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작성자 대종중
ㆍ작성일 2016-02-05 (금) 16:53
ㆍ분 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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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창공 박엽 신도비


 

 


 

약창공(葯窓公) 휘(諱) 엽(燁) 약사(略史)

 

박엽(朴燁)의 자(字)는 숙야(叔夜)이며 반남(潘南) 사람이다. 문강공(文康公) 소(紹)의 증손(曾孫)이고, 참봉(參奉) 동호(東豪)의 아들이다. 엽은 나면서부터 총명함이 출중하여 말을 하면 바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조부인 응천(應川)이 밤에 ‘등(燈)’자를 넣어서 시(詩)를 지으라고 하니 엽이 바로 다음과 같이 지었다. ‘등이 방에 들어오니 밤은 밖으로 나갔다.[燈入房中夜出外]’ 또한 이웃 아이를 따라서 최유원(崔有源) 공의 집에서 놀았는데, 공이 집을 비우자 벽에 큰 글씨로 ‘주인은 산 위의 산이고, 손님은 입 속의 입이다.[主人山上山, 客子口中口]’라고 썼다. 최공이 돌아와서 묻자 여러 아이들은 모두 겁을 내어 감히 대답을 하지 못하였는데 엽은 자신이 했다고 대답하였다. 최공이 시를 보고 마음으로 허여했으며, 묻고 난 뒤 대답하는 것을 듣고서는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조금 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 없이 행동하여 소년 중에 뛰어난 자들을 압도하니 여러 소년들은 겁을 내어 복종하였다.

 

모친의 병이 위독하자 엽이 손가락에 피를 내서 소생시켰다.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오자 사람들이 모두 조수(鳥獸)처럼 달아나 숨었는데 엽은 조모를 업고 피난하여 여러 번 위기를 피했으며 또한 여러 친족을 도와서 난리를 모면했다. 명(明)나라 장병들이 국내에 오래 주둔할 때 엽은 중국어를 익혔고 또한 작문을 잘하여 서로 글을 주고받았다. 엽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였으며, 심지어는 그들이 타던 수레를 닦아서 과거시험장에 가게 하였다.

 

정유년(1597)에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의 전직(典職)에서 능력을 다 펼쳤다. 통제영(統制營)에 종사(從事)할 때 통제사(統制師)가 무기를 검열하는데 혹은 십여 일이 되어도 마치지 못했다. 아전 역시 기일을 더 청하였으니 엽은 ‘오늘은 일찍 검열을 하고 모여서 술을 마시자.’라고 하였다. 통제사가 웃으며 ‘이 일은 큰 업무여서 이전에 단 한 번도 열흘 안에 마친 적이 없었는데, 어찌 그리 말을 쉽게 하는가.’라고 하였다. 엽은 ‘청컨대 낮 동안에 일을 마치면 장차 공을 따라 놀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니 통제사가 허락을 했다. 엽이 여러 군졸들로 하여금 전함을 바다에 늘어놓고 배 위에서 각기 창칼을 드러내 밖으로 향하게 했다. 다음으로 포(砲)를 들고 순서대로 나와 그 날카로움을 검열하고 궁노(弓弩)를 쏘게 했다. 포를 들고 기다리기를 몇 차례 하지 않아 일을 다 끝내고 과연 낮에 돌아왔다. 신속하기가 귀신과도 같아 영내가 모두 크게 놀랐다. 이때부터 후임들이 공의 방식을 그대로 본받아 실천했다. 
 

기억력도 비상하여 한 번만 보면 평생을 잊지 않았다. 양전사(量田使)로 호남(湖南)에 갔을 때 주현(州縣)에 있는 전무(田畝)의 많고 적음과 입명(立名)ㆍ점등(占等)ㆍ고하(高下)를 묻는 자가 있었는데, 곧바로 대답하는 것이 마치 소리를 반사하는 것과 같았다. 마침내 전적(田籍)을 가지고 물어도 또한 한 글자도 틀리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다. 함경남도(咸鏡南道)의 병사(兵使)가 되어서는 성지(城池)가 작은 것을 보고 그것을 확장하였는데, 한 달이 채 못 되어 완성하였다. 형세가 웅장하고 우뚝 솟아 관문을 보전하였다. 또한 평산(平山)에 와서도 형세와 축성(築城)을 묻고 특명을 내려 고치도록 하였다. 또한 평양(平壤)․의주(義州)․성천(成川) 등 세 읍의 수령을 거쳐, 황해병사(黃海兵使)와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승진하였다. 엽이 서도(西道) 지방에서 가장 오래 재임하면서 법을 시행하였으므로 원근의 지방에서 모두 그의 권위에 굴복했다.
 

이후 관서(關西) 지방의 방백(方伯)이 되었다. 관서(關西) 지방은 중국으로 가는 큰 길목이기 때문에 물자가 풍부하였다. 또한 여진(女眞)과도 접경을 하기에 사나운 풍속이 있었으며 건주의 여진(女眞) 땅을 넘나들며 염탐하는 자가 있었다. 더욱이 임진란이 막 끝났기 때문에 이곳을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상하가 임시방편으로 해결했기 때문에 변방에 방비가 더욱 없었다. 
 

그래서 더욱 쇄신하려고 모든 계획을 확실하게 실천하니, 관리들이 감히 간계(奸計)를 부리지 못했다. 호령마다 엄준히 하였고, 일을 하면 의논이 잇달아 나와 전체가 복종하였다. 중국인도 그의 치적을 듣고서는 우리나라 사람을 보면 ‘박엽으로 하여금 이곳에 오래 있게 한다면 귀국은 서쪽을 돌아볼 걱정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엽이 서도를 안찰한 지 6년 동안에 정치를 한결같이 하였다. 그리하여 명성이 더욱 드러나니 호족(胡族)이 서로 경계하며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그때에 광해군이 정치를 그르쳐서 김용(金墉)의 변이 일어났다. 엽은 비통한 기색으로 말했다. “이이첨이 하는 짓을 보면 결국 찬탈(簒奪)을 하고야 말 것인데, 나는 이를 좌시할 수 없다. 사람들을 모집해 가서 죽여버리겠다.” 그리고 이첨이 빈사(儐使)로 왔을 때 어느 어미가 불효한 자식을 고발하는 일이 있었다. 엽이 그 자식을 법정에 데려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자는 천명(天命)이다. 인간으로서 그의 모친을 받들 줄 모르는 자는 국법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천지가 생긴 이래로 모친도 모르는 자가 머리를 보전한 이는 오직 이이첨 한 사람 뿐인데 천하에 어찌 두 이첨이 있을까. 바로 처벌을 하라.” 좌우가 모두 벌벌 떨었고, 이이첨도 또한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고서 감히 성을 내지 못했다. 
 

임술년(1622)에 오랑캐의 장수가 동쪽으로 강북에 주둔병을 모았다. 엽도 역시 그 맞은 편에 병사를 배치하였다. 오랑캐가 엽인 줄 알고서는 사냥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둘러댔다. 적을 정탐할 때에도 신기하게 오랑캐의 동정과 허실을 모두 환하게 알아서 항상 눈으로 목격하는 것과 같았다. 더러 오랑캐 추장의 홍두(紅兜, 중국인들이 어릴 적에 배에 두르는 사각모양의 붉은 천)를 몰래 가져와서 금(金)으로 장식해 돌려보내니 오랑캐가 귀신이라고 말하며 엽이 있는 동안에는 멋대로 침입하지 못했다. 
 

계해년(1623)에 인조가 반정(反正)할 때, 내란이 겨우 진정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불안하게 여겼다. 여러 공신들은 엽의 부인이 광해군과 인척이 되니 광해군에게 사사로운 정이 없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위명(威名)이 너무도 성대함을 걱정해서 “엽은 법 적용을 잔혹하게 하여 서도를 제압하였으니, 지금 제거하지 않으면 또다른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만약에 변고가 난다면 그때는 남살죄(濫殺罪, 지나치게 살인을 많이 저지른 죄)를 적용하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결국 사사(賜死)하였다.
 

그때 도원수(都元師)인 한준겸(韓浚謙)이 개부(開府) 중에서 원수에게 명령하여 갑병(甲兵)을 내어 엽을 체포하였다. 한공이 말하기를, “박엽이 어찌 갑병을 기다려 죽을 사람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엽은 변고를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다가, 원수의 전령을 보고서야 비로소 뜰 아래로 내려와 명령을 받았다. 아직 정세가 바뀐 줄도 모르고 형관에게 ‘죄명이나 듣고서 죽겠다.’고 하였다. 형관이 말하기를 반정이 이루어졌다고 하니 엽이 탄식하며 ‘여러 공신들이 차마 나를 이러한 극단으로 내모는가.’라고 하였다. 형장에 당도해서는 사람을 시켜 그의 아내에게 이르기를 ‘내가 지금 죄도 없이 이렇게 된 것은 부인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관향(管餉, 군량미를 맡아 관리하는 일)하던 전곡부(錢穀簿)를 가져다가 원수(元帥)의 병영에 주었다. 그것은 죽은 뒤에 협잡이 있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독촉해 목을 매라 하고 끈을 당기어 절명(絶命)하였다. 김신국(金藎國)이 엽의 후임으로 관찰사가 되어 백성들에게 복수하기를 허락하였다. 그러자 원한을 품은 집안들이 떼로 일어나서 변고가 속출하였다. 한공은 전곡부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국가를 위해서 일을 보아온 박엽과 같은 이도 또한 사형을 면치 못했다.’라고 하며 드디어 난동을 부린 괴수를 죽였다. 정부에서 듣고는 또한 김신국을 형벌하고 그의 귀장(歸葬)은 허락하였다. 
 

처음에 엽이 김류(金瑬)를 보고 홍전(紅氊)과 유표(油瓢)를 많이 주었다. 김류는 그 뜻을 몰랐는데 의거(義擧)하던 날에 홍전을 쪼개서는 신표(信標)로 삼고, 유표로는 사졸들의 갈증을 막았으니, 엽은 벌써 반정이 일어날 줄 알았던 것이다. 화를 당하던 전날 밤에 영하(營下)에 있는 법수교(法首橋)에 나가 놀면서 시를 짓기를 ‘관서백(關西伯)은 일대(一代)이나 법수교는 천 년이다. 알겠노니, 이날 밤이 가련한 밤 되리로다.’라고 하였다. 
 

어느 야사(野史)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윤리에 어긋난 임금에게 온 세상이 모두 부화뇌동하였다. 광해군의 인척(姻戚)이 더욱 앞질러 악을 조장하며 폭군의 뜻을 늦게 시행할까 겁을 냈지만, 박엽만은 그때 투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원수처럼 미워하여 이이첨을 면대해서 공격했는데, 그의 실정은 알아보지도 않고 바로 광해군의 인척이라는 의심 때문에 극형에 처했으니 이것이 어찌 성왕(聖王)의 본심이겠는가. 김류 등 여러 권신들은 아마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엄혹하게 형벌을 집행한 것이 진실로 화를 부른 이유이기는 하지만 엄혹한 것이 어찌 모두 죽일 죄가 될까. 그의 공은 그의 허물을 덮을 수 있음에도 그를 잘 쓰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엽이 죽은 뒤 5년 만에 정묘의 난이 일어났고 또 11년 만에 정축의 난이 있어서 오랑캐가 쳐들어 왔는데도 백성들은 감히 막지를 못했다. 사람들은 모두 만약에 관찰사 박엽만 있었더라도 그런 난리는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후에 200년을 지나서 온 나라사람들의 말이 모두 같으니 어찌 사사로운 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는가. 당시에 장동자(蔣童子)란 자가 있어서 시중(市中)에 숨어살다가 엽이 처형되었다는 말을 듣고 통탄해 하며 ‘이것이 난적(亂賊)을 부른다.’라고 여러 날을 분개했다. 이것이 이른바 만리장성을 파괴한다는 것인가. 어찌 혁명에 원훈(元勳)을 세운 모사(謀事)가 시장의 동자 한 명만도 못하다고 하지 않으랴. 
 

                                                                    당성(唐城) 홍직필(洪直弼)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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