기간을 사랑하라고 부탁하고, 또 공경(公卿) 가운데 일곱 사람을 뽑아 영창대군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공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이이첨 등이 그것을 가리켜 조작된 전지(傳旨)라고 하면서 그의 당파 사람들로 하여금 칠신이 곧바로 밝히지 않았다고 논하게 하면서 모두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기를 청하였다. 정협이 무고한 바가 또 아주 광범위하여 선조(先朝) 때의 재신(宰臣)과 명사(名士)들이 대부분 벗어날 수 없었다. 공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일이 밝혀져서 즉시 풀려났다.


 

처음에 공이 옥사(獄辭)를 공술(供述)하면서 힐문하는 데 따라 변명하였는데, 국구와 말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자취가 있어 스스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나, 다른 일은 연관이 없었다. 그 뒤에 궁중에서 무고(巫蠱, 巫術로 남을 저주하는 일)하는 일이 발각되었는데, 간신(奸臣)이 그중에 한 부분을 끄집어내어 증거로 삼았다. 그러자 평소에 공을 해치고자 하던 자들이 또다시 때를 타고 아첨하여 드디어 견강부회하여 옥안(獄案)을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위로 장추궁(長秋宮, 仁穆大妃를 가리킴)까지 범하여 그 화가 점점 뻗어나가자, 뭇사람들이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서 공을 심하게 욕하였다. 오직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과 현헌(玄軒) 신흠(申欽) 두 분만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 이후 10여 년 사이에는 그 사실을 밝게 아는 자가 없었다. 병진년(1616)에 이이첨 등이 폐모(廢母)할 것을 의논해 정하고는 다시 칠신(七臣)을 화란을 일으킨 장본인들이라고 하면서 먼 외방으로 쫓아내기를 청하였는데, 중도(中道)에 유배 보내는 정도로 그쳤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뒤에 석방되어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그 후에 인조가 반정(反正)을 한 뒤에는 의논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지난 일을 뒤늦게 허물 삼으면서 더 이상 사실을 자세하게 캐 보지도 않은 채 흉흉하게 부화뇌동하여 반드시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고자 하였다. 그러자 여러 대신(大臣)들이 의금부에 있는 옛 문서를 가져다가 공이 진술한 원서(爰書)를 보고는 서로 “참으로 이와 같다면 이것이 무슨 죄가 되겠는가.” 하였다. 이때 수상(首相)으로 있던 이원익(李元翼) 및 정엽(鄭曄), 이귀(李貴) 등이 공을 위하여 그 일에 대해 해명하였고 그것이 모두 아뢰어졌다. 그러자 혹자가 이르기를, “기왕의 일이 이와 같은 데에는 이르지 않았다.” 하였다. 그러나 아는 사람들이 드물었으므로 전해지지 않았다. 공은 편안한 기색으로 길에 오르면서 집안사람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의 일에 대비하라고 하였다. 강진(康津)에 유배되어 있는 5년 동안에는 발걸음이 집 바깥을 나가지 않았다.


 

정묘년(162)에 부안(扶安)으로 이배(移配)되고, 6년 만에 다시 내지(內地)로 옮겨져 충원(忠原)으로 유배되었으며, 또 2년이 지난 뒤에는 스스로 편한 대로 처신하라는 은전(恩典)을 받았다. 이에 공은 서호(西湖) 가에 집을 사서 생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 공은 평소에 건강하여 질병이 없었으므로 날마다 친척들과 더불어 화락하게 지내면서 서로 즐기었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높은 열이 나더니 하룻밤이 채 지나기도 전에 눈을 감고 말았다. 향년 67세였다. 공이 졸한 뒤에 여러 아들이 글을 올려 원통함을 하소연하였다. 왕께서 여러 대신들에게 묻자, 영의정 오윤겸(吳允謙) 등 네 사람이 의논을 올리기를 모두 “실상은 그 글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상께서 관작을 지난날과 같이 회복시키라고 명하였다.


 

공은 중간쯤 되는 키에 낯빛이 검었으며, 수염이 양쪽 뺨을 뒤덮었고, 눈빛이 형형하여 20리 바깥의 사람과 물건을 분간할 정도였다. 성품은 진솔한 것을 좋아하였으며, 때때로 유습(儒習)에 속박되지 않았다. 집안에 거처하면서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는 곡진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형제간에는 서로 지기(知己)가 되었으며, 말을 하면 거스르지 않았다. 어버이가 죽은 뒤에 분가(分家)를 함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맏형수와 큰누이의 말에 따랐다. 벼슬길에 나가서는 훈귀(勳貴)로 있었는데도 자산이 불어나지 않았다. 이에 향리 사람들과 친척들이 칭찬하면서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은 다른 사람을 상대할 때 다툼이 없었고 흉중에 감추고서 쌓아 두는 것이 없었다. 누가 지나치게 속생각을 쉽사리 드러낸다고 말해 주면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먼저 의심하거나 어렵게 여기는 생각을 가진다면, 이는 내가 스스로를 믿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곤궁한 자를 애처롭게 여기고 어려운 자를 도와줌에 있어서는 귀천에 따라 차이를 두지 않았다. 이르는 곳마다 사대부들이 마치 자신의 집인 양 몰려들어 담소하는 소리가 자리에 넘쳐흘렀다. 상대와 마주해서는 형적을 잊어 공이 귀한 사람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관직에 임하여 공무를 수행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절대로 사적인 일로 흔들리지 않았으며, 일을 당해서는 강개한 마음으로 곧장 행해 나가면서 회피하지 않았다. 비록 유배지에 있을 때라도 조정에서 한 가지 선정(善政)을 시행하였다고 들으면 기뻐하는 기색이 얼굴에 드러났으며, 시의(時宜)에 합당치 못한 일을 행하였다고 들으면 하루 종일 걱정하면서 탄식하였다. 평소에 특별히 좋아하는 기호가 없었는데, 오직 술만은 좋아하였으나 취하도록 마시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용만(龍灣)에 머물러 있을 적에는 곱게 단장한 기생들이 즐비하였으나, 문을 닫고 들어앉아서 스스로를 지키기를 처녀와 같이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절조를 중히 여기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글을 읽을 적에 몇 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갔으며, 또 기억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자신의 장점을 자부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었다. 한가롭게 살게 된 이후로는 자못 서책을 가까이 하였으며, 흥이 오르면 붓을 들어 글을 썼는데, 뛰어난 솜씨가 당시의 대가들 못지않았다. 산수(算數)와 녹명(祿命)과 사어(射御) 등의 여러 기예에도 두루 통하여 묘한 조예가 있었는데, 이 역시 익히지 않고서도 능하였던 것들이다. 저술한 《방일유고(放逸遺稿)》 두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공은 어린 나이 때부터 이름을 드날려 재주로써 스스로를 드러내었는데, 위태로움에 임하고 어려운 처지에 빠져서는 충성심이 더욱더 드러났다. 국가가 중흥되고서 공은 공신이 되어 초상이 기린각(麒麟閣)에 걸렸는데, 숯이 많고 검은 머리카락이 변하지 않았으니, 아, 성대하기도 하다. 화(禍)가 하늘로부터 내려져서 몸에 백 가지 재앙이 가해져 괴롭히는 일이 그치지 않은 탓에 왕의 마음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세상의 운세가 다시 형통해져서도 가는 길은 더욱더 궁해져서 대궐문을 지척에 두고 원통함을 품은 채 죽고 말았다. 이것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공의 부인은 민씨(閔氏)로 승지 선(善)의 따님이고 우참찬 이몽량(李夢亮)의 외손녀인데, 공보다 한 살이 아래였다. 시집을 오기 전부터 여사(女士)라고 일컬어졌으며, 시집을 온 후에는 며느리로서는 며느리답고 어머니로서는 어머니다웠다. 도위(都尉)가 일찍이 병이 나 가 보았을 적에는 병문안을 온 붕우가 많은 것을 보고는 문득 언짢아하는 기색을 띠고 말하기를, “부마(駙馬)의 도리는 마땅히 숨어 살기를 처녀와 같이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그렇지 않으니, 내가 들어온 바와는 다르다.”라고 하였다. 그 식견이 높고 사려가 깊기가 이와 같았다. 을축년(1625) 5월에 공을 따라 강진(康津)의 적소(謫所)에 가 있다가 병으로 인해 졸하였다. 묘소는 파주(坡州)의 어느 산에 있었는데, 뒤에 공과 합장하였다.


 

공은 4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바로 도위인 미(瀰)로, 선조(宣祖)의 다섯째 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에게 장가들어 금양도위(錦陽都尉)에 봉해졌다. 차남은 의(漪)로,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이 되었다. 삼남은 유(濰)로 문행(文行)이 있었으나 요절하였다. 사남은 자(澬)이다. 사위는 대사성 이명한(李明漢), 참봉 홍처심(洪處深), 진사 유성오(柳誠吾)이다.


 

미는 1남을 두었는데 이름이 세교(世橋)이다. 이명한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수찬 일상(一相)과 진사 가상(嘉相)이며,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의(漪)는 2남 1녀를 두었고, 홍처심은 2남 2녀를 두었고, 유성오는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이고(貳高)로 1남이 있는데, 이름은 아무개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아아, 내 맘 슬프고도 애통하구나,

근세 이래로 사림에서 의지하는 사람은,

오리(梧里) 이공과 백사(白沙) 이공과 현헌(玄軒) 신공과

추탄(楸灘) 오공과 수몽(守夢) 정공뿐인데,

이들 몇 분은 모두,

사사로이 아부하여 공론을 폐하지 않을 분들임이 분명하도다.

공에 대해 헐뜯으며 하는 말들이,

남기(南箕)같이 꾸며 대어 부풀렸다네.

공 스스로 밝히지를 않으셨으나,

이들 몇몇 분들이 다 밝혀 주었네,

사람들이 헐뜯어서 욕했던 바를.

군자들이 완전히 다 회복시켰네,

이분들의 말씀은 다 믿을 만하니,

후세에서 영원토록 보게 되리라.

                                                                김상헌(金尙憲)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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